민족을 꿈꾸다

[스크랩] 전통’과 민중신학

뽀종이 2009. 1. 23. 08:29

 

젊은민중신학자들의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1997년 제2차 신학 아카데미 강의안

기간: 1997년 3.24-5.19(공휴일 제외) 매주 월 저녁 7:00-9:00시 / 장소: 서울 경동교회 교육관

주제: 민중신학 - 실천이론으로서의 민중신학과 오늘의 과제

강사: 최형묵(조직신학 / 본 연구소 연구실장)

 

 

제4강 4/14 ‘전통’과 민중신학

 

 

 

1. 신학이 해명해야 할 과제로서의 ‘전통’

 

합리적 이성과 진보의 이념을 강조하는 근대화 과정은 ‘전통’을 극복하여야 할 어떤 것으로 만들었다. ‘전통’은 ‘합리성’ 또는 과학적인 것과는 상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심지어는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전통’은 종교적 교리와 미신과 무지의 상태와 관련하여 이해됨으로써, 악명을 얻게 된 것이다.

막스 베버가 두 유형의 사회가 있다는 일반론을 제시한 것은 이와 같은 견해를 하나의 사회과학 이론으로 제시한 것이다. 막스 베버는, 전통에 매인 사회와 ‘이해관계’에 따른 선별적 만족을 합리적으로 계산하여 행동 선택의 기준을 제공하는 사회로 나누었다. 베버는 말하기를, “초기에는 경제합리성의 정도가 다양했다. 처음에 전통주의가 존재했는데, 이는 오랜 과거로부터 나왔으며 물려받은 관습에 매달렸고 더 이상 원래의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시기에 그 관습들을 부과시켰다. 이런 상태는 단지 점차적으로 극복되었던 것이다.” 이 견해의 당연한 귀결은 현대사회란 전통 없는 상태를 향해 움직이는데, 이성의 도움으로 추구되는 관심이 행동의 지배적인 기반이고 전통은 그같은 현대의 사회양식에 맞지 않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통에 대한 거부 혹은 경시 경향을 부추킨 데는, 개인의 자아를 강조하는 사회적 풍조도 커다란 몫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전세대로부터 내려 오는 축적된 지식, 규범 이념의 장애물로부터 해방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이른바 근대적 ‘자아’란 전통을 탈피하는 데서 비로소 확립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더불어 오늘날 전통을 경시하게 하는 요인은 또 하나의 오늘의 생활양식 자체이다. 시.공간의 압축으로 인한 실제 삶의 급격한 변화는 과거의 어떤 것을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으며, 현재에 집중하게 한다.

 

그러나, 과연 전통은 비합리적인 과거의 유산에 불과한 것일까? 또는 비합리적인 것이라 단정하지 않더라도, 오늘의 삶 속에서 필연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과거의 유산인가?

오늘날의 사회과학은 전통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려고 한다. 이는, 인간의 기술, 지식, 신념 등이 전적으로 경험에서 오지 않았다는 것과 전적으로 이성에서 온 것만도 아니며 또한 성장하는 생물유기체에서 비롯된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특정한 시.공간 안에서의 인간의 신념과 행위를 연구하는 데 전통이 중요한 일부로 평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글은, 근대적 전통 이해에 반하여 다시금 전통을 단순히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신념과 행위를 다루는 데 경시되어 왔던 전통의 요소를 재조명함으로써 그 현재적 의의를 재평가하려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도 이 글의 본론은 아니다. 이 주제는 나로서는 아직 역부족일 뿐더러, 이번 강의의 주제에서도 진도가 너무 나간 분야가 될 수 있다. 이 글에서 전통을 다루는 것은, 정확히 말해, 민중신학에서는 전통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 것인가를 밝히기 위한 예비적 작업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이를 위하여 전통을 이해하는 시각을 초보적으로나마 제시해보려는 것이 이 대목에서 다룰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전통 자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거칠게나마 다뤄보려고 한다.

 

쉴즈는 전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통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가장 사실에 가깝고 기본적인 뜻은 단순히 물려물려받은 것 또는 유산(traditum)이라고 표현하며 과거로부터 현재로 전래되거나 물려받은 모든 것을 뜻한다. 이 말은 물려받은 것이 어떤 특수한 형태, 내용이며 물질적 또는 문화적 공헌을 했는가에 관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얼마나 오랜 세월을 두고 전수되었으며 구전인지, 서면으로 전래되었는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전통은 그것이 창조되고 발표되고 받아들여지는 데 있어서 합리적 노력의 정도와 아무 상관이 없다. 여기에서 이해하는 전통의 개념은 전통이 참된 것이라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구성될 때 증거가 있어서 받아들여졌는가의 여부에 관해서도 아무런 설명이 없다. 즉 전통의 저자가 무명이라든가 창시자의 정체가 밝혀졌다든지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결정적인 기준은 인간행동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 사상과 상상력을 통해 이루어졌고,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래되어 왔다는 것 뿐이다. ...

전통, 곧 전수된 것들은 물질적 물체, 모든 종류의 사물에 관한 신념, 사람이나 사건에 대한 영상, 관행, 제도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전통은 건물, 기념비, 조경, 조각, 그림, 책, 도구, 기계 등을 포함한다. 전통은 한 사회가 어떤 주어진 시간 안에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데, 현재의 소유자들 이전에 존재해 왔으며 외적 세계의 물체적 생산과정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며, 생태적, 육체적 필요의 결과로만 생겨난 것도 아니다. ...

인간 행동을 형성하는 관행과 제도의 경우를 볼 때, 전통은 그 어떤 특수한 구체적인 행동이 전수된 것은 아니며 그같은 전수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의 행동은 일단 전수된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행동이란 가장 속절없이 끝나는 것이다. 행동은 실제로 이행하는 그 사람이 지나면 더 지속되지 않고 더 이상 존재하지는 않는다. 전수될 수 있는 부분은 행동의 함축을 의미하며 표현된 모양이나 영상인 것이다. 이들 모형은 요구되며 천거되며 허락되거나 금지되는 신념이다. 지속적으로 야기되는 행동의 상태나 사건의 발생으로 생기는 기억이나 기록이 특별한 행동의 복잡성으로 남게 된다. 또 어떤 상태하에서는 규범적 전례나 미래행동을 위한 처방이 나타나는 것이다. 과거의 한 시기나 역사적 인물의 전수된 영상은 아직도 시행되는 고대 풍습이나 오랫동안 사용된 문구와 같은 전통인 것이다. 전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것을 전통이라 칭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전통이 받아들여질 때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고 자기네의 그 어떤 행동이나 신념처럼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현재에 존재하는 과거이며 그 어떤 새 발명품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큰 부분이 되는 것이다.”

 

쉴즈는 이 전통은 전달과 해석의 과정에서 변화하고 또 전수자의 소유과정에서도 변화하는데, 전통의 다양한 변모 역시 하나의 전통을 이룬다고 한다. 이를 다음과 같이 함축적으로 말한다.

 

“하나의 시간적 연쇄로서 전통은 전수되고 전달된 주제에 따른 다양한 연속이다. 그 다양성의 연결은 공통의 주제, 표현과 출발의 연속 그리고 근원에서의 계보를 따라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단 3세대 동안에 전달된 짧은 연쇄 과정에서도 전통은 어떤 면에서는 변화를 가져오기 쉽다. 물론 근본적인 요소는 변하는 요소가 있어도 지속된다. 그래서 전통이 전통으로 되는 것은 원래의 요소라고 간주되는 것들이 외부의 관찰자가 볼 때는 수차례의 관계를 거치며 거의 흡사한 동일성을 띠고 전달과 소유의 과정을 거쳐도 그 원래의 요소를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의 전수자는 왕왕 전통의 연쇄기간에 대한 심판자이다.”

이 주장은 다시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연결된다.

 

“전통은 자생하거나 정교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살아 있고, 알고, 욕구가 있는 인간들만이 전통을 재현할 수 있고, 다시 재현하고 수정할 수 있다. 전통이 개발되는 것은 더욱 참되고, 더 좋고, 더 편리한 그 무엇을 창조할 욕망 때문이며 전통을 취득하고 소유하는 사람들 속에 살아 있게 되는 것이다. 전통은 전통의 신봉자들을 잃을 때 퇴화한다.”

거칠게 발췌하여 본 이와 같은 쉴즈의 견해가 전통에 관한 견해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상의 설명을 통해 전통의 성격에 관한 몇 가지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우선 전통은, 1) 인간행위에 의해 형성되고 그것이 여려 세대 동안 전수되어 본질적인 어떤 모형을 취하고 있다는 점, 2) 과거의 유산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점, 3) 본질적인 모형을 형성하고 있기는 하되 전달자에 의해서 또는 수용자에 의해서 변화될 수 있다는 점, 4) 그리고 그것의 존속 여부는 그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인간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 등이다.

전통에 관한 이와 같은 이해가 특별히 새삼스러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신학이 이 전통의 문제를 다룬다고 할 때, 우리는 새삼스러운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은, 쉴즈가 한 대목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전통’을 ‘전통’이라 칭하지 않고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 전통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그것은 규범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전통의 한 측면을 포함한다. 쉴즈는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모든 전통이 다 선명한 규범을 내포하지는 않지”만, 특히 “받아들여지기 위해 표현된 신념의 그 어떤 전통에도 내재적 규범 요소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에서는 이 점이 전통과 관련하여 새삼스러운 문제로 부각된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학‘들’ 안에서 전통 역시 우리가 이해한 전통과 같은 몫을 해 왔다고 생각되지만, 일반적으로 신학은 특정한 전통들을 규범적인 것으로 여겨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전통을 객관화시켜 볼 안목을 갖추고 있지 못한 측면이 있다. 물론 성서학에서의 역사비평학 등은 성서 안에서의 다양한 ‘전통들/전승들‘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제시해 주기는 했지만, 그 전통들/전승들의 집성체로서의 성서에 대해 진정한 의미에서 객관화시켜 보는 것은 ‘건널 수 없는 강’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데 민중신학이 이를 건널 수 있는 것으로 주장했다. 성서를 ‘규범’이 아니라 ‘참고자료’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의 시발점이다.

성서를 포함한 그리스도교의 전통들을 객관적으로 조명하는 일이, 그것들이 지닌 규범적 측면을 와해시키는 것일까? 말 그대로 성서를 ‘참고자료’로 본다는 것은 ‘규범’으로서의 성서의 역할을 전면 부인하는 것일까?

 

2. 민중신학에서 전통은 어떻게 이해되고 있나?

 

이제 우리는, 문제를 일으킨 민중신학의 주장의 진의를 따져 봄으로써 전통에 대한 대한 이해를 우리의 입장에서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는 민중신학이 전통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는 인상을 갖고 있다. 민중신학은 ‘전통 신학’에 대한 ‘안티테제’로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전통이란 ‘서구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민중신학이 논해지는 자리에서 너무 자주 이 말이 사용된 까닭에 말 그대로 ‘서구 그리스도교의 전통’ 혹은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 전체를 깡그리 배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것은 실제와 다르다. 안병무가 말한 것처럼, 민중신학이 신학적 차원에서 겨냥한 한 목표는 ‘근본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렇다고 이 말이, 민중신학이 특정한 하나의 사조에 해당하는 ‘근본주의 신학’에 대해 저항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저항은 민중신학에서 뿐만 아니라 이미 서구 신학 안에서도 있었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이 특정 사조로서 근본주의 신학을 배격했다는 것만으로는 민중신학의 신학사적 의의가 독특성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근본주의 신학’이라는 말의 외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서구 백인 지배자의 신학’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중신학은 ‘서구 백인 지배자의 시각’에서 전개된 신학을 거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제대로 평가할 때에 민중신학의 신학사적 의의가 분명해진다. 결국 민중신학은 그리스도교 전통 자체를 전면 거부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전통을 거부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민중신학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있는 여러 신학적 자산들을 자양분을 삼고 있다. 한국 상황의 독특성이 암만 강조된다 하더라도, 민중신학이 그리스도교의 신학인 한 2000년의 기간 동안을 지속해 온 그리스도교 전통과 무관하게 성립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민중신학은 그리스도교 전통과 무관한 신학이 아니다! 우리가 제2강에서 규명한 것처럼, 그것이 제외된다면 민중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으로서 성립될 수 없다. 그리스도교란 분명한 역사적 실체이기에 민중신학이 그것을 뛰어넘어 (그리스도교)‘신학’으로서 자신의 몫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민중신학은, 어떤 비판자의 말대로 ‘민중신’학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전통 안에 있는 신학이다. 다만 민중신학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서남동의 ‘두 이야기의 합류’ 개념은 민중신학의 이론적 구조를 밝혀 주는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그 한 측면에서 말하자면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모형이기도 하다. 이제 그 주장의 진의를 밝히기 위해 서남동의 말 그대로를 다시 한번 인용해보자. 서남동은 성서적 전거로 출애굽사건, 십자가사건, 교회사적 전거로 1세기 교회의 천년왕국 신앙, 12세기의 요아킴 플로리스의 ‘성령의 제3시대’, 16세기 뮌처의 민중의 신학 혁명의 신학, 그리고 오늘의 세속, 희망, 혁명, 해방, 정치, 민중 그리고 성령을 주제들로 하는 탈기독교시대의 신학들을 꼽고, 한국민중운동사적 전거들을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기독교의 민중사와 한국의 민중사가 한국 기독교인에게서 지금 합류되고 있다. 이러한 합류과정을 민중의 신학은 어떻게 이해하고 실현해가야 할 것인가, 오늘의 ‘신의 선교’에서 이 합류과정은 어떻게 뻗쳐 나갈 것인가, 이것이 오늘을 사는 한국기독교인의 역사적 소명일 것이다.”

 

“한국의 민중신학의 과제는 기독교의 민중전통과 한국의 민중전통이 현재 한국교회의 ‘신의 선교’ 활동에서 합류되고 있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현재 눈앞에 전개되는 사실과 사건을 ‘하느님의 역사개입’ 성령의 역사, 출애굽의 사건으로 알고 거기에 동참하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일이다. 거기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것이며 그것을 신학적으로 해석할 때에 위에 전제한 전거들이 필요불가결하게 된다.”

이와 같은 ‘두 이야기의 합류’의 신학적 의의에 대해서는 이미 제2강에서 살펴 보았다.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지만, 이 주장에서 분명히 제시된 바와 같이, 민중신학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하나의 축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번 강의 주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전거’ 라는 말이다. 이 견해를 밝힌 대목을 인용해 보자.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전거’라는 말을 쓰지 않고 절대적 계시라든가 신학의 규범(norm)이라든가 하는 말을 씁니다. 그것이 바로 성서라는 것이죠. 보수신학자들은 그래서 성서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서 자체가 절대적인 표준이라는 것은, 내가 이해한 대로는, 성서 자체가 이미 거부하고 있읍니다. 성서는 열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는 성서를 전거(point of reference)라고 봅니다. 이것을 풀어 말한다면 참고서라는 겁니다. 이런 눈으로 보면 교회사도 전거가 될 뿐 아니라, 특히 한국의 사회.문화.경제의 전개과정에서 보여지는 민중전통도 하나의 전거로 삼을 수 있읍니다. 이것은 계시니 규범이니 하는 말을 그대로 쓰는 신학의 입장에서는 나처할지 몰라도 나는 성서를 무조건 규범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전거’(典據)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따져 과연 서남동이 이 말을 정확하게 사용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 이 말을 통해 겨냥하는 바가 무엇이었는가에 주목하고자 한다. 서남동은 이 말을 ‘규범’에 대립되는 ‘참고자료’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이 말을 다시 새기면, 어떠한 전통이든 그 자체가 곧바로 규범이 될 수 없다는 것이요, 나아가 성서 역시 그 자체로 규범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엇이 규범이라는 말인가? 서남동은 이와 같은 문제제기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물론 서남동의 주장 안에 이에 대한 답변이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서남동의 주장 안에는 이 답변을 풀 수 있는 내용을 함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잠시 후 다루기로 하자. 지금 이 대목에서는, 전통적 신학에서 규범을 배타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사실상 신학적 성찰이 되고 있고 / 되어야 할 소재들을 명시적 논의에서 배제시켜 버린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서남동의 본의에 충실하자.

사실 신학의 규범에 관한 이와 같은 서남동의 발상과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전통 안에서 이미 그 전례를 가지고 있다. 가톨릭의 전통주의에 대항해 성서주의를 내세운 종교개혁 신학의 원리가 사실상 이와 같은 발상의 전초를 이룬다. 전통이 절대화되고 그것이 규범이 되었을 때, 종교개혁자들은 그 전통을 상대화시시킬 수 있는 근거로 성서를 제시하였다. 전통은 역사적 소산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런데 루터가 성서를 교회의 가톨릭 전통을 상대화시키는 근거로 성서를 제시했을 때, 문자적 의미에서 성서를 절대화한 것은 아니다. 루터가 강조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 이었고 그것이 ‘성서’ 안에 있다고 한 것이다. 문자로서의 성서를 최종적 권위의 근거, 곧 규범으로 보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고 함으로써 성서의 배타적 지위를 주장한 셈이었다. 그러나 성서의 배타적 지위를 인정한 이와 같은 주장은 곧바로 또다른 공격에 부딪혔다. 그것은 뮌처를 위시한 급진적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서였다. 급진적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것은 ‘내적인 말’ 곧 인간의 마음 가운데 있는 신의 현존이지, ‘외적인 말’ 곧 성서는 아니었다. 성령은 매 순간 개인 안에서 말할 수 있고, 일상적인 것을 생각하고 있는 그 가운데서도 말할 수가 있다고 그들은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를 하나의 참고서로 보면서, 민중신학의 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성령론적 해석이, 급진적 종교개혁자들의 발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서남동은 성령론적 해석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또렷이 주장한다.

“예수 사건 곧 구원의 사건은 나의 선택, 나의 결단으로 일어나는 것이지 단순히 2천년 전에 일어난 그 사건에 내가 동의하고 그것이 그대로 진라고 고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나의 결단은 성령의 역사(役事)에 의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니까 하느님의 결단을 내가 자발적인 나의 결단으로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나는 ‘성령론적’ 이라고 한 것입니다. ...

성령론적 성서해석이란, 2천년 전에 씌어진 본문을 지금 해석한다는 것이 아니고 - 그것은 그것대로 성서해석학이겠으나 - 내가 선택.결단해야 할 지금의 사건 앞에서, 예컨대 내가 어느 독재체제에 항거해야 할 것이냐, 안 해야 할 것이냐와 같은 문제를 놓고,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느냐를 결단하려고 할 때 거기에는 하나의 참고서가 요청되는데, 성서의 본문을 이러한 참고서로 받아 해석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서를 지금의 ‘참고서’로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과거의 사건이 그대로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지금 하느님의 뜻에 맞게 결단하려고 할 때, 모세는 어떻게 결단했고 바울은 어떻게 결단했는가를 ‘참고’로 보자는 것입니다. 성령이란 항상 내재적(內在的)이고 지금 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이거든요. 지금의 성령감동은 부차적이고 바울의 성령감동은 원초적이라면 하느님은 과거의 하느님이지, 지금의 하느님은 못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지금 살아계신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성령론적 해석의 입장에서는 텍스트-콘텍스트의 모형에 근거한 성서해석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게 별로 타당성이 없다고 보아요. 지금의 성령활동이고, 과거의 것은 하나의 전거(reference)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상의 논리를 추적해 오면서, 우리는 민중신학이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현재의 민중해방의 실천’의 관점에서, 민중신학은 전통을 이해하고 있다. 이 실천의 관점에서 선택적 수용의 결과로 과거의 여러 여러 전통들이 합류하며, 이 합류된 전통들은 변화하게 된다. 이 전통들이 변화하되 여전히 전통으로 불리울 수 있는 것은, 그 변화 가운데서도 과거 전통과의 지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통들이 실천을 통해 합류되고 변화하는 가운데 규범적 원칙이 형성된다. 현재의 실천 자체가 규범이라든지 과거의 전통 자체가 규범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규법적 원칙이 수립된다는 이야기다. 이 때 규범의 진위성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하느님의 내적 현존의 장인 ‘민중사건’이 된다. 현재와 과거의 전통을 궤뚫고 있는 ‘민중사건’ 곧 ‘민중해방 실천’이 규범의 진위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전통 가운데 하나인 성서를 참고서라 한 것은 현재의 실천을 우위에 놓는 인식론 내지는 세계관을 강조하는 의미이지, 현재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는 전통의 역할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닌 셈이다.

그런데, 어째서 ‘민중’사건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지는 제2강에서 밝혔다. 그것은 포괄적 의미에서 하느님의 계시의 장인 이 세계가 적대적 세력들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은 이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점은 비단 민중신학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존재해 온 어떠한 신학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평가될 수 있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성서를 규범적 지위로 인정하고 있는 개신교 신학이나, 교회의 전통을 규범적 지위로 인정하고 있는 가톨릭의 신학은, 말 그대로 ‘성서로만’, 또는 ‘교회의 거룩한 전통에 입각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모든 신학들 역시 각자 선 자리가 있고 그 나름의 실천적 문제인식에 따라 성립된 것이다. 어디 세상에 ‘순수한’ 전통과 ‘순수한’ 규범 그대로인 것이 있는가? 우리는 성서 자체 안에서도 다양한 전통들이 합류하고 있으며 또 다양한 해석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마치 절대규범처럼 간주되고 있는 신조 역시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해석된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우리는 어떤 전통은 수용할 수도 있고 어떤 전통은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취사선택할 수 있는 전통들을 단순유형화시켜 범례를 삼을 수는 없다. 마치 서남동이 성서와 교회사 그리고 민족사에서의 ‘전거’들을 범례화시킨 것처럼,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전통의 전달과 수용과정은 단선로를 밟지 않는다. 그것들은 어떠한 시점에서든 당대성과 과거와의 부단한 교통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러 형태의 혼용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예컨대, 그것은 구약성서에서 민중들의 메시아 대망 가운데 하나로 다윗왕과 같은 메시아상이 중요한 하나의 전통을 형성한 것과 같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 현재의 실천이다. 형태상, 그리고 과거 시점에서의 실제적인 의미상 민중해방 사건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어떤 전통의 모형들도 새롭게 민중전통에 합류할 수 있는 가능성은 현재의 민중운동의 시점에서 재해석된다는 데 있다.

 

3. 부설: 사회전기로서의 전통 - ‘민중 사회전기’를 바탕으로 하는 민중신학

 

민중신학은, 민중사건 / 민중해방 실천을 근거로 전통을 재해석 수용하는 모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민중신학의 전통에 대한 이해를 논할 때 검토해야 할 과제가, 김용복이 제시한 ‘민중의 사회전기’ 개념이다. ‘전통’을 ‘사회적 전기’(social biograpy)라 할 때, ‘민중의 사회전기’라는 말은 전통에 대한 민중신학의 이해를 본격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하나의 개념이자 이론적 틀의 일부를 구성하는 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민중신학에서 이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김용복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해보자.

 

“필자는 이 논문에서 신학적 사고를 효과적으로 전개하는 방법의 한 가지 시도로서 ‘民衆의 社會傳記’를 신학의 역사적 틀(historical point of reference)로 할 것을 제안하고 그 가능성을 검토하려고 한다. 필자는 아직도 이 제안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통일성 있게 적용하여 신학적 사고를 전개하는 것을 충분히 시행치 못하였으므로 대강의 윤곽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민중의 사회전기란 무엇인가?

역사적 경험은 한 사회나 전체 인류사회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경험을 말한다. 그렇다면 민중의 사회전기는 전체적 역사경험의 일부이다. 그러나 전체적 역사경험은 보편적 범주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구체적 역사의 범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역사경험이란 실제로는 이야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역사적 경험이나 그 이야기는 반드시 主役과 配役(Protagonist-Antagonist)으로 구분되어서 양분적으로 또는 모순적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여기서 민중의 사회전기 또는 민중의 사회사가 부분적일지라도 이것을 기초로 하여 지배자의 역사를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민중의 사회사나 사회전기가 보편적 포갈적이 아니라는 염려는 필요없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역사적 차원에서 민중은 정치적인 개념이다. 지배자에 대하여 피지배자를 가리켜 민중이라 칭한다. 지배체제의 성격에 따라서 민중의 사회전기의 내용도 다르다.사회전기 또는 사회사란 민중의사회관계를 엮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민중사회사란 민중은 성격이고 사회사는 술어라 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말한다면 민중의 이야기인 것이다. 민중의 이야기는 민중의 고난과 갈망을 엮어나간다. 민중의 이야기는 슬픈 애가와 희망의 노래로 조화와 교차를 이룬다.

여기서 ‘이야기’라고 하는 말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미래를 위한 희망이나 과거의 지헤를 동원하여 현재를 엮어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미래의 운명을 위하여 전통을 현재의 인간경험과 현실에 도입하는 과정이다. 이야기 속에는 사건과 희망과 기억이 엉켜 있다. 이야기 즉 민중의 사회전기는 미래의 기약과 현재의 실망, 축하와 고난, 기쁨과 아픔, 용서와 죄책, 갱신과 실패가 인간의 조건을 변혁시키고 또 인간의 상황 속에서 이런 경험들이 변화되는 과정을 엮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제에 이어 김용복은 민중의 사회전기의 내용을, 민중역사주체론, 민중의 사회전기와 정치권력, 그리고 민중의 언어와 정치이념의 범주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런데 민중의 언어를 다루는 대목에서 구체적으로 민중의 사회전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다시 한번 밝힌다.

 

“민중의 자기언어가 있는 곳에 민중의 자기 사회전기가 있다. 민중이 경험하는 고난과 갈망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이 민중의 사회전기인 것이다. ...

민중의 언어는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홍길동전같은 의적의 전기가 민중의 이야기이다. 농민들의 탈춤이나 무명의 민중예술품들도 민중의 언어요, 농민의 노래나 타령들도 민중의 언어다. 이런 언어는 민중의 사회전기의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표현이다.”

 

이상의 내용을 음미해 볼 때, 우리는 앞에서 시도한 전통의 이해와 맥을 같이 하는 내용들을 포함 여러 측면의 내용을 다시 살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여기서 우리는 일단, 김용복의 이상과 같은 ‘민중의 사회전기’ 개념이 전통에 대한 민중신학적 이해 모형을 확고하게 윤곽지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민중신학의 진전을 위하여 이것이 지니는 문제점 또한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역기능라는 점에서 문제점이 아니라 이 민중신학 안에서 ‘민중의 사회전기’ 개념이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독특한 개념이 민중신학의 이론적 구성요소로 자리잡았을 때 그것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그 몫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이 개념은 특히 민중신학의 전통이해, 혹은 역사이해에 관한 방법론적 구성요소로서 적극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민중신학 안에서 민중의 사회전기에 관한 논의는 아직 민중신학의 역사이해 방법론 또는 전통이해 방법론으로 진전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참 좋은 이야기야!’ 하고 공감하는 수준에서는 이와 같은 진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 개념이 필요게 된 연원과 그 이론적 함의를 깊이 따짐으로써 우리는 그와 같은 진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사회전기’라는 개념은 역사학 연구방법을 지시하는 하나의 개념이다. 1929년 영국의 역사학자 네이미어(L. Namier)가 <<죠지 3세 시대의 정치구조>>를 출간하고 이어 1930년 <<미국혁명시대의 잉글랜드>>를 출간하였을 때, 학자들은 이 저작들을 영국 정치사 연구에 “혁명의시작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평가는 특별히 연구 업적 자체보다는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 방법론이 소위 ‘집단전기학’(prosopography)이었다.

prosopography 외에 collective biography, group biography, social biography, 또는 multi career-line analysis 등 다양하게 불리우는 이 집단전기학은 본래 “전기적 약전(略傳)의 수집”에 불과하였다. 단순히 개인들의 약전을 밝혀내어 이를 나열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점차 방대한 전기적 자료를 종합하고 분석하는 학문적 방법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집단전기학이었다. 예컨대 이 방법을 최초로 역사연구에 적용하였던 역사학자는 <<미국 헌법의 경제적 해석>>의 찰스 베어드(Charles Beard)였는데, 그는 미국 헌법은 “일정 수의 사람들이 이를 만들어내고, 일정 수의 사람들이 이를 반대했다”는 평가에 기초하여, 헌법에 반영된 이해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 제정과 채택을 지지한 사람들과 이를 반대한 사람들을 ‘개별화’(individualize) 하여 이들을 특정한 생계획득수단에 의존하고 있는 경제적 존재로서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며, 이들 헌법의 제정과 채택에 관계한 모든 사람들(대략 16만명)에 관한 ‘박물학적 연구’(study of the natural history), 다시 말해서 일종의 경제적 전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헌법을 만든 사람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밝히려고 하였다. 이 저서가 나올 당시에는 방법이 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다가 앞서 말한 네이미어의 저작이 나오면서 본격화되어, 지금은 집단전기학이 영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 등의 역사학계에서 분명한 하나의 방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집단전기학의 연구경향은 대개 사례연구 중심과 통계적 분석 중심의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오늘알의 집단전기학적 연구는 엘리뜨 중심의 사례연구의 방식에서 점차 대중에 대한 계량적 분석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처음 영미 학자들의 의해서 주도되어왔지만 이제는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의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연구의 대상도 더욱 넓어지고 그 방식 또한 점차 대규모화하고 정밀화하고 있다. 특별히 계량적 방법이 크게 발전한 것은 그동안에 이룩된 사회학이나 정치학 등 사회과학적 방법의 발전에 의하여 커다란 영향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컴퓨터 이용기술의 발전은 획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방법의 한계에 대한 지적들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본질적이며 심각한 비판은 이 방법을 채택한 연구자들의 역사를 이해하는 기본관점에서 연유하는 한계와 문제점들에 집중된다. 세 가지로 집약되는 이 비판은, 첫째 집단전기학은 역사를 주로 지배계층의 이야기로 봄으로써 대중의 움직임에 소홀하며, 둘째 역사에서 이념이나 원리의 구실을 경시하며, 셋째 어떤 제도가 그 속에서 작용하는 제도적 기구나 어떤 정책이 형성되어가는 역사과정에 대한 이야기(narrative)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뒤로 내려옴에 따라 대중집단에 대한 전기적 자료가 풍부해지고, 이러한 자료를 처리할 수 있는 기술도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다중집단전기학(多衆集團傳記學)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다. 아울러 1970년대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심성사(histoire des mentalites) 분야에서의 계량적 분석의 성과들은 이념이나 원리들에 관한 계량적 분석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집단전기학이 주력하는 구조분석 작업도 최근에는 좀더 신빙성 있는 이야기를 위한 하나의 준비작업으로 간주하여, 구조분석과 이야기를 병행하거나 구조분석의 결과를 이용하여 좀더 정확한 이야기를 시도하는 추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이상이 이른바 집단전기학의 연원과 최근의 동향에 관한 개략적 이해다. 민중신학이 사회전기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이에 관한 방법론적 의의를 얼마만큼 하고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는 여전히 미흡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방법론적 측면에서 이를 발전시켜 실제로 교회사나, 민족사를 연구하여 해석하는 데 기여하는 과제는 민중신학 안에서 앞으로 더욱 진전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한편, 이제까지 민중사회전기의 틀에 입각한 작업의 성과가 이전의 집단전기학이 지니는 한계를 보완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놀라게 된다. 김용복이 <<한국민중의 사회전기 - 민족의 현실과 기독교운동>>에 발표한 일련의 글들과 서남동이 작고하기 직전에 발표한 <세계의 생명과 그리스도>라는 글들이 이와 같은 측면에서 조명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글들인데, (계속해서 강조하는 바이지만, 방법론적으로 철저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신학에서의 민중사회전기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글들이 이제까지의 집단전기학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민중집단을 설명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신학적 서술의 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중요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민중신학에서의 이와 같은 독특성과 집단전기학의 방법론적 엄밀성이 결합할 때, 진정한 민중의 실체 곧 그들의 삶의 조건이 무엇이며 그 속에서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어떻게 생명력을 지니고 지속되고 있는가 하는 점은 보다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주요교재 및 참고자료>

에드워드 쉴즈, <<전통 -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서울: 민음사, 1992,

서남동, <두 이야기의 합류>, <<민중신학의 탐구>> 서울: 한길사, 1983

-----, <한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 <<민중신학의 탐구>> 서울: 한길사, 1983

현영학, <한국탈춤의 신학적 해석>, <<민중과 한국신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2

김용복, <민중의 사회전기와 신학>, <<민중과 한국신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2

안병무,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980년대 한국민중신학의 전개>>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이정희, <성서의 해방문화와 민중문화의 합체>, <<신학사상>> 60(1988. 봄)

박성준, <민중신학에서 ‘한국적’의 의미>, <<민중신학의 형성과 전개>> 서울: 시대와 민중사, 1997(근간)

 

 

첨부파일 전통과 민중신학.hwp

 

출처 : 반석의 신앙 따라잡기
글쓴이 : peterb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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