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불편한 진실] 제주 4.3사건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
| |||||||||||||||||||||||||||||||||||||||||||||||||||||||
"4·3의 혹독한 어둠 속에서 제주 기독교는 한치 앞을 예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시대 제주 기독교는 참으로 지혜로웠다. 기독교는 우익의 입장이었지만 우익 단체에 가담하고 직접 좌익과 투쟁하는 선봉에 서지 않았다. 이도종과 조남수 그리고 강문호는 간접적으로 심정적으로 그들을 지원하고 협력하면서도 교회가 휘말리지 않도록 교육했다." -<제주 기독교회사> 중
박용규 교수(총신대 역사신학)는 "4·3항쟁에 교회가 휘말리지 않도록 교육한 것이 지혜"라고 했다. "기독교를 우익으로 분류했음에도 좌익 세력이 노골적으로 공격할 수 없었던 것은 기독교가 우익 단체에 합류하는 것을 자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회가 흉흉한 사건에서 적당히 떨어져 피해가 적었던 것이 지혜라는 말인가. 기독교가 우익 단체에 합류하기를 자제했다는 것은 사실일까.
해방 후 개신교 반공주의는 '교리' 수준으로 올라가 '교회법'으로 보호받기에 이르렀다고 강준만 교수는 그의 저서에 기록했다. 해방 후 개신교 신자들의 종종 폭력까지 동반하며 반공 태도를 취했다. 강인철 씨는 "개신교 신자들의 반공주의는 종교 이데올로기의 뒷받침을 받았다는 면에서 '성스러운 반공주의'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의 '관념론적 유물론'과 '전투적 무신론'의 측면을 일방적으로 부각해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적대적 측면을 극대화할 때, 반공 투쟁은 곧 '기독교 수호 투쟁'이 된다.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대립은 '악마와 천사 간 전쟁'으로 발전한다. 동시에 반공 투쟁에 나선 기독교 신자들은 성전(聖戰)에 참여한 군대, 곧 '십자군'이 되며, 이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순교자'가 된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제주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서북청년단(서청)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해 제주도민에게 '악몽의 그림자'라는 악명을 얻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은 "서북청년단의 발족을 영락교회 청년회가 4·3제주항쟁 평정 등 '반공건국, 멸공건국, 승공건국'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고 말한다. 또 "개신교 청년들이 조선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등 반공주의적 청년단체에도 다수 참여했다"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서북청년단은 태극기와 이승만의 사진을 들고 다니면서 강매하고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 아래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자행하고 죽으면 빨갱이로 모는 행위 등을 일삼았다. 미군정이 1948년 1월, 남한 각 도의 공산주의자 활동에 대한 평가를 내리면서 "제주도에서 소위 좌익으로 불리는 자들 대부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고 분석하고 좌익보다는 우익의 테러 사태가 더 문제라는 것을 시사하는 문서를 남길 정도였다.
제주기독교100주년기념위원회는 '제주기독교 100년의 회고와 전망, 과제'라는 글에서 4·3사건에 대해 "교회의 피해가 극심했다"고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특히 "이도종 목사가 북제주 일대 교회를 순회하며 목회하다 무장공비에게 납치되어 순교했다"고 했다. 박용규 목사는 "혹독한 시련과 혼란 속에 제주 교회는 오히려 최고의 성장과 부흥을 이룩했다"고 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의지할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제주도민 학살을 자행한 서북청년단 중 개신교인이 많았다는 설명은 하지 않았다. 서북청년단 중에는 친일파로 변절한 개신교인 지주가 많았다.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쫓겨 내려온 청년들로 구성된 서청은 반공 사상이 투철했다. 이어 6·25 때 기독교는 부흥한다. 피난민들이 제주도에 모여 들었기 때문이다. 이때도 반공 사상을 지닌 보수 기독교인이 대거 제주에 유입했다. <제주기독교회사>는 제주 선교를 개척한 목회자들 대부분이 이북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이라 반공 사상이 투철했다고 기록한다. 4·3사건을 목도하고 희생자를 배출한 제주교인들은 목회자들이 설교 시간에 공공연하게 반공을 강조하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제주특별자치도기독교교단협의회는 제주 기독교 100주년이라 부르는 2008년 자료집을 내면서 4·3 사건을 공산당으로 인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박용규 교수는 "4·3사건이 항쟁으로 평가되는 것은 진실을 왜곡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8년 9월 발간한 <제주기독교회사>에서 한 말이다. 2003년 10월 31일 대한민국 정부 이름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에게 사과한 후에 펴냈다.
반면 임문철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제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4·3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과거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 사태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려는 교과서포럼은 '대안교과서'의 4·3 내용을 당장 폐기하고 4·3 영령과 유가족 앞에 사죄하라"고 촉구했다.
천주교가 20년 동안 거의 세 배에 가까운 성장을 하고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는 이와 다르지 않다. <제주기독교회사>는 "19세기 끊이지 않았던 민란, 이재수의 난, 4·3 사건 등에 대해 제주 기독교는 주민을 위로하거나 그들의 아픔을 풀어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제주의 불교와 천주교는 이 일에 헌신적으로 앞장섰다"고 했다. <제주선교 100년,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서 서성환 목사(사랑하는 교회)가 지적한 부분도 다르지 않다.
"가톨릭교회는 해마다 4·3 추모 미사를 드리고 여러 행사를 열었다. 불교 또한 천도제를 올리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기독교는 연합추모집회나 기도회, 4·3입법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혹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교회 안에 있어 그렇다고 하지만, 교회의 화해의 복음을 생각하면 궁한 변명이다." -<제주선교 100년, 어제와 오늘과 내일> 중
안타깝게도 기독교와 천주교가 보인 다른 태도는 2009년 현재에도 변하지 않았다.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선다는 소식에 천주교 제주교구 사제단 임문철 신부는 "해군기지 건설은 평화의 역행"이라며 단식농성을 했다. 그러나 제주기독교교회협의회 '제주도의평화와행복을지키려는목자회모임'(목자회)은 "이미 결정된 해군기지 문제에 대해 논의를 중단하고 도정에 협력하라"며 "상생과 화합"을 외친다.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실천 없이 제주 선교를 외치는 기독교는 이재수의 난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정훈 목사(늘푸른교회)는 "이재수의 난은 제주도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은 일방적인 전도 활동으로 독선과 모순을 빚은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독청년아카데미 제주역사기행 참가자들,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다
▲ 4·3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묵도했다. ⓒ뉴스앤조이 김세진
"똑같은 장소, 비슷한 계절에 왔는데 다른 곳에 온 것 같아요" 기독청년아카데미 정인곤 간사는 세 번째 제주도를 방문한다고 했다. 처음엔 모 대형교회에서 하는 '제주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 발을 디뎠다. 당시 생각했던 제주도는 "심청이가 바다에 빠져 죽은 곳"이었다. 성난 바다를 가라앉히기 위해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던 곳이라 인권이나 목숨을 쉽게 생각하는 곳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미신이 팽배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제주도는 복음이 들어가야만 하는 지역, 미신과 우상이 만연한 지역, 비합리적인 요소를 깨뜨려야 하는 지역이었다. 청년부는 "제주에 복음의 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죽어가는 나의 백성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찬양을 목이 쉬도록 불렀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제주도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친구들과 하이킹을 하면서 들른 제주도는 흔히 잘 아는 관광의 도시 제주도였다. 푸른 물과 날씨에 매료되었다.
이번에는 기독청년아카데미 청년들과 함께 4·3 역사 현장을 방문했다. 3월 26일부터 29일까지 머무는 동안 강정마을에 가서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분들도 만났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제주는 새로운 곳 같다. 많은 고통을 당한 땅이고 그 고통이 현재 진행형이라니 충격이었다. 정치·사회·역사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반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4·3항쟁을 진압하러 들어온 서북청년단과 6·25전쟁을 계기로 기독교가 제주도에 성행했는데, 마치 제국주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선을 타고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가 제국주의 지배를 확장하려는 모습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일방적으로 '제주 선교'라는 이름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섬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다. 물론 섭리사적으로 기독교가 전래되어 섬의 폐쇄성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기는 했다. 하지만 섬사람들과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다. 기독교인이 공부하고 역사를 알아야 폭력 없이 접근할 수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믿기 힘든 고통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니요"
초등학교 교사 최유경 씨는 여행을 가기 전 제주 역사에 관한 글을 읽고 괴로웠다고 했다. <복음과 상황> 4월호에 실린 '미디어와 관광' 글을 읽으면서 "미디어의 영향으로 휴양 이미지가 강한 관광지를 방문한 사람은 그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여행을 준비하고 마치게 된다"는 말에 공감했다. 제주도에 관한 미디어를 보면서 아름다운 곳으로만 생각했는데 아픈 진실과 마주하니 불편했다. 그저 아름다운 줄 알았던 제주 역사 중심에는 4·3이 있었다.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려는 폭력을 직시했다. 이제야 안 것이 부끄럽고 미안하다.
"감당하기 힘든 역사네요"
대학생 신병철 씨는 4·3에 대해 공부하면서 감당하기 힘든 역사를 공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우로 분열된 것이 얼마만큼의 아픔을 가져다주는지 이전엔 미처 몰랐다. 그런데 국가 안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들어서려는 해군기지가 오히려 마을을 파괴하려는 모습은 4·3과 다를 바 없었다. 새만금과 대추리가 생각났다.
대학생 장철순 씨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대책위 위원장과 마을회장을 보고 감동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분들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철저히 공부하고 운동을 해 왔는지가 와 닿았다. "그들은 동북아 평화를 실천하고 계세요. 학자들처럼 이론적인 게 아니라 아는 것을 끌어다가 마을에서 평화를 이루고 있어요."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을 지지합니다."
|
제주 4.3 60주년 평화UCC 공모작 가작 (출품자 : 김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