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를 꿈꾸며
[스크랩] 알기 쉬운 마르크스주의
뽀종이
2006. 9. 24. 23:39
알기 쉬운 마르크스주의
(지은이 Chris Harman)
1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왜 필요한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론이 필요한가? 우리는 사회 불안정과 경제 공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고용주들한테 착취당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분노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사회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밖의 것은 먹물들한테나 맡겨 두라." 우리는 사회주의자 투사들이나 심지어 노조 운동가들 중에서도 이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흔히 본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추상적"이라고 말한다. 또,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이론적으로 그럴 듯하지만 실제 생활 상식에서는 그와 전혀 다르다고도 말한다.
이런 말은 사실 사회 변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강력히 선전하는 견해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그들의 의도는 마르크스주의란 모호하고 복잡하며 지루한 교조(敎條: 'ism')일 뿐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문제점은, 이런 주장의 대변자들이, 자기들은 깨닫지 못할지 모르지만, 보통은 자기들 나름의 "이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한테 사회적 문제에 관한 질문을 하나 던져 보면 이런저런 식의 일반화를 해가며 대답할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야." "열심히 노력만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지." "기업인이 없으면 우리에게 일자리 줄 사람도 없어." "도덕적 타락으로 그 나라가 그 꼴이 되었지." 도대체 이런 주장이 얼마나 많은지 어디서건 들을 수 있을 지경이다. 공장에서건 사무실에서건, 술집, 다방, 식당, 그 어디서건 말이다. 어느 누구나 자기 나름의 사회관과 역사관을 갖고 있다. 위의 견해들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사회 "이론"들이다. 누군가가 자기는 이론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정리해 둔 적이 없다는 뜻이다.
사회를 변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한테 이런 태도(이론 경시 풍조--옮긴이)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젼 등 소위 대중 매체들이 한결같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회와 정치 문제에 대한 의도적인 해석을 우리 머리에 주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 매체들은 우리가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떠드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들 다양한 주장에서 거짓된 바를 인식해 내지 못한다면 사회 번혁을 위해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없다.
이것은 150년 전 처음으로 입증되었다. 1830년대와 40년대 영국 북서부 지방은 공업이 발달하여 수십만의 남녀 성인 노동자와 미성년 노동자들이 비참한 수준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열악한 생활 조건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열악한 생활 조건을 타파하기 위해 그들은 최초의 노동자 대중 조직을 결성하여 싸웠다. 그것은 최초의 노동조합이었고, 영국 최초로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었으므로 인민헌장 운동(차티즘: Chartism)이라 불렀다. 물론, 인민헌장 운동은 소집단으로 이루어진 다른 초기 사회주의 운동과도 병행되었다.
노동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에 관한 문제가 즉각 부과되었다. 어떤 이들은 사회 지도자들을 평화적으로 설득하여 사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들 말했다. 즉, 대중의 '도덕적 힘', 다시 말해서 평화적 운동으로도 노동자들한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이런 견해에 근거하여 조직하고 시위하고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결과는 패배와 사기저하였다. 어떤 이들은 '물리적 힘'을 사용할 필요는 인정했는데도, 이 힘이 사회로부터 유리된 매우 작은 음모 집단에 의해 행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 동의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의 투쟁도 패배와 사기저하로 끝나고 말았다. 또, 어떤 이들은 노동자들이 군대 및 경찰과 대적하지 않고 경제투쟁을 통해 자기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중의 행동이 뒤따랐다. 1842년 세계 최초의 총파업이 영국 북부의 공업 지대에서 일어나 4주일이나 계속되었지만, 배고픔과 궁핍으로 인해 작업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패배를 거듭하던 노동운동의 제1단계의 끝무렵인 1848년에 독일인 사회주의자인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이란 소책자에서 자기 사상을 남김없이 명확하게 밝혔다. 그의 사상은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당시 노동운동에서 제기된 현실 문제들을 취급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발전시킨 사상은 오늘날과도 관련성을 갖고 있다. 그가 140년 전에 썻다고 썼다고 해서 그의 사상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주장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있다. 사실, 마르크스가 맞서서 논쟁을 벌였던 온갖 사회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인민헌장 운동가들이 '도덕적 힘'이냐 '물리적 힘'이냐 하는 것을 논했듯이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도 '의회 사회주의'냐 '혁명적 사회주의'냐 하는 것을 논하고 있다. 혁명가들 중에서 테러리즘에 찬성하는 주장과 반대하는 주장이 1848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공존하고 있다.
관념론
마르크스가 사회 문제들을 해석하려고 저술 활동을 하고 있을 당시, 공장에서는 기술 혁신으로 그 이전 세대가 꿈도 꿔보지 못한 규모의 부(富)가 축적되고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인류가 전(前)시대 고통의 원인이었던 자연적 재앙에 대항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기술 혁신과 그에 따른 엄청난 부의 축적이 대다수 대중의 생활 향상을 가져오진 못했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남녀 성인 노동자들과 미성년 노동자들의 생활은 토지를 경작하던 그들의 조상들보다 훨씬 열악한 것이었다. 그들의 임금은 그들을 굶겨 죽이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대량 실업의 주기적 발생으로 아예 최저 생계비를 훨씬 밑돌 정도였다. 결국, 그들은 비참하고 열악한 빈민가로 내몰려 적절한 의료도 받지 못한 채 무시무시한 전염병에 시달리곤 했다. 자본주의 공업화는 전반적인 행복과 복지를 가져오는 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더욱 혹심한 빈곤과 불행을 안겨 주었다.
이를 주목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만이 아니었다. 당시의 다른 위대한 사상가들 중에서 영국 시인 블레이크(Blake)와 셸리(Shelly), 프랑스 사회주의자 푸리에(Fourier)와 쁘루동(Proudhon), 독일 철학자 헤겔(Hegel)과 포이에르바흐(Feuerbach) 같은 이들도 자본주의 착취 현상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
헤겔과 포이에르바흐는 인간이 처한 이 불행한 상태를 '소외'(alienation:Ent fremdung)라고 불렀다. 요즘도 흔히 듣는 이 말이 뜻하는 바는, 헤겔과 포이에르바흐에 따르면, 인간이 자기가 과거에 했던 행동에 지배되고 억압받는 상태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神)이란 관념을 만들고 신 앞에 엎드려 절하고 나서는, 자기가 만든 것(즉 신)에 따라 살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낀다고 포이에르바흐는 지적했다. 그리고, 사회가 진보하면 진보할수록 오히려 인간은 더욱 비참해지고 '소외'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초기 저작에서 이 '소외'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사회의 부를 창조한 사람들, 즉 직접 생산자들의 삶에 적용하였다. "노동자는 부를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그의 생산 능력과 생산 범위가 증대하면 증대할수록, 더 가난해진다...... 물건의 가치가 증가함에 비례해서 인간의 가치는 하락한다...... 노동의 산물은, 소외된 그 무엇으로서, 즉 생산자로부터 독립된 어떤 힘으로서 노동과 대립하게 된다."
마르크스 시대에 사회 문제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설명은 여전히 종교적인 종류의 것이었다. 사회의 불행은 신이 자기들에게 명령하는 바를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죄'를 버릴 수가 있다면야 모든 게 잘 될 텐데......" 이와 비슷한 견해는 오늘날에도 들을 수 있다. 보통은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 않다는 점이 마르크스 시대의 설명과의 차이라면 차이랄까. 현대의 통속적인 견해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전에 개인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이 자기의 '이기심'이나 '물질주의'(혹은 '집착')를 버릴 수만 있다면야 사회는 자동적으로 나아질 텐데......"
이와 관련있는 어떤 견해는 '모든' 개인이 아니라 권력을 쥔 '소수'의 핵심적 인물들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발상은, 부와 권력을 쥔 자들이 "이치를 깨달아 반성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이라는 한 영국인 사회주의자는 자기가 고용한 노동자들을 좀더 친절하게 대하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어용 노조 지도자들도 이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사용자들의 범죄를 "실수"라고 부르는지 주시해 보라. 마치 약간의 분규만으로도 대기업을 설득하여 그들의 사회적 지배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음을 이내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모든 견해들을 '관념론'(idealism)이라고 못박았다. 사람들이 '관념'(ideas)을 갖는 것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이런 종류의 견해들이 관념을 인간의 생활 조건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관념론'이라고 낙인찍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관념은 그들이 살고 있는 생활의 종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기심"(혹은 "탐욕")을 예로 들어 보자.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이기심을 조장하고 있다.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조차 이기심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슬며시 고개를 쳐드는 것을 억누르기 어렵다. 아이들을 위해 최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하는 젊은 아버지 노동자나 쥐꼬리 만한 월급을 부모에게 송금하고자 하는 효녀 노동자는, 처자 부양과 부모 봉양을 위한 유일한 길이 끊임없이 다른 노동자들과 경쟁해서 더 나은 직장을 얻고 좋은 조건의 잔업을 얻으며 인사고과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런 사회의 노동자들은, 개개인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이기심'이나 '탐욕'을 버릴 수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권력과 부의 정상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건 훨씬 더 웃기는 얘기다. 만약 어떤 대기업 회장이 노동자들에게 설득당해 사회주의 관념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다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할 것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이들한테조차 관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의 관념을 형성시킨 모태인 사회 구조가 중요한 것이다.
요점을 달리 설명해 보자. 관념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관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사회에 살고 있다. 제도 언론과 제도 교육이 오도(誤導)하고 호도(糊導)하고 있는 관념이 옹호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도대체 어떻게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이념기구가 강요하는 관념과 완전히 다른 관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자들의 일상 경험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관념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요즈음 왜 "의식화"한 노동자들이 70년대보다 늘어났는가 하는 것을 단순히 "외부 세력의 개입"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째서 급진적 관념에 전보다 더 귀를 기울이는가 하는 것이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슷한 문제로서, "위인"들의 영향을 설명하려면 왜 대중이 그들을 따르기로 했는가 하는 것이 설명되어야 한다. 예컨대, 왜 수백만의 사람들이 나폴레옹이나 레닌이 제안한 바에 따르기로 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단순히 그들이 역사를 바꾸었다고 말해 봤자 헛일이다. 결국, 위인들을 대중 최면술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사회 생활의 무언가가 사람들로 하여금 나폴레옹이나 레닌이 제안한 바가 옳은 듯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떤 관념이 어디서 나온 것이며 왜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만 관념이 역사를 바꾼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관념의 이면에 숨어 관념을 형성시킨 사회의 물질적 조건들을 검토할 때만 관념의 혁명적 역할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2 역사에 대한 이해
관념 그 자체가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마르크스가 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마르크스는, 그 이전의 사상가들처럼, 역사를 이해하려면 인간을 물질 세계의 일부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행동은 다른 자연물(自然物)의 행동처럼 물질적 힘들에 따라 결정되어 왔다. 그러므로, 인간학은 자연계(自然界)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일부였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상가들을 유물론자(materialist)라고 불렀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이 여러 가지 종교적·관념론적 역사관에 비해 한층 진일보한 것이라고 보았다. 즉, 사회 조건을 바꾸는 것에 관해 과학적으로 논하려면 더 이상 신에게 기도한다거나 사람들의 "정신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관념론을 버리고 유물론을 택하는 것은 '신비한 것'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과학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행동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 모두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생물학이나 화학이나 물리학에도 그릇된 "이론"이 있듯이, 사회과학에도 잘못된 이론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첫째 예는 매우 광범위하게 유포된 기계적인 유물론의 시각으로서, 인간이 몇 가지 측면에서 "본성적"(natural)으로 행동하는 동물이라는 견해이다. 늑대가 '본성적'으로 다른 동물을 죽이고 양이 '본성적'으로 온순하듯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격적이고 지배욕이 강하며 경쟁적이고 탐욕스럽다는 것이다.(여기에는 여성이 '본성적'으로 부드럽고 남자에게 순종적이며, 부모와 남편을 공경하고 매사에 수동적이라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이런 견해를 근래에 정식화한 것이 바로 '인간·동물 동일 본성론'(the naked ape view)이다. 이 지극히 반동적인(reactionary) 주장이 내린 결론은 바로 인간이 '본성적'으로 공격적이라면 사회를 개선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으례 똑같을 테니 혁명을 통하여 새 사회를 건설하여도 그 사회는 항상 실패작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인간 본성"(human nature)은 사회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경쟁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전의 많은 사회에선 존재한 적이 거의 없었다. 처음으로 '수'(Sioux)족 인디안들한테 지능검사를 실시하려 했던 과학자들은 '수'족 인디안들이 왜 서로서로 협력해서 답을 구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인디안들이 사는 사회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을 강조했던 것이다. "공격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유럽인과 처음 대면한 에스키모인들은 도대체 "전쟁"이란 말(그들에게는 '말'이 아니라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이 뭘 뜻하는지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쓸어버린다'는 생각은 그들한테는 정신 나간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즉 인간 본성에 어울리는) 걸로 여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인 스파르타에서는 젖먹이를 산속에다 버려 놓고 추위를 이기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 '당연한'(즉 인간 본성에 어울리는) 걸로 여겼다.
또한, '불변의 인간 본성'론은 역사 속의 대사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고대 그리스나 로마제국 또는 잉카제국의 찬란한 영광, 근대 공업 도시 등에 살았던 인간들이, 중세의 진흙 오두막집에 살았던 무지한 농민과 같은 수준---동렬---에 놓이게 된다. 거기서 중요한 건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이지, 그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이 세운 장대한 문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사회가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들을 먹이는 데 성공한 반면, 어떤 형태의 사회는 수백만의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들을 굶겨 죽인다는 사실은, '불변의 인간 본성'론자들한테는 의미 없는 얘기일 뿐이다.
두 번째 예도 역시 많은 이들이 신봉하고 있는 통속적인 것으로서, 이 또한 기계론적 유물론의 시각에서 나온 것인데, 인간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은, 동물이 써커스에서는 정글에서와 다른 행동을 하도록 길들여질 수 있듯이, 인간의 행동도 이와 유사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인즉, 제대로 된 사람들이 사회를 통제하기만 한다면 '인간 본성'도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확실히 '불변의 인간 본성'론보다 진일보한 견해이지만, 사회 전반이 바뀔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역시 실패작이다.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현재의 사회 조건 때문에 제약을 받는다면, 사회 조건을 딛고 넘어서서 제어장치(制御裝置)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아는 이가 도대체 누가 있을까? 다른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는 여러 압력을 마술적으로 물리칠 수 있는, 신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우리 모두가 써커스에 나오는 동물이라면 누가 사자 조련사란 말인가?
이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결국에는 '인간 본성 불변'론자들처럼, 사회란 변화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게 되거나, 혹은 변화는 신이나 위인 또는 개개 관념의 힘과 같은 사회 밖에 있는 어떤 것이 만들어 낸다고 믿게 된다. 이쯤되면, 이들의 "유물론"은 신판(新版) 관념론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이런 "이론"은 결국에는 반드시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 중 한 부분이 사회를 초월하고 있는 걸로 생각하게 된다. 이런 류의 견해는 그러므로 흔히 반동적이다.
오늘날 이 견해의 지지자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스키너(Skinner)라는 미국의 보수 심리학자이다. 그는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끔 그들을 '제약하길' 원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므로 그가 주장하는 "제약한다"는 말은 사람들을 그 사회에 순응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을 뜻할 뿐이다.
세 번째 사이비 유물론적 견해는 세계의 모든 불행을 인구 증가 탓으로 돌린다. 이 견해는 주창자인 18세기 말의 영국 경제학자 맬서스(Malthus)의 이름을 따라서 맬서스 학파(Malthusian)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인구 증가'론은, 예컨대 미국에서 150년 전에는 1천만 명을 먹이기에 충분한 식량밖에 생산되지 못했는 데 반해, 지금은 2억 명을 먹이고도 남을 식량이 생산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 견해는 식구 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노동할 수 있고 부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 하나가 더 늘어난다는 것을 잊고 있다.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서술한 그릇된 설명들을 '기계적' 혹은 '천박한' 유물론의 여러 형태라고 불렀다. 이들 기계적 유물론은 인간이 물질 세계의 일부일 뿐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행동을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망각하고 있다.
역사 유물론
"우리는 인간을 의식, 종교 또는 그 밖의 무엇을 통해서든 동물과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 자신은 생활 수단, 즉 의식주의 수단을 생산(강조는 옮긴이의 것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동물과 구별되기 시작한다."---칼 마르크스는 이렇게 강조함으로써 사회 발전 과정을 독특하게 설명하였다.
인간은 유인원의 후손인 동물이므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관심거리는 배를 채우고 외부의 기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다른 동물이 이러한 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타고난 생물학적 육체 조건에 달려 있다. 늑대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본능에 따라 결정된 방법대로 먹이를 사냥해 잡아 먹음으로써 살아 간다. 또, 추운 밤에도 털 덕분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고 새끼들은 타고난 행동 양식대로 기른다. 그러나, 인간의 생활은 이런 식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실, 10만 년 내지 3만 년 전에 지구상에 존재하던 인류는 현재의 우리와는 전혀 다르게 생활했다. 그들은 동굴이나 땅에 구멍을 파고 살았다. 음식이나 물을 담을 그릇도 없었고, 식량은 낱알을 줍거나 돌로 맹수를 때려 잡아 해결했다. 글씨를 쓸 줄도 몰랐고 손가락 셈 이상의 계산을 할 줄도 몰랐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이웃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자기네 조상이 무슨 일을 했는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실제로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10만 년 전 인류의 신체 조건은 현대 인류의 신체 조건과 유사하고, 3만 년 전 인류의 신체 조건은 현대인과 똑같았다. 만일 혈거인을 목욕시키고 면도까지 시켜 양복을 입혀 번화가를 걷게 한다 해도, 어느 누구도 그를 이상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C. Gordon Child)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인류의 두개골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의 것이다...... 인간의 두개골이 지질학적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약 2만 5천 년 전에 인간의 문화적 진보가 막 시작되고 있었지만, 그 이래로 인간 육체의 진화는 사실상 멈추어 버렸다."
또 다른 고고학자 리키(Leaky)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2만 5천년 전의 오리그네시아(Aurignacian) 문명과 막달레니아(Magdalenian) 문명에 살던 인류와 현대 인류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엄청나지만, 신체적 차이는 무시해도 좋다." 여기서 고고학자들이 말하는 '문화'란, 동물이 본능적으로 아는 것과는 달리 인간이 서로서로 가르쳐 주고 배우는 것(예컨대, 모피나 양털로 옷을 만드는 법, 점토로 토기를 만드는 법, 불을 만들고 집을 짓는 법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미 처음부터---육체상의 진화가 멈추기 시작하고 문화적 진보가 이제 막 시작되던 처음부터 이미---인류의 생활은 다른 동물의 생활과 크게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한테만 있는 육체적 특징, 즉 큰 뇌수와 사물을 다룰 수 있는 사지 등을 사용해 자기의 필요에 맞게 주의 환경을 변형시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육체 조건의 변화 없이도 광범위하게 다양한 자연적·사회적 조건에 적응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더 이상 단순히 자기를 둘러싼 조건에 반응만을 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환경을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맹수를 공격하기 위해 돌과 막대기를 사용했고, 열과 빛을 얻기 위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불을 가지고 횃불을 켰으며, 동물 가죽과 식물로 몸을 가렸다. 수만 년에 걸쳐서 인간은, 스스로 불을 일으키는 것과 다른 돌멩이를 이용해 석기를 만드는 것과 결국은 자신이 심은 씨앗에서 식량이 자라게 하여 토기에 그것을 저장하는 것과 동물을 길들이는 것을 배웠다. 비교적 최근에---100만 년의 인류 역사에 비하면 불과 5천 년 전에---인간은 광석을 유용한 도구와 효율적인 무기의 재료인 금속으로 변형시키는 비법을 알아냈다. 이 모든 진보로 인간은 더욱 쉽게 먹고 입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 생활 그 자체의 조직에도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인간의 생활은 사회적이었다. 여러 사람의 공동 노력을 통해서만 맹수를 죽일 수 있었고, 식량을 모을 수 있었으며, 불을 계속 지필 수 있었다. 즉, 인간은 협동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이고 밀접한 협동을 통해서 인간은 또한 소리를 내서 언어를 발달시킴으로써 서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사회 집단은 단순했다. 건장한 수십 명의 인간 집단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을 만큼의, 자연적으로 자라는 농산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식량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종류의 생활을 해야 했다. 또, 식량을 저장하는 수단이 없었으므로 사유 재산이나 계급 분화가 있을 수 없었고 전쟁 동기를 유발시킬 어떤 노획물 같은 것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이러한 양상을 띤 사회가 지구상 곳곳에 수백 군데나 남아 있었다. 남·북미 대륙의 어떤 인디언 부족들이나, 아프리카의 적도 부근과 태평양 연안의 민족들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등이 그런 사회이다. 이 사람들이 우리들보다 영리하지 못하거나 더 "원시적 심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예컨대, 호주의 원주민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문자 그대로 수천종의 식물과 수십 가지의 상이한 동물들의 습성을 곧 알아낼 줄 알아야 했다. 인류학자 퍼스(Firth)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호주의 종족들은...... 사냥터에 있는 잡아 먹을 수 있는 동물, 물고기, 새 등의 습성과 특징, 서식처, 그리고 계절에 따른 이동까지 알고 있다. 그들은 바위, 돌맹이, 밀랍, 고무, 식물, 풀뿌리, 나무 껍질 등의 외적 속성뿐 아니라 그보다 덜 분명한 속성까지 알고 있다. 그들은 불을 일으키는 법과, 고통을 덜고 출혈을 막는 법 및 신선한 음식의 부패를 지연시키기 위해 열을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열을 이용해 어떤 나무는 딱딱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부드럽게 만들 줄도 안다...... 그들은 적어도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조수(潮水)의 운동과 혹성의 주기 및 계절의 순서와 지속 기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들은 풍향·풍속 체계와 연간 습도 및 기온 유형과 같은 기후의 변동이 자연계 생물체의 성장과 생활상의 끊임없는 변화와 서로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있다...... 게다가, 잡아 먹기 위해 죽인 동물에서 나온 부산물을 현명하고도 경제적으로 이용할 줄 안다. 예컨대, 캥거루 고기는 먹고 다리뼈는 석기를 만드는 데 도구로 사용하거나 쐐기로 이용하고, 근육은 창을 묶는 데에, 발톱은 밀랍과 섬유를 갖고 목걸이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기름은 붉은 황토와 섞어 화장품을 만들고 피는 목탄과 혼합해 페인트로 쓴다...... 그들은 간단한 역학적(力學的) 원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 부머랭(일종의 무기로서 던지면 곡선을 그리며 다시 돌아옴--옮긴이)이 정확히 곡선을 그리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듬고 또 다듬는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사막에서 생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영리'했던 것이다. 그들이 터득하지 못했던 것은 씨를 뿌려 자기들의 식량을 키우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우리 인류의 조상도, 지구상에 존재해 온 기간의 백분의 일에 해당하는 불과 5천 년 전에야 비로소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부(富), 즉 인간의 생활 수단을 생산하는 신기술의 발전은 항상 인간들 사이의 새로운 사회적 분업 형태, 즉 새로운 사회 관계를 생가나게 했다. 예컨대, 인간이 처음으로 씨를 뿌리고 동물을 길들임으로써 식량을 기르고 토기에 그 식량을 저장하는 일을 알게 되었을 때, 고고학자들이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회 생활의 전면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인간은 동물을 사냥하는 데뿐 아니라 이제는 땅을 개간하고 추수를 하는 데도 협력해야 했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생활할 수 있었고, 식량을 저장할 수 있었으며, 다른 공동체의 사람들과 재화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또, 최초의 도시들이 발달할 수 있었다. 그저 식량을 마련하는 데에만 종사하지 않고도 생활을 영위해 가는 사람들이 최초로 생겨날 수 있었다. 항아리를 만드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도구와 무기를 만들기 위한 부싯돌 채광과 금속 채광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전체 공동체 성원응ㄹ 위해 초보적인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등이 생겨났던 것이다. 더욱 불길한 것은 저장된 잉여 식량이 전쟁 동기를 유발·제공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주위의 세계를 다루거나 자연을 필요에 맞게 이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와 자신들의 생활을 변형시킨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과정을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 노동력과 생산수단 및 양자간의 기술적 관계--옮긴이)의 발전이 생산관계(relations of production: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소유관계--옮긴이)를 변화시키고, 생산관계의 변화를 통해 사회까지 변화시킨 과정이라고 요약했다.
더 최근의 예들이 많이 있다. 3백 년 전에 서구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땅을 일구고 살면서, 수세기 동안 변하지 않은 기술을 가지고 식량을 생산했다. 그들의 사고(생각)의 범위는 그 지역 촌락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들의 관념은 그 지역 교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대다수는 읽거나 쓸 필요가 없었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2백 년 전쯤에야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수만 명이 공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생활은 철저한 탈바꿈을 했다. 이제 그들은 조그만 촌락이 아니라 대도시에 살게 되었고, 결국 읽거나 글씨 쓸 줄 아는 것을 포함해 그들의 선조들은 꿈꾸지도 못했던 기술들을 배울 필요가 있게 되었다. 또, 철도와 증기선의 발명으로 지구의 반을 횡단해서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성직자들이 머리에 주입한 고리타분한 관념들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생산에서 물질적 혁명은 또한 생활 양식과 관념에서도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변화가 지금도 막대한 수의 사람들한테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 방글라데시나 터키 촌락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영국이나 독일의 공장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지녀 온 오랜 관습과 종교적 태도들의 더 이상 적합하지 못하다고 깨닫는 것을 보라. 아니면, 지난 50년간 다수의 여성들이 가정 밖의 직장일에 익숙해지면서, 여성이 실질적으로 남편의 소유물이라는 이전의 태도에 어떻게 도전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라.
사람들이 의식주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방식의 변화는 사회가 조직되는 방식과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변화를 초래한다. 이것이 마르크스 이전의(그리고 그 이후의 많은) 사상가들, 즉 관념론자들과 기계적 유물론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사회 변동, 즉 역사의 비밀이다.
관념론자들은 변화가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변화는 관념이 바뀌면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기계적 유물론자들은 인간이 물질 세계의 규정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객관적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변화하는가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기 주위 세계의 제약을 받지만, 역으로 그들은 세계에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작용하여 세계를 더욱 살기에 적당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상황을 변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자기들 자신까지 변화시킨다.
사회 변동을 이해하는 열쇠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의식주를 만들어 내는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곧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술과학(technology)의 발전이 자동적으로 더 나은 사회를 낳는다거나 새로운 발명이 자동적으로 사회변동을 일으킨다고 믿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견해(때로 기술과학 결정론 technology determinism이라 부른다)를 배격했다.
역사를 보면, 의식주의 생산을 촉진하는 관념들이 기존의 사회 형태나 사람들의 태도와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듭해서 이러한 관념들을 배척한 적이 있다. 예컨대, 로마제국에서는 일정한 크기의 땅에서 더 많은 수확을 얻는 방법에 대해 여러 견해들이 있었으나, 그러한 방안들을 채택하게 되면 채찍의 공포에 시달리며 노동하는 노예로부터 수확을 얻어낼 때보다 귀족이 일에 더욱 매달려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방안들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18세기에 영국이 아일랜드를 통치했을 때, 영국인들은 아일랜드의 공업 발전이 런던 기업가들의 이익과 상충되기 때문에 그것을 저지하려 했다. 만약 누군가가 성우(聖牛)를 죽여 인도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쥐고기를 가공처리해 영국인들에게 수분이 많은 부드러운 스테이크를 공급하는 방법을 내놓는다면, 그러한 방안들은 기존의 편견 때문에 묵살당할 것이다.
생산 발전은 낡은 편견(선입관념)과 낡은 사회 조직 방식(구체제)에 도전은 하지만, 자동적으로 이러한 구식 편견과 구식 사회 구성 형태를 뒤집어 엎지는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막기 위해' 싸운다. 그래서 새로운 생산 방식을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변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 만약 변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승리하면, 그때는 새로운 생산 형태가 실시될 수 없기 때문에 생산은 정체하거나 심지어는 퇴보하기조차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로 풀어 보자.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이 발전하면, 발전된 생산력은 기존의 생산관계 및 그것이 형성한 낡은 사회관계의 기초 위에서 성장한 관념들과 상충하게 된다. 이 충돌에서 새로운 생산력의 편에 서는 사람들이 승리하거나 아니면 낡은 체제 편에 서는 사람들이 승리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회가 진보하게 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사회가 틀에 박힌 채 그 상태 그대로 머물거나 심지어는 퇴보하기까지 한다.
3 계급투쟁
우리들은 계급으로 나누어진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즉, 우리 사회는 소수의 사람들이 막대한 사유 재산을 소유한 반면, 우리들 대부분은 거의 아무 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항상 그러했던 것으로 당연히 여기기 쉽다. 그러나, 사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는 계급과 사유 재산, 군대 혹은 경찰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5천 년 내지 1만 년 전까지에 이르는 50만 년 동안 인류가 발전해 온 길이었다.
계속해서 노동할 수 있기 위해 자신의 체력과 정신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식량을 사람들이 스스로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력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계급의 분화가 있을 수 없었다. 만약 노예가 생산하는 것 모두가 그 노예를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하다면 노예를 부려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생산의 진보가 일정 정도를 넘어서게 되면 계급이 분화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분화해야 했다. 식량이 충분히 생산되면 직접 생산자들이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소비를 하고도 잉여가 남았다. 그리고, 이 잉여 식량을 저장하고 그것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운반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 존재했다.
이 모든 식량(총생산물)을 노동해서 생산하는 사람들은 초과분의 잉여 식량을 그저 먹어 치워 버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매우 부실하고 가난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충동이 강했다. 그러나 잉여 식량을 다 먹어 버린 결과, 다음 해의 홍수나 기근 같은 자연의 파괴력과 외부의 굶주린 종족의 공격에 대해 그들은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이 책임지고 장래 재앙에 대비해 이러한 여분의 부를 저장하거나, 수공업자들(식량 이외의 생활용품을 생산하는)을 부양하거나, 방어 수단을 구축하는 데 사용하거나, 그 일부를 먼 곳의 부족들이 생산한 유용한 물건으로 교환한다든가 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매우 유리한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행정관과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살던 최초의 도시들에서 실행되게 되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생산물을 기록하기 위해 평판(平版) 위에 표시하는 것으로부터 문자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위의 사실들이 바로 우리가 소위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최초의 싹이 트는 단계였다. 그러나 중요한 단서(但書)로서, 증가된 부를 인구 중 소수가 관리하는 데 이 모든 것은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들 소수의 사람들은 전체 사회의 이익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그 부를 사용했다. 그런데, 생산이 더욱 발달될수록 부는 더욱 이 소수의 사람들 손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자연히 그 집중된 부는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과는 더욱 괴리되는 것이다. 사회를 이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시작되었던 여러 규칙들은, 부와 그것(부)을 생산하는 토지가 소수인의 사유 재산이라고 주장하는 "법률"이 되었다. 지배계급이 생기게 되었고, 법이 지배계급의 권력을 옹호해 주었던 것이다.
'토지에서 노동한 사람들이 자기네 생산물을 직접 관리할 수 있도록 사회가 다른 방식으로 발전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대답은 '그럴수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 본성"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여전히 매우 가난했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인구의 대다수는 땅을 파먹으면서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데 너무 바빠서, 읽기나 쓰기 체계를 발달시키고, 예술 작품을 창조하고, 교역을 위해 배를 건조하고, 별들의 행로를 연구해 보고, 수학의 기초 원리를 발견하고, 언제 강이 범람할지 혹은 어떻게 관개 수로를 건설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등의 일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어느 정도의 생활 필수품이 다수 대중한테서 탈취되어 이것이 하루 온종일 땀흘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소수의 특권 집단을 부양하는 데 사용될 때만, 이러한 일들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계급 분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이전의 인류 역사에서는 꿈꾸지도 못했던 생산의 발전을 이룩해 왔다. 자연적인 빈곤은 극복되었고, 지금 존재하는 빈곤은 자본가들이 저임금을 줌으로써 새로이 빚어진 인위적 빈곤이다. 오늘날의 계급 사회는 인류를 진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시키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필연적인 계급 분화를 일으킨 것은 최초의 순수한 농경 사회에서 읍과 도시 사회로 변화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부의 생산 방식이 발전하기 시작할 때마다 항상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예컨대, 천 년 전 영구의 지배계급은 토지를 소유하면서, 뼈빠지게 일하는 농노에 기생해 생활하는 봉건 귀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교역이 대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봉건 귀족과 함께 도시에서는 부유한 상인이라는 새로운 특권 계급이 성장했다. 그리고, 공업이 상당한 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상인들의 힘이 산업체 소유자(산업 자본가 계급)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사회 발전의 각 단계마다, 육체 노동을 해 부를 생산하는 피억압 계급과 그 부를 소유·통제하는 지배계급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 모두가 변화를 겪었다.
고대 로마의 노예 사회에서 노예는 지배계급의 사유 재산이었다. 노예 소유주는, 마치 그가 닭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닭이 생산해 내는 달걀을 소유하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가 생산해 내는 재화를 소유했다.
중세 봉건 사회에서 농노는 자기 토지를 보유(소유한 것은 아님--옮긴이)하고 거기에서 생산되는 것을 소유했다. 그러나, 이 토지를 보유하게 된 대가로 봉건 영주가 소유한 토지(領地: demesne--옮긴이)에서 보통 매주 사흘을 일해 주어야 했다. 즉, 그들의 시간은 구분이 되어, 반 정도는 영주를 위해 일하고 나머지 반 정도는 자신들을 위해 일하곤 했던 것이다. 만약 농노가 영주를 위해 일하기를 거부한다면, 영주는 농노를 채찍질, 투옥, 혹은 더 가혹한 방법으로 벌할 수 있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주는 노동자를 육체적으로 소유하지도 않으며, 자기를 위해 지불되지 않는 노동(不拂勞動)을 하기를 거부하는 노동자를 육체적으로 처벌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고용주는 노동자가 살아가기 위해서 얻어야만 하는 일자리인 공장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고용주는 아주 쉽게 노동자로 하여금 자기가 소유한 공장에서 만들어 내는 상품의 가치보다 훨씬 더 적은 임금을 받고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모든 경우에서 억압자 계급은, 일단 노동자들의 가장 기본 필수품이 충족되면, 남은 모든 부를 소유·통제한다. 노예 소유주는 자기 재산(노예)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기를 원하므로, 자가 운전자가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기 노예한테 먹을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노예가 육체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 이외에, 잉여로 남는 모든 것은 주인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한다. 봉건 농노는 자신의 땅뙈기에서 일함으로써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농노가 영지(領地: demesne)에서 하는 모든 가외 노동은 영주에게 돌어간다. 현대 노동자는 임금을 지불받는다. 그가 창출하는 그 밖의 모든 부는 이윤이나 이자나 지대의 형태로 고용주 계급한테로 간다.
계급투쟁과 국가
근로 대중이 저항하지 않고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인 적은 거의 없었다. 고대 이집트와 로마 노예 반란, 중국 전제 왕조 시대의 농민 반란, 고대 그리스 도시와 로마,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의 내전 등이 있었다. 칼 마르크스가 자기의 소책자 『공산당 선언』(1848) 서두에서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고 주장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문명의 성장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함으로써 일어난 계급투쟁에 좌우되어 왔다.
이집트의 왕(파라오)이나 로마의 황제나 중세의 군주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또한 아무리 호화롭게 살았다 해도, 그리고 아무리 장대한 궁전을 가졌다 해도,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농민이나 노예가 생산한 생산물이 자기들의 소유가 되는 것을 힘으로 보장하지 못했더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급 분화와 병행해서 또 다른 것, 즉 폭력 수단을 그들 자신과 그들의 지지자들이 지배할 수 있어야만 위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기 사회에서는,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정부 기관이나 군대나 경찰 같은 것---즉 국가(기구)---이 존재하지 않았다. 예컨대, 불과 60~70년 전에조차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국가(기구)가 없는 사회를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 사회의 국가가 수행하는 많은 업무들이 단순히 비공식적으로 전체 주민이나 대표자 회의를 통해서 수행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회의는 중요한 사회 규범을 위반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행위를 재판하곤 했다. 예컨대, 악한을 추방시킨다든가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필요한 처벌에 동의했으므로 처벌을 수행하기 위해 경찰이 별도로 필요하지도 않았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도 별도의 군대 조직 없이 이러한 경우를 대비해 선발된 지도자 아래 모든 젊은 남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단 소수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부를 지배하는 사회가 성립되면,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전쟁을 조직하는 이러한 간단한 방법들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대표자 회의나 어떤 무장 청장년 회의도 계급에 따라 분열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권 집단은 형법과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과 군대를 조직하고 무기를 생산하는 것을 오직 자기들의 손에 독점할 때에만 존속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계급 분화에는 재판관(판검사)과 경찰(및 비밀 경찰)과 장군 및 관료---이들 모두에게는 특권 계급의 지배를 보호해 준 보답으로 특권 계급이 쥐고 있는 부의 일부가 주어진다---와 같은 집단의 성장이 뒤따랐다.
이러한 국가(기구)의 여러 지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자기 상관의 명령에 주저없이 복종하도록 훈련받았고 피착취 인민 대중과 모든 정상적인 사회적 유대는 맺지 않았다. 국가는 특권 계급의 손아귀에 있는 살상 장치로서 발전했다. 그것도 매우 효율적인 장치로서.
물론, 이러한 장치를 움직이는 장군들이 흔히 어떤 황제나 왕과 불화가 생겨, 자기들 자신이 그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괴물같이 거대하게 무장한 지배계급조차도 종종 그런 사태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살상 장치를 계속 돌아가게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부(富)가 노동자 대중에 대한 착취에서 나오므로, 이같은 반란은 한결같이 사회를 구시대적 방식으로 지속시켰던 것이다.
사회가 좀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되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은, 단지 특권 계급뿐 아니라 이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무장한 기구, 즉 국가도 자기들의 타도해야 할 대상임을 역사 전반에 걸쳐서 자각해 왔다.
지배계급(과 그들을 지원하는 장군, 경찰, 판검사, 교도관 및 관료들)이 없으면 우선 무엇보다도 문명이 발전할 수 없었기에, 지배계급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일단 자신들의 권력이 확립되면, 문명이 더 이상 발전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게 된다. 그들의 권력 유지는 부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부를 자신들에게 넘겨주도록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들은 구식의 부 생산 방식보다 더 효율적인 방식을 새로이 도입할 수 있을지라도 부의 관리권(력)이 자기들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갈까봐 부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에 경계심을 갖게 된다.
지배계급과 그들의 억압 기구는 피착취 대중의 자발성과 독립성을 발전시키는 데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것이든 두려워한다. 그들은 또한, 새로운 특권 계급이 성장해서 자기들 자신의 무기와 군대의 비용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재력을 갖게 되는 것도 두려워한다. 어느 한도를 넘으면 생산의 발달을 돕지 않고 오히려 저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컨대, 전제 왕조 시대 중국 지배계급의 권력 유지는 토지를 소유하는 것에, 그리고 관개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운하와 제방(提防)을 통제하는 데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토지의 소유 및 운하·제방의 지배는 약 2천 년 동안 지속된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전제 왕조 시대 말기의 생산은 초기보다 그리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물론 그 대신, 유럽이 내내 중세의 어두움 속에 갇혀 있을 때 중국은 예술을 꽃피웠고 인쇄술과 화약을 발명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생산 형태가 수공업자들과 상인들의 주도로 도시에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자기들의 지배를 완전히 받지는 않는 사회 집단의 세력이 이렇게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전제 왕조 당국은 주기로 가혹한 조치를 취해, 성장하는 도시 경제를 분쇄했고 생산을 저하시켰으며 신흥 사회계급의 세력을 파괴했다.
새로운 생산력의 발전, 즉 부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의 발달은 보수적인 기존 지배계급의 이익과 상충했다. 투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가 사회의 모든 장래를 결정했다.
때로, 그 결과는 중국에서처럼 새로운 생산 형태가 등장하는 것이 저해받아 사회가 매우 오랫동안 거의 정체되다시피 하기도 했다. 때로, 로마제국에서처럼 새로운 생상 형태가 발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충분한 부가 생산되지 못하며, 결국 사회는 낡은 기반 위에서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게 되었다. 로마의 문명은 붕괴되었고, 도시는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은 조야한 농업 사회 형태로 되돌아갔다. 때로, 새로운 생산 형태에 토대를 둔 신흥 계급이 기존의 지배계급을---그들을 지탱시키는 사법 체계(司法體系), 군대, 이념, 종교와 더불어---조직적으로 약화시켜 마침내는 타도할 수 있었다. 이 때에야 비로소 사회가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각 경우에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느냐 뒤로 후퇴하느냐 하는 것은 계급간의 싸움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느 싸움에서와 마찬가지로, 승리는 미리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싸우는 계급들의 조직과 단결력, 지도력에 달려 있다.
4 자본주의 체제의 형성
노동자들이 듣는 가장 바보스러운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현재의 상황이 달라져도 별볼일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그것이 오래전이 아닌, 그리고 지구상의 어떤 먼 고장에서가 아닌, 바로 이 나라(영국을 가리킴--옮긴이)에서 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과 250여 년 전의 사람들한테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을 거대한 도시, 큰 공장, 비행기, 우주 탐험---촐도 체계조차 그들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과 같은 것들로써 묘사했다면, 그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여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압도적으로 농업적인 사회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방 촌락 밖으로 40리 이상을 여행해 보지 못했고, 생활 양식은 수천 년 동안 그러했듯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칠팔백 년 전에 이러한 사회체제 전반에 마침내 도전하게 되는 발전이 시작되었다. 수공업자 및 상인 집단이 도읍(都邑)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특정 영주에게 무료로 봉사하지 않고, 그 대신 생산물을 여러 영주들 및 농노들과 식료품으로 교환했다. 점차로 그들은 귀금속을 그러한 교환의 척도로 사용했다. 이것이 모든 교환 행위에서 얼마간 여분의 귀금속을 얻는, 즉 이윤을 얻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일보 대전진은 아니었다.
도시는 처음에 한 군주를 다른 군주와 서로 반목시켜 그 중간에서 어부지리를 얻음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 수공업자들은 기술이 향상됨에 따라 더욱 많은 부를 만들어 내고 영향력도 커졌다. 당시의 "중간 계급"---부르주아들을 당시에 그렇게 불렀다---은 중세 봉건 사회 내부의 한 계급으로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회를 지배했던 봉건 영주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부를 획득했다.
봉건 영주는 농노들을 시켜 자기 토지에서 생산할 수 있는 농산물에 직접 의존해서 생활했다. 그는 농노들한테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이러한 일을 할 수 있기 위해 자기가 가진 권력을 사용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시의 더 부유한 계급(부르주아지)은 비농산품을 판매한 수익에 의존해 생활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그러한 재화를 생산한 노동자들에게 일당 혹은 주당으로 임금을 지불했다.
이들 노동자들(흔히 도망친 농노들이었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오고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일단 자기가 수당을 받는 만큼의 일을 끝마치기만 하면. 노동자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유일한' 강제력은, 만약 누군가에게 고용되지 못하면 굶어 죽게 될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자유로운" 노동자는 굶어 죽기보다는 일한 대가로 자기가 생산한 상품의 값어치(가치)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으려 했기 때문에,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될 수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나중에 이러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구조를 다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에는) 중간계급인 부르주아와 봉건 영주는 전혀 다른 원천으로부터 부를 얻는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로 인해 그들은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기를 원하게 된다.
봉건 영주의 이상(理想)은, 성문법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어떤 외부 집단이 침입하여 자기 토지를 강제로 점유하는 일이 없고 농노들이 도망칠 수 없도록 자신의 토지에서 자신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였다. 영주는 모든 사람들이 타고난 사회적 신분을 받아들여 선조들의 시대처럼 현상(現狀)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했다.
필연적으로 당시의 부유한 신흥 중간 계급(즉, 부르주아지)은 사물을 다르게 보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업을 방해하거나 자기들이 쌓은 부(富)를 강탈해 가는 군주나 귀족들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기들 자신이 뽑은 대표자들이 작성하고 시행하는 확고한 성문법 체계를 통해 봉건 귀족과 군주를 견제하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더 가난한 계급들을 농노 신분에서 해방시켜 이들이 도시에서 일할 수 있게 되기를(그래서 자기들의 이윤을 증대시킬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그들 자신의 신분 문제에 대해서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흔히 봉건 영주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일이 자기 대(代)에서도 반복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한마디로 신흥 부르주아지는 사회를 대변혁시키기를 원했다. 구질서와 그들의 충돌은 경제적인 것이었을 뿐 아니라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일반 관념의 주된 원천이 교회 설교(성당 강론)이었던 문맹 사회에서 관념은 주로 종교적인 것이었다.
중세에는 봉건 영주의 신분을 타고난 주교와 수도원장들이 교회를 운영했기 때문에, 교회는 자연히 도시 부르주아지의 많은 행위들을 "죄악"이라고 공격하는 친(親)봉건제적 견해를 폈다.
그래서 16. 17세기의 독일,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서는 '중간 계급'이 자기들 나름의 종교를 만들기 위해 모였다.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 Protestantism)가 바로 그것인데, 개신교는 검약, 절제, 근면(특히 노동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주교와 수도원장의 주도권으로부터 중간 계급 신도의 독립을 설교했던 종교 관념이었다. 중간 계급(즉, 부르주아지)은 중세의 신 관념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모습대로 신을 만들어 냈다.
오늘날 우리는 마치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단순히 성찬식(성체 성사)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뜻하는 바에 대한 이견으로 싸우고 죽었던 것인 양, 즉 마치 당시의 큰 종교 전쟁과 내전들이 그저 종교적 차이로부터 비롯한 것인 양 학교나 텔레비젼에서 듣게 된다. 그러나, 훨씬 그 이상의 것이 문제로 되어 있었다. 즉, 부의 생산을 조직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에 기초한, 전적으로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사회 사이의 충돌이었다.
영국에서는 부르주아지가 승리했다. 현재의 지배계급(부르주아지)한테는 비록 무섭게 여겨지겠지만, 그들의 선조들은 왕의 목을 참수해 자기들의 신에게 봉헌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신성화시켰고, 그러한 행위를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을 들먹이며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서는 제1회전의 승리는 봉건 귀족한테 돌아갔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개신교도인 부르주아 혁명가들은 처절한 내전 끝에---비록 북부 독일에서는 봉건제의 성격을 띤 개신교가 종교로서 생존하긴 했지만---일망타진되었다. 부르주아지는 그 후 2세기 이상이나 기다려서야 비로소 1789년 파리에서 종교적 외피를 입지 않고 시작되었던 제2회전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착취와 잉여가치
노예 사회와 봉건 사회에서 상층 계급(유산 계급)은 근로 인민 대중에 대해 법적 제재력을 가져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봉건 영주나 노예 소유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즉, 농노나 노예)이 달아나버려, 특권 계급 자신을 위해 노동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인격에 대해 그러한 법적 제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가를 위해 일하기를 거부하는 노동자가 굶어 죽게 될 것이 보장될 수만 있다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소유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소유하는 대신에 노동자의 생계 원천, 즉 기계와 공장을 소유하고 지배한다면 그들은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적 생활 필수품은 인간의 노동으로 생산된다. 그러나, 땅을 경작할 도구와 자연에서 얻는 원료를 가공할 도구가 없으면, 그 노동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그 도구는 호미와 쟁기 같은 간단한 농기구로부터 현대의 자동화한 공장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기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도구 없이는 가장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조차도 육체적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생산할 수 없다.
현대 인류가 아득한 석기 시대의 조상들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도구들---보통 생산수단(means of production)이라 부르는---의 발전이다. 자본주의는 소수가 이러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재산 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컨대, 오늘날 영국 인구의 1퍼센트가 산업(여기서는 농업도 포함됨--옮긴이) 주식과 유가증권의 84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 생산수단---기계·공장·유전·비옥한 농토 등---의 대부분에 대한 효율적인 지배(소유, 관리, 통제를 포함한 개념--옮긴이)가 그들의 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인민 대중(민중)에게 그러한 일터(작업장)와 생산수단을 가동시켜 노동하도록 허락하면 대중은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는 것이다. 이 점(자본가 계급이 생산수단을 지배한다는 점)이 자본가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는데도---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주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에 대해 독점적 지배력을 확립하는 데는 수세기가 걸렸다. 예컨대, 17, 18세기의 영국 의회는 농민을 그들의 생산수단---그들이 수세기 동안 경작해 왔던 토지---에서 몰아내는 종획법(Enclosure Acts: 지주가 자기 토지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농민을 쫓아낸 후 목양장(牧羊場)을 만들 수 있게 한 법령--옮긴이)을 처음으로 통과시켰다. 토지는 특정 자본가 계급의 재산이 되어 버렸고,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 대중은 살아 가기 위해 자본가들한테 자기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이렇게 독점하게 되자, 자본가는 인민 대중이 함께 자유와 균등한 정치적 권리들을 누릴 수 있게 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아무리 "자유롭다"고 해도 여전히 생계를 위해 노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친(親)자본가 경제학자들은 당시 일어난 상황에 대해 단순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을 임금을 지불하고 사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가는 '노동'에 대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는 다른 사람한테 가서 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가는 "정당한 하루의 임금"을 주고, 그 보답으로 노동자는 "정당한 하루의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친자본가 경제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이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윤은 자본가가 자기의 생산수단, 즉 자신의 자본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 "희생"에 대한 "대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노동자한테는 전혀 곧이들리지 않는 논리이다.
"순 이윤율"이 10%라고 발표하는 한 회사를 예로 들어 보자. 그 회사의 자본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기계, 공장 등의 비용이 1억 파운드라면, 해마다 마모되는 기계를 대치하는 비용(감가상각비)과 원료 비용 및 임금을 지불하고도 그 회사는 천만 파운드의 이윤을 남겼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10년 후에 그 회사가 1억 파운드---원래의 투자액 전비용에 해당하는---의 총이윤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만약 이윤이 "희생"에 대한 "대가"라면, 분명히 10년 후에 모든 이윤은 중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때가 되면 자본가는 자기가 처음에 투자한 돈을 전액 되돌려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가는 이전보다 두 배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원(原)투자액과 그 동안 축적된 이윤을 몽땅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이렇게 되는 동안 노동자는 자기 삶의 에너지를 하루에 8시간씩, 일년에 300일을 공장에서 일하는 데 희생시켜 왔다. 노동자도 자본가와 같이 10년 후에 두 배로 잘 살게 되었는가? 분명코 그렇지 않다. 비록 노동자가 열심히 저축을 했다 해도 전기밥솥, 냉장고, 세탁기 이상으로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노동자가 결코 자기가 일하는 공장을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을 수 없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정당한 하루의 보수에 대한 정당한 하루 일"이라는 방식은, 노동자를 자본도 없고 그저 대략 똑같은 임금을 받기 위해 계속 노동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팽개쳐 두었지만, 자본가의 자본은 배가 시켜 놓았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평등"권은 불평등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위대한 발견 가운데 하나가 이 명백한 변칙에 대한 설명이었다. 자본가로 하여금 자기 노동자들이 행한 노동의 가치 전부를 지불하도록 강요하는 (법적·정치적·경제적) 장치는 없다. 예컨대, 오늘날 기계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한 주일에 190~200파운드에 해당하는 생산물을 새로이 산출해 낸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곧 그 노동자가 이 액수를 전부 지불 받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노동자는 훨씬 적은 액수를 받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동 외에 달리 택할 길은 굶주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생산하는 것의 가치 전부를 요구하지 않고, '그저 참을 만한' 생활 수준을 가능케 할 만큼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기의 모든 능력을 다 쏟아낼 수 있을 만큼의 대가를 지불받는다. 즉, 자본가가 날마다 부려먹을 수 있도록 자기의 일할 능력(마르크스가 노동력 labour power이라고 부른 것)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받는 것이다.
노동자들 자신이 일할 수 있도록 건강을 유지하고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가 될 아이들을 양육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보수를 노동자들이 받는다면, 자본가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력에 대해 "정당한"액수를 지불받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부(富)의 양은 그들이 일단 노동해서 생산할 수 있는 부의 양보다 훨씬 더 적다. 즉, 노동자들의 노동력 가치는 그들의 노동으로 창조되는 가치보다 훨씬 적은 것이다.
그 차액은 자본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마라크스는 그것을 잉여가치(surplus value)라고 불렀다.
자본의 자기증식(自己增殖)
현(現)체제를 변호하는 자들의 글을 읽게 되면, 그들이 이상한(그러나 그들한테는 당연한) 관념을 공유하고 있음을 금방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즉, 그들에 따르면 돈(화폐)은 마술적 속성을 갖고 있어서 식물이나 동물처럼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자본가는 은행에 돈을 예금할 때 그 돈의 액수가 늘어날 것을 기대한다. 자본가는 돈을 주식에 투자할 때 그 돈이 배당금의 형태로---해마다 새로운 돈을 '새끼 쳐서'---보상되기를 기대한다. 칼 마르크스는 '돈이 돈을 낳는' 현상을 주목해 '자본의 자기증식'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마르크스의 설명은 화폐가 아니라 노동과 생산수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ㅎ녀재의 사회에서 충분한 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을 돈으로 살 수 있고, 생산수단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다른 모든 사람이 자기들한테 팔게 할 수 있다. '자본의 자기증식'의 비밀, 즉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돈이 기적처럼 불어날 수 있는 비밀은 이러한 노동력을 사고 파는 데 있다.
반복해 강조하면, 자본가는 애당초부터---발전도상국은 국가 권력과 유착하여 받은 특혜 융자와 외국에서 도입된 자본(원조·차관 등)을 통해---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을 살 만큼 충분한 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고용하고 있는 각 노동자로부터 날마다 뽑아 내는 잉여가치로 더욱더 부유해지는 것이 보장된다. 어떤 자연 법칙이 아니라, 자본가의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싸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그의 돈은 계속 불어나는 것, 즉 그의 자본은 계속 증식되는 것이다.
배당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자기가 투자한 기업의 노동자를 단 한 명도, 단 한번도 대면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한테 수입을 주는 것은 돈의 신비스러운 힘이 아니라 그 노동자들이 흘린 피땀이다.(은행이나 증권 회사와 같은 금융 기관 등을 매개로 하여 이자 소득을 얻는 자산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배당금, 이자, 그리고 이윤은 모두 잉여가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가 일해서 얼마나 받는가 하는 것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고용주는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임금을 주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가가 더이상 깎아내릴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들 가운데 어떤 것은 육체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노동자들한테 하도 형편없는 임금을 주어 그들이 영양실조로 허덕여 일에 아무런 노력도 기울일 수 없다면 이는 무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기계 위에서 잠들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밤에는 일에서 벗어나 휴식할 보금자리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들이 약간 "사치스럽다"고 여기기도 하는 것, 즉 가끔 저녁에 술을 조금 마신다든가 텔레비젼을 본다든가 가끔 휴일을 즐길 수 있도록 적절한 보수를 생각해 주는 것은 자본가한테도 유익한 일이다. 이 모든 것들은 노동자가 더 상쾌한 기분으로 더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 모두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새로 보충하는 데 이바지한다. 임금이 너무 낮게 "책정"되면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자본가는 또한, 또 다른 것을 걱정해야 한다. 현재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그의 회사는 오랫 동안 존속한다는 사실이다. 회사는 현재 노동자의 자녀들이 노동력까지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한테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을 정도로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 또한, 자본가들은 정부가 이들 노동자 자녀들한테 교육 제도를 통해(읽기·쓰기·셈하기와 같은) 일정한 기술들을 가르치도록 책임을 분담시켜야 한다. 그러나, 특히 "저발전국"의 경우, 교육비를 조달할 수 없는 임금 수준은 미성년자나 부녀자들까지도 공장에 나가 일하게 만든다.
실제로, 또 다른 것이 역시 문제가 된다. 즉, 노동자가 어느 정도를 "괜찮은" 임금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보다 상당히 적게 보수를 받는 노동자는 자기 일을 "별볼일 없다"고 생각해 일자리를 잃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일을 소홀히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임금을 결정하는 이 모든 요인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그 모든 요인들은 자본가가 일당으로 사들이는 노동자의 노동력, 즉 그의 생활 에너지를 보장하는 수준을 지향한다. 노동자는 자기와 자기 가족이 계속 "먹고 살" 수 있고, 자기가 계속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할 만큼의 비용을 지불받는 것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 관해 한 가지 점이 더 지적되어야 한다. 막대한 양의 부가 경찰력과 군사력 같은 것에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과 군대 등은 국가가 운영하지만, 사실은 자본가 계급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즉, 군대와 경찰 등의 국가 군사·관료 기구)을 위해 소요되는 가치는---노동자들한테 귀속되지 않은---노동자들한테서 착취되어 자본가들의 주머니로 들어간 가치이다. 다시 말해 이것 또한 잉여가치의 일부이다.
결론적으로, 잉여가치=이윤+임대료+이자+국가(정부, 행정기관, 군대, 경찰, 감옥, 사법부 등)에 쓰이는 비용이다.
5 노동 가치 이론
"그러나, 기계, 즉 자본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재화를 생산한다. 만약 그렇다면, 노동은 물론 자본도 또한 부(富) 생산의 일부를 담당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모든 생산 요소는 그 대가를 마땅히 받아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친(親)자본가적 경제학을 배운 자들이 착취와 잉여가치(surplus value)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석에 대해 응답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론은 얼핏 듣기에 제법 그럴 듯해 보인다. 왜냐하면, 확실히 우리는 자본 없이는 재화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 없이 상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결코 없다. 우리의 출발점은 그러나 상당히 다르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자본은 어디서 나왔는가?" "생산수단은 맨처음 어떻게 생겼는가?"
그 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인간이 부를 창조하기 위해 역사상 사용해 온 모든 것은---신석기 시대의 돌도끼이건 또는 현대의 컴퓨터이건 간에---일단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 비록 도끼나 다른 도구들을 사용해서 만들어졌다고 할지라도, 이번에 그 도구들도 역시 그 이전에 행해진 노동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을 일컬어 "죽은 노동"이라고 불렀던 이유이다. 기업주들이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을 자랑할 때, 그들은 사실 그 이전 세대들이 행한 광대한 양의 집적된 노동을 지배(소유, 관리, 통제를 총괄하는 개념이다--옮긴이)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전 세대의 집적된 노동)은 그들 자본가들이 현재 하고 있는 만큼의 일만 했던 선조(혹은 선배)자본가들의 "노동"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개념은---보통 노동 가치론이라고 하는데---마르크스의 독창적 발견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시대까지 모든 훌륭한 친자본가 경제학자들조차 그것을 받아들였다.
영국 경제학자들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나 리카도(David Ricardo) 같은 사람들은 산업(여기서는 광공업을 가리킨다--옮긴이)자본주의 체제가 아직 초기 단계였을 때---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1789~99)을 전후한 시기에---이론적 저술 활동을 했다. 자본가들은 아직 (정치적으로)지배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자기들이 지배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부의 진정한 원천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스미스와 리카도는 이들 자본가들에게 "노동이 부를 창조하며, 따라서 부를 축적하려면 자본가들이 노동을 자본주의 이전에 속하는(전근대적인) 구 지배자들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말해 줌으로써 자본가들의 이익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노동계급과 친밀한 사상가들이 스미스와 리카도의 친구들(자본가 계급)에 대항하여 바로 그 주장을 되써먹기 시작했다. 즉, 그 친(親)노동자 사상가들은 노동이 부를 창조하는 동시에 노동은 또한 자본을 창조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본의 "권리"는 강탈당한 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반박했던 것이다.
그러자 곧 자본을 정당화·합리화해 줌으로써 자본가를 지원하는 경제학자들은 노동 가치 이론이 말도 안 되는 애물덩어리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은 앞문으로 차내면 뒷문으로 기어들어 오는 법이다.
영국방송협회(BBC) 텔레비젼 뉴스를 들어 보라. 자본가의 대변인들은, "노사 분규"(labor disputes)로 인해 "대폭적인" 임금 인상이 있으면 "기업인"의 투자가 위축되어 "성장"(도대체 누구를 위한 성장이길래?)이 둔화될 것이므로 실업자가 급증할 것이고, 또한 고율의 인플레가 유발되어 결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감소시키고야 말 것이라고 약올리고 위축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니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라고 노동자들의 다짐을 받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맞는가 틀리는가 하는 것은 잠시 접어 두자.(사실, 접어 두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투자를 위축시키고 성장을 둔화시키는 것은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통제를 강화하고 다른 기업과 벌이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동화와 기계화를 추진하는 것이 이윤율---우리는 이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을 저하시키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그 대신에, 그 주장이 제기되는 방식을 면밀히 살펴보자. 그들은 "기계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아니,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은 노동자들, 즉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인 즉,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더 많은 부가 창조될 것이고, 이는 다시 새 기계를 더 많이 투자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자기들 자신은 모를지라도---더 많은 노동(량)이 더 많은 자본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것을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일, 즉 노동이야말로 부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셈이다!
내가 주머니에 1파운드의 지폐를 갖고 있다고 하자. 왜 그것이 나한테 유용한가? 결국 그것은 인쇄된 종이 조각일 뿐이다. 그것이 나한테 가치가 있다는 것은, 내가 다른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유용한 물건을 그것과 교환해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 1파운드의 지폐는 그만한 양의 노동의 산물을 살 수 있는 권리일 뿐이다. 2파운드의 지폐는 그 두 배의 노동의 산물을 살 수 있는 권리이고, 3파운드의 지폐는 3배의 노동의 산물을 살 수 있는 권리이며 ...... 등이다.
우리가 부를 측량한다는 것은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들인 노동(량)을 측량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주어진 일정한 시간의 노동으로 같은 양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내가 책상을 만들기 시작하면 숙련된 목수보다 시간이 5~6배 더 걸릴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아무도 내가 만든 책상이 숙련된 목수가 만든 책상보다 5~6배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 책상을 만드는 데 목수의 노동---나의 나동이 아니라---이 얼마만큼이나 필요했는가에 따라 그 가치를 매길 것이다.
목수가 책상을 만드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고 하자. 그러면, 사람들은 책상의 가치가 한 시간의 노동에 상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즉, 책상의 가치는 현사회에서 보통 수준의 기술과 숙련도로 그것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노동 시간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어떤 물건의 가치 척도는 단순히 한 개인이 그것을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이 아니라, 평균 수준의 기술과 평균 수준의 숙련도를 가지고 일하는 개인이 들이는 시간---그는 이 필요한 평균 수준의 노동을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불렀다---임을 지적했다. 자본주의에서는 기술 진보가 계속 일어나고 있고, 따라서 재화를 생산하는 데 드는 노동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이 점은 중요하다.
예컨대, 진공관을 가지고 라디오를 만들던 때에 라디오는 매우 비쌌다. 왜냐하면, 진공관을 만들고 그것들을 선으로 연결하는 일 등에 많은 노동(량 혹은 시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후 훨씬 적은 노동으로 만들어지고 연결될 수 있는 트랜지스터가 발명되었다. 여전히 지공관 라디오를 만들고 있던 모든 공장 노동자들은 자기들이 생사하고 있는 라디오의 가치가 갑자기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라디오의 가치는 더이상 진공관을 가지고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트랜지스터를 갖고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한 가지 요점이 있다. 어떤 상품들의 가격은 날마다 또는 주마다 크게 오르락내리락 한다. 이런 변화(가격 변화)는 그 상품들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의 변화(가치의 변화) 외에도 다른 많은 요인들로 인해 일어날 수 있다.
브라질에 서리가 내려 모든 커피 작물이 죽었을 때, 전세계적으로 커피가 값이 폭등했다. 만일 내일 어떤 천재지변이 멕시코의 모든 텔레비젼을 파괴한다면, 텔레비젼 값이 똑같은 식으로 오를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경제학자들이 수요와 공급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와 같은 가격 변동을 끊임없이 일으킨다.
이런 이유로 많은 친자본가적 경제학자들이 노동 가치 이론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단지 수요와 공급만이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물건 값이 오르내릴 때 그것은 평균적 수준을 중심으로 오르내린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의 수면은 조수 때문에 높아지고 낮아지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해수면"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일정한 지점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이 대목에 대하여 홈페이지 주인이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사실 앞의 해수면에 관한 설명은 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수요 공급의 법칙은 여러 상품들 사이에 교환되는 비율을 결정하는 데는 아무런 설명도 해줄수 없다. 예를 들자면 지우개 5개와 공책 한개가 어떻게 같은 가치로 평가되어 교환이 가능한지 같은 경우에 대해서 왜 그러한 비율로 교환이 되는지는 설명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가격이 매일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사실을 그 가격이 오르내리는 중심으로서 일정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모든 텔레비젼이 (천재지변 등으로 인해)파괴된다면, 처음에 생산되는 신품은 수요가 아주 많을 것이므로 높은 가격에 팔릴 것이다. 그러나, 머지 않아 더욱더 많은 물건이 시장에 나와 서로 경쟁하게 되면, 결국 텔레비젼 가격은 하락하여 그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표시된 그것의 가치에 가까워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경쟁과 축적
자본주의가 역동적이고 진보적인 체제인 것으로 보였던 시대가 있었다. 대부분의 인류 역사를 통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은 고된 노동과 착취에 지배되어 왔다. 18세기와 19세기에 산업 자본주의가 출현했을 때에도 그것이 이런 사정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산업 자본주의는 어떤 유용한 목적을 위해 이런 고된 노동과 착취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소수의 기생적 귀족을 위한 사치품과 죽은 군주를 위한 사치스런 무덤을 만들거나 황제의 아들이 신이 저버린 후미진 곳을 지배하기 위한 쓸데없는 전쟁에 거대한 양의 부를 낭비하는 대신에, 산업 자본주의는 더 많은 부를 만들어 내기 위한 수단들을 생산하는 데 부를 사용했다. 자본주의의 발흥은 산업, 도시, 운송 수단이 그 이전의 인류 역사에서는 꿈꿀 수도 없었던 규모로 성장한 시기였다.
오늘날은 이상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영국의 올드햄, 핼리팩스, 빙글리와 같은 고장은 기적의 산실이었다. 인류는 전에는 결코 그렇게 많은 원면과 양모가 그렇게 빠리 수백만 명의 옷을 만들 수 있는 옷감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자본가들이 가진 어떤 특별하 미덕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용한 노동에 대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지불함으로써 자기들의 손에 더 많은 부를 얻는 데만 사로잡혀 있는, 언제나 매우 유해한 사람들이었다.
자본주의 이전의 많은 지배계급들(노예 소유주, 영주 등)은, 산업을 건설하지 않았을 뿐, 이런 점에서 자본가들과 흡사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그 이전의 지배계급과 달랐다.
첫째로, 우리가 이미 다루었던 것인데, 즉 자본가들은 노동자(피착취 직접 생산자)들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 대신 노동자들한테 그들의 일할 능력, 즉 그들의 노동력에 대해 시간당으로 지불했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라 "임금 노예"들을 사용한 것이다. 둘째로, 자본가들은 자기들의 노동자들이 생산해 낸 재화를 자기들 스스로가 소비하지 않았다. 봉건 영주는 농노가 생산해 낸 고기, 빵, 치즈, 술 등을 '직접 소비'하며 살았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생산한 재화를 다른 사람들한테 '팔아서' 살았다. 즉, 시장에서 상품을 팔아 이윤을 얻으며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노예 소유주 개인이나 봉건 영주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행할 수 있었던 자유보다 더 작은 자유를 자본가 개인에게 주었다. 상품을 팔기 위해서 자본가들은 그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싸게 생산해야 했다. 자본가는 공장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는 전지전능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힘을 쓸 수는 없었다. 그는 다른 공장들과 경쟁할 필요에 굴복해야 했다.
우리의 친애하는 자본가, 비룡 그룹의 김덕배 회장(브라우닝 브라우니 경을 이렇게 번역했음--옮긴이)을 예로 들어 보자. 그의 공장에서 생산된 일정량의 면포가 만들어지는 데 10시간의 노동이 들었다고 하자. 그러나, 다른 어떤 공장은 5시간의 노동으로 같은 양의 면포를 생산할 수 있었다고 하자. 김덕배 회장은 면포에 대해 10시간의 노동과 똑같은 가격그오 값을 매길 수는 없는 것이다.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더 싼 면포가 있는데도 비싼 가격을 사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사업을 할 수 있기를 원하는 자본가라면 누구나 자기가 고용한 노동자들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일하도록 확실히 해 두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또한 그가 고용한 노동자들이 다른 자본가들한테 고용된 노동자들보다 단위 시간당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가장 최신의 기계를 갖고 일을 하게끔 해야 했다. 사업을 계속하고자 하는 자본가는 더 많은 생산수단을 소유해야 했다.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자본을 축적해야 했던 것이다.
자본가들간의 경쟁은 그들 모두를 속박하는 시장 체제라는 하나의 힘을 낳았다. 경쟁은 자본가들이 항상 노동 과정을 가속시키도록 강요했고, 그리하여 새로운 기계에 그들이 투자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자본을 투자하게 했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될 수 있는 한 최저 수준으로 유지함으로써만 새로운 기계를 구비할 수 있었다.(물론 한편으로는 자기들 자신의 사치품도 살 수 있기도 했지만.)
마르크스는 주요 저작인 『자본론』에서 자본가는 구두쇠처럼 점점 더 많은 부를 얻는 데 골몰하게 된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구두쇠한테는 단순히 독특한 개성인 탐욕이 자본가한테는, 그가 단지 여러 바퀴 중의 하나일 뿐인 사회 구조(메커니즘)의 산물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자본가로 하여금 일정한 산업 부문에 투자된 자본의 양을 계속 증대시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으며,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인 경쟁이 개개 자본가들한테 외부의 강제적 법칙으로서 느껴지도록 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경쟁은 자본가로 하여금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의 자본을 증식시키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자본가는 누적적 축적을 통해서만 그의 자본을 증식할 수 있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이것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이시다!
생산은 인간의 욕구---심지어 자본가 계급의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자본가가 다른 자본가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루어지고 있다. 각 자본가에게 고용된 노동자들은, 다른 기업주들보다 더 빨리 축적하려는 고용주들의 욕구에 자기들의 삶이 지배당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바처럼, "부르주아 사회에서 산 노동은 죽은 노동(생산수단--옮긴이)을 축적하는 수단일 뿐이다...... 살아 있는 사람(노동자--옮긴이)은 종속되어 있고 아무런 개성도 없는 반면, 자본은 독립적이고 개성을 갖고 있다."
자본가들이 다른 자본가들과 벌이는 경쟁에서 자본을 축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압력은, 자본주의 체제 초기의 산업의 급속한 진보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문제가 결과로서 나타났다. 그것은 반복되는 경제 공황이었다. 공황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 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6 경제 공황
"한편에서 부의 축적, 또 다른 한편에서 빈곤의 축적"---마르크스는 이 말로써 자본주의가 가진 경향을 요약했다. 모든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와 벌이는 경쟁을 두려워하며,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을 하도록 하면서도 될 수 있는 대로 낮은 임금을 지불한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생산수단의 대폭적인 증대'와 다른 한편으로는 '고용된 노동자 수와 임금의 제한된 증대' 사이의 불비례 현상이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경제 공황의 기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살펴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누가 (갈수록 양적으로 급증하고 있는) 상품을 살 것인가?' 하고 묻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저임금은 그들이 자기 노동으로 생산된 상품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임금을 올리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임금 인상은 자본주의 체제의 원동력인 이윤을 감소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의 기업이 생산된 상품을 팔 수 없다면, 그 기업은 공장문을 닫고 노동자를 해고해야 한다. 그러면 임금으로 지출되는 총액은 훨씬 더 줄어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때문에) 더 많은 기업들이 자기들의 상품을 팔 수 없게 된다. "과잉 생산"의 위기가 시작되고, 대중이 구매할 수 없는(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상품들이 경제 전반에 걸쳐 쌓이게 된다.
이것은 지난 170여 년 동안 자본주의 사회에서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재치 있게 옹호하는 자들은 공황에서 빠져나오는 쉬운 길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에 따르면, 필요한 모든 것은 자본가들이 새로운 공장과 기계에 그들의 이윤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규 투자는 노동자들한테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고, 이번에는 이것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팔리지 않는 상품을 살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규 투자가 있는 한 생산된 모든 상품은 팔릴 수 있고 자본주의 체제는 완전 고용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함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가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을 계속 투자하게 만드는 경쟁 압력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임을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경쟁 압력이 있다고 해서 자본가들이 자기들의 모든 이윤을 언제든지 투자하려 할 것인가 하고 물었다. 자본가는 "합당한" 이윤이 보장된다고 생각할 때에만 상품에 투자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그러한 이윤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는 그의 돈을 투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은행에 넣어 두고 있을 것이다(아니면 투기나 사채놀이를 할 것이다).
자본가가 투자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그가 경제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경제 상황이 좋아 보이면, 자본가들은 모두 동시에 투자하기 위해 덤벼들어 건설부지를 찾고, 기계를 구입하고, 원자재를 찾아 지구를 샅샅이 뒤지고, 숙련된 노동을 돈을 특별히 더 주고 쓰는 등 서로 부딪쳐서 나자빠질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소위 "호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토지, 원자재, 숙련 노동을 확보하기 위한 광기어린 경쟁은 그것들의 가격을 상승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기업들은 그것들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이 올라 자기들의 모든 이윤이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음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투자 붐이 갑자기 투자 위축으로 바뀐다. 어느 누구도 새로운 공장을 지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건설 노동자들이 해고된다. 아무도 새로운 기계를 사길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기계 도구 산업이 공황에 직면한다. 아무도 생산되고 있는 철과 강철을 사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철강 산업의 가동률이 갑자기 평균 수준 훨씬 이하로 떨어지고, 이윤이 남지 않게 된다. 폐업과 조업 중단이 전산업으로 파급되면서 일자리가 없어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이 다른 산업 부문의 상품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이 대폭 하락한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한편에서는 수요가 뒷받침되지 않는 상품 더미가 썩어가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빈 공장 밖에서 실직한 노동자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머리가 돌아버릴 듯한 상태 그러니까 주기적 공황이 거듭되어 온 역사이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과잉 생산" 위기를 주기적으로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무계획적이므로 자본이 갑자기 투자로 밀려들고 빠져나가는 것을 중단시킬 아무런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국가가 이런 위기를 중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사적 투자가 잘 안 될 떄는 국가 투자를 늘리고 사적 투자가 너무 많은 때는 국가 투자를 줄이는 식으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함으로써, 국가는 생산을 고르게 안정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 투자 역시 바보 같은 짓에 속한다.
<¿µ±¹Ã¶°>(British Steel) 회사를 보라. 몇 해 전, 더 많은 철강을 더 싸게 생산하기 위해 고안된 거대한 현대식 자동 용광로 때문에 철강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아직도 더 많은 철강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영국은 이러한 대규모 투자 계획에 착수했던 유일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 독일, 미국, 브라질, 동유럽, 심지어 한국조차 똑같이 투자를 했다. 이제 세계적으로 강철이 남아돈다. 즉, 과잉 생산 위기인 것이다. 국가 투자는 감축되고 있다.
물론, 철강 노동자들도 위의 두 가지 방식 모두로 고통받고 있다.
이것은 부의 대량 생산이 오직 이윤에만 관심이 있는 소수의 특권 집단이 지배하는 경제 체제(즉,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인류가 지불하고 있는 대가이다. 이들 소수의 특권 집단들이 직접 산업체를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국가에 대한 통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산업을 통제하고 있느냐(영국철강의 경우처럼)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 소수의 특권 집단인 자본가들이 국내적으로건 국제적으로건 이러한 통제력을 이용하여 최대 몫의 이윤을 위하여 서로 경쟁하는 이면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마지막 광기는 이른바 "과잉 생산"의 위기가 결코 진짜 과잉 생산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예컨대, "남아도는" 강철은 세계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곳곳에는 아직도 나무 쟁기로 땅을 갈아야 하는 농민들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철로 만든 쟁기는 식량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돈이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그들한테 도대체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이윤을 획득할 수 없을 테니까.
공황이 심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황이 단조로운 규칙성을 띠고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마르크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황이 악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투자가 특별한 기복이 없이 균등한 비율로 이루어질 때조차 자본주의는 공황으로 향하는 전반적인 추세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과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이 자본가들로 하여금 노동 절약 설비에 투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날 영국에서 거의 모든 신규 투자는 고용되는 노동자 수를 줄이기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지난 20년 동안 산출량은 약간 늘었으면서도 현재 영국 산업에 고용된 노동자의 수가 10년 전의 고용된 산업 노동자 수보다 더 적다.
생산을 "합리화"함으로써만, 그러니까 생산성을 증대시킴으로써만, 그리고 노동력을 감축시킴으로써만, 한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보다 더 큰 몫의 이윤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체제 전반에 미치는 결과는 파괴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생산성이 증대한다고 해서 노동자의 수가 투자와 같은 속도로 증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체제가 계속 돌아가게 하는 연료인 이윤의 원천은 노동자들의 노동이다. 만약 당신이 투자에 상응하는 이윤의 원천(노동)의 증가 없이 점점 더 많은 투자를 한다면, 당신은 파산을 향하고 잇는 것이 된다. 마치 4기통 승용차를 굴리는 데 필요한 휘발유의 양으로 12기통 스포츠카를 몰려고 생각한다면 고장나는 것이 확실하듯이 말이다. 이 점은, 120여 년 전 마르크스가 "신규 설비에 거액의 투자를 쏟아 넣는 데 자본주의가 성공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갈수록 악화되는 공황을 뜻하는, 이윤율 저하 경향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던 이유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오날늘의 자본주의에 아주 간단하게 적용될 수 있다. "불황"에서 "호황"으로 전환된다는, 그러니까 "어려운" 시절에서 "좋은" 시절로 전환된다는, 낡은 경제변동론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끝없는 경기 침체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기 호전의 시기, 혹은 실업의 감소는 한계가 있고 극히 짧다.
(자본주의)체제를 옹호하는 자들은, 이런 현상이 투자 수준이 충분히 높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신규 투자가 없으면 새로운 일자리도 없고, 새로운 일자리가 없으면 새로운 상품을 살 돈도 없게 된다는 그들의 지적에 관한 한 우리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설명"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임금을 탓한다. 임금이 너무 높아서 이윤을 압박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투자하기를 겁내는 것은 "충분한 보답"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체제 옹호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정부의 임금 정책이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떨어뜨리고 이윤을 크게 해주었는데도 공황은 계속되어 왔다. 예컨대,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진 반면---상위 10%의 소득은 1974년 전체 국민 수득의 57.8%에서 1976년 60%로 상승했다---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은 20세기 들어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으며, 1975~78년은 심각한 공황기였다.
아직도 공황을 종식시키기에 충분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 미국, 서독 등 임금이 떨어져 온 다른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120년 전에 마르크스가 말한 것을 듣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노동을 가동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투자만큼 이윤의 원천인 노동이 빨리 증가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공황은 심화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1인을 고용하기 위해 필요한 공장과 기계의 가치가 상당히 낮았을 때 글을 썼다. 노동자 1인당 자본 가치는 그 때부터 폭등하여 마침내 오늘날은 2만 파운드, 심지어 3만 파운드에 달한다. 자본주의 기업간의 경쟁은 자본가로 하여금 더욱 크고 더욱 비싼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왔다. 이제 대부분의 산업에서 기계를 새로 도입하면 노동자 수를 줄이는 것이 당연한 일로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국제적, 경제 기구인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는, 세계의 주요 국민경제의 고용 수준은 기적이 일어나 투자가 급증한다고 해도 계속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해 왔다.
투자는 급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은 그들의 이윤에 신경을 쓰기 때문에 자기들의 투자가 4배 증가해도 이윤은 겨우 2배가 된다면 그들은 정말로 속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이윤의 원천인 노동보다 산업이 더 빨리 성장하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인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바와 같이 '이윤율'(총이윤/총투하자본)은 저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어떤 새로운 투자도 위험한 모험으로 보이는 시점이 결국 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새로운 공장과 기계에 필요한 지출액의 규모는 어마어마할 것이지만, 이윤율은 전보다 더 낮아질 것이다. 이런 시점에 이르렀을 때 각 자본가(혹은 자본주의 국가)는 새로운 초대규모 투자 계획을 꿈꿀 수는 있지만 파산의 두려움 때문에 실행에 옮기기를 두려워할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경제는 이와 아주 흡사하다. 영국의 로버(Rover)사는 새로운 생산 라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손해를 볼까 두려워하고 있다. <¿µ±¹Ã¶°>(British Steel) 회사도 그들이 15년 전에 계획했던 거대한 공장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의 생산량을 팔 수 없기 때문에 그 거대한 공장 건설 계획을 동결해 두어야 한다. 일본 조선업자들도 새로운 조선소에 투자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일부 낡은 조선소들은 문을 닫고 있다.
더 거대하고, 더 생산성이 높은 기계를 설치하는 데 자본주의가 성공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자본주의를 명백히 영구적 공황으로 몰아간 것이다.
고대 노예 사회와 중세 봉건 사회는, 혁명이 일어나 사회를 변혁시키거나 사회를 퇴보시키는 영구적 위기에 돌입하는 양단간의 사태에 이른 바 있었다. 로마의 경우에 혁명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의 문명은 파괴되고 암흑 시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어떤 봉건 사회의 경우---영국과, 그 후의 프랑스도---혁명이 낡은 질서를 파괴하여 자본주의 하에서 새로운 사회적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제 자본주의 그 자체는 영구적 위기로 인해, 결국 인류가 기아와 전쟁의 야만주의로 퇴보할 것이냐 아니면 사회주의 혁명이냐 하는 선택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7 노동자 계급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존재하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는 말로 『공산당 선언』을 시작했다.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을 위해 부를 생산하도록 지배계급이 어떻게 강요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전의 역사에서 자주 내전으로 비화한 계급간의 대규모 투쟁이 발생해 왔다. 고대 로마의 노예 반란, 중세 유럽의 농민 봉기, 17세기와 18세기의 대규모 내전과 혁명이 그것이다.
이들 모든 대규모 투쟁에서 대중 봉기 세력은 사회의 가장 억압받는 층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재빨리 덧붙여 말한 바와 같이, 그 반란과 봉기의 결과는 피지배 계급의 모든 노력이 하나의 특권적인 소수의 지배자들을 또 다른 소수의 지배자들로 교체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컨대, 고대 중국에서는 몇 차례의 성공한 농민 반란이 있었지만, 농민들은 단지 하나의 왕조를 다른 왕조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비슷한 경우로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힘을 발휘한 계급은 파리의 무산 계급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마지막에 가서 사회는 그들이 지배하지 못하고 왕과 귀족을 대신한 은행가와 실업가들이 지배했다.
하층 계급이 자기들이 싸운 혁명을 지속적으로 지도하는 데 실패한 것은 두 가지 주요한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사회의 일반적 부(富)의 수준이 너무 낮았다. 아주 소수층만이 문명을 지탱하기 위한 예술과 학문을 발전시킬 만한 시간과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 이유는, 단지 광범위한 인민 대중이 아주 심각한 빈곤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가 진보하려면 계급 분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 피억압 계급의 비참한 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사회를 이끌어 갈 준비를 갖추지 못하게 했다. 대체로 피지배 계급은 문맹이었고, 자신들의 고유한 생활 터전 밖의 사정이 어떤지 알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의 일상 생활이 그들을 제작기 분리시켜 버렸다. 농민은 자기 땅을 경작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고, 도시 수공업자는 자신의 소규모 사업을 운영하는 데만 몰두하여 다른 수공업자들과 단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들과 어느 정도 경쟁 관계에 있었다.
농민 봉기는 지방 봉건 영주들의 토지를 분배받기 위해 분기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되곤 했으나, 일단 영주들을 패퇴시키면 농민들은 토지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하는 것을 둘러싸고 자기들끼리 싸우곤 했다. 마르크스가 말한 바와 같이, 농민들은 "자루 속에 든 감자"와 같았다. 곧, 농민들은 어떤 외부의 억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할 수는 있었으나, 자기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영구히 연합할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부를 창조하는 노동자들은 이제까지 존재했던 모든 하층 계급하고는 다르다. 첫째, 이제는 더 이상 인류의 진보를 위해 계급 분화가 필요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주기적으로 전쟁이나 경제 공황을 통해 거대한 양의 부를 파괴할 만큼 엄청난 부가 창출되고 있다. 부는 평등하게 분배될 수 있고, 사회는 학문과 예술 등이 만개할 수 있다.
둘째, 자본주의에서 삶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노동자들한테 사회를 관리할 수 있는 준비를 시킨다. 예컨대, 자본주의는 교육받고 숙련된 노동자들을 필요로 한다. 또한, 자본주의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대도시권의 대공장으로 몰아넣는데, 거기서 그들은 서로 긴밀하게 접촉하게 되고 또한 사회를 변혁하는 데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는 공장 안에서 생산을 통해 노동자들이 서로 협력하게 만들고, 노동자들의 그러한 협력 기술은,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노동조합으로 조직할 때와 같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것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대규모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거대한 기구들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피지배 계급이 그렇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더구나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일반 노동자들보다 한 계단 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가령 사무직 노동자나 기술자)의 집단을 다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조합 등을 조직해야만 하는 임금 노동자로 전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마지막으로, 교통과 통신의 발달---철도, 도로, 항공, 우편, 전화, 라디오, 텔레비젼 등---은 노동자들한테 그들이 생활하고 있는 지역이나 그들이 종사하는 산업의 외부와 교류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전국적 및 국제적 규모로---이전의 피지배 계급이 가졌던 비젼을 초월하여---하나의 계급으로 조직될 수 있다.
이 모든 사실들은, 노동계급이 기존 사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음을 뜻한다.---다른 왕조나 자산가 집단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사회를 변혁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대표자를 선출하여 통제함으로써,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모든 역사적 운동은 소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운동이었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대다수를 위한, 대다수의, 자기 의식적인 독자적 운동이다."
8 사회는 어떻게 변혁될 수 있는가?
압도 다수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대체로 혁명이 없이도 사회가 변혁될 수 있다고 주장해 왔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은 더욱 많다. 그들은, 필요한 모든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전통적 정치 제도---의회와 지방 의회---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기에 충분한 대중적 지지를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사회주의자들은 기존의 국가 기구---정부, 행정기관, 사법부, 경찰, 군대, 감옥---가 사용자 계급의 힘을 제한하는 법을 시행하게 함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기존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실력 행사없이 사회주의가 도입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보통 개량주의라고 하는 것인데, 가끔 수정주의(왜냐하면 그것이 마르크스의 이념을 완전히 수정했기 때문에), 혹은 사회민주주의(1914년까지 이 용어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뜻했지만), 혹은 유로코뮤니즘(서구 공산당들의 정치 노선으로서, 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통해서 권력을 장악하는 노선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이라고 하기도 한다. 동구권에서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대중의 저항으로 무너진 뒤에 이러한 개량주의 노선은 더욱 널리 퍼지고 있다.
개량주의는 얼핏 보기에 매우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그리고 신문과 텔레지변에서 들어 온 바---국민의 민주적 의사에 따라 선출된 국회의원이 국민을 대표하고, 의회가 국정을 운영한다는 것---와도 들어맞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를 통해 사회주의를 도입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나 왔다. 이리하여 전후(제2차세계대전 후) 영국에서는 세 차례의 노동당 정부가 구성되었지만---1945년과 1966년에는 압도 다수로---오히려 1945년보다 사회주의에 더 근접하지 못했다.
다른 나라의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1970년에 칠레에서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사람들은 이것이 "사회주의로 가는 새로운 길"이라고 주장했다. 3년 뒤 아옌데 정부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은 군 장성들이 아옌데 정부를 전복해 버렸고, 칠레 노동계급 운동은 분쇄되었다.
개량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상호 연관된 이유가 있다.
첫째,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사회주의자들이 '점진적'으로 사회주의적 조치들을 도입하고 있는 동안에, 실질적은 경제력은 여전히 구 지배계급의 수중에 있다. 구 지배계급은 이러한 경제력을 사용하여 전(全) 산업 부문의 조업을 중단시킬 수도 있고, 실업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투기와 매점을 통해서 물가를 상승시킬 수도 있고, 돈을 해외로 빼돌려 국제 수지의 위기를 조장할 수도 있으며, 언론을 통하여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사회주의 정부에 돌리는 선전전을 시도할 수도 있다.
이리하여 1964년과 1966년에 해럴드 윌슨의 영국 노동장 정부는---부유한 사람들이나 기업들이 대규모로 해외로 돈을 빼돌림으로써---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여러 조치들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럴드 윌슨 자신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햇다. "우리는, 우리가 선거 공약으로 제시한 정책이 실행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국제 투기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여왕의 최고 각료인 수상은, 영구의 선거는 촌극이며 영국 국민은 정책을 선택할 수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의회민주주의에 종말을 고하도록 요구 받고 있었다."
윌슨의 의심스러운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6년 동안 그는 실제로 투기꾼들이 요구하는 종류의 정책을 추구했다는 사실이 첨가될 필요가 있다.
똑같이 고의적인 방법으로 (국내외 자본가들의 농간으로)국제 수지 위기가 조성됨으로써, 1974년에 선출된 노동당 정부는 병원, 학교, 사회 복지에 대한 공공 지출을 잇달아 세 차례나 삭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칠레의 아옌데 정부는 대기업들의 훨씬 더 커다란 붕괴 공작에 부딪혔다. "기업주들의 파업"으로 전 산업 부문의 조업이 두 번씩이나 중단되었고, 한편으로는 투기 때문에 물가가 엄청난 수준으로 폭등했으며, 상업 자본가들의 매점매석으로 생활 필수품을 구입하기 위한 줄서기 소동이 벌어졌다.
자본주의가 점진적으로 개혁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기존 국가기구가 '중립적'이 아니라 최상부에서 최하부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국가는 거의 모든, 물리력 행사 수단, 그러니까 폭력 수단을 장악하고 있다. 만약 국가 조직들이 중립적이라면, 그리하여 특정 정부가 국가 조직들에게 명하는 바를 무엇이든(사회주의적 정책이건 자본주의적 정책이건 관계없이 무엇이든) 수행한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국가는 대기업의 경제 방해 책동(자본 사보타지)을 중지시키는 데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 기구가 작동하는 방식과 명령을 실제로 누가 내리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 국가 기구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가 기구는 단지 정부만이 아니다. 국가 기구 혹은 기관은 다른 많은 부속 기관---경찰, 군대, 사법부, 공무원, 국유화한 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가진 거대한 조직체이다. 국가의 이러한 다른 부속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노동계급이다. 그들도 노동자들처럼 살고, 임금을 받는다.
그러나,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아니다. 사병은 어느 전장에서 싸우게 되는지, 혹은 파업을 분쇄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지 못한다.
사회보장국에 있는 창구 직원은 실업 수당으로 얼마가 지불될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지 못한다. 국가 기관 전체는 상명하달의 관료제적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은 물리력을 행사하는 국가 기구들---육·해·공군과 경찰---에 특히 맞는 얘기이다. 사병들이 무기를 다루는 것을 허락받기 훨씬 전에, 즉 군에 입대할 때 민처음 배우는 것이 그들의 개인적 의사와 관계없이 무조건 명령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불합리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배운다. 사병들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연병장에서 어처구니 없는 명령에 따른다면, 그들은 발포 명령을 받았을 때도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발포할 것이다.
어느 군대에서건 가장 "악질적"이라고 여겨지는 "범죄"는 명령 불복종---하극상---이다. 이 "죄"는 아주 중대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전시에 명령 불복종은 아직도 영국에서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누가 명령을 내리는가?
영국 군대의 명령 계통을 보면(다른 나라 군대도 마찬가지이다), 사단장-여단장-연대장-대위-하사관-사병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명령 계통의 어떤 단계에서도 선출된 국민의 대표---국회의원이나 지방 의회 의원---들이 끼어들지 못한다. 일단의 사병들이 장교의 명령이 아니라 국회의원의 명령에 따르는 것도 불복종이 된다.
군대는 대량 학살 기구이다. 군대를 지휘하고 다른 군인들을 자신들 곁의 지휘관으로 승진시키는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장성들이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장성들은 선출된 정부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나, 사병들은 정치인들이 아닌 장성들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련된다. 만약 장성들이 선출된 정부의 의사에 거스르는 명령을 사병들에게 내린다면, 정부는 그러한 명령을 뒤집을 수가 없다. 정부는 단지 장성들이 마음을 돌리도록 설득을 시도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정부가 장성들이 내리는 명령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 하는 것을 안다고 해도 군대의 일은 언제나 비밀이기 때문에, 장성들이 자기들이 싫어하는 정부에게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숨기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이것은 장성들이 언제나 혹은 보통, 정부가 자기들에게 말하는 바를 무시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는 보통, 장성들이 정부 제안의 대부분에 대해서 협조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생사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는 장성들은 정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자기들의 학살 기구인 군대를 움직일 수 있고, 이러한 행위에 대해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것이 칠레에서 아옌데가 전복될 때 실제로 장성들이 행했던 바다.
그래서 '누가 군대를 이끄는가?' 하는 문제는 실제로 '누가 장성들인가?' 하는 문제가 된다. 영국에서는 고급 장교의 약 80%가 비싼 수업료를 내는 "일류" 학교에 다녔다. 이것은 50년 전과 같은 비율이다(노동당 정부가 총 17년 동안 집권했어도 이것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했다). 고급 장교들은 대기업 소유주들과 친분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호화 사교 클럽에 속해 있고, 유사한 사회적 기능을 하며 어울리고, 같은 관념을 공유하고 있다(만약 의심이 간다면 『데일리 텔리그래프』의 거의 모든 호에 실려 있는 독자 투고란을 보시오). 고급 공무원, 검사, 법관 및 경찰 수뇌들도 마찬가지이다.
330명의 하원 의원들이 지지했다는 것만으로, 대기업에 있는 자신의 친구와 친척들로부터 경제력을 빼앗으라는 정부의 명령에 그들(장성, 고급 공무원, 검찰, 법관, 경찰 수뇌 등)이 복종하리라고 생각하는가? 3년 동안 정부의 명령을 사보타지하다가, 때가 무르익었을 때 아옌데 정부를 타도해 버린 칠레의 장성, 법관, 고급 공무원의 사례를 그들이 재현하는 게 오히려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실제로 영구의 헌법은, 국가 기구를 통제하는 사람들이 국가 기구를 물리적으로 타도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선거로 수립된 좌익 정부의 의지를 꺾어 놓을 수 있는 경우를 함축하고 있다. 만일 좌익 정부가 선출된다면, 그 정부는 고용주 계급의 대규모 경제 사보타지(공장 폐쇄, 자본의 해외 도피, 생활 필수품의 매점·매석, 물가 인상 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만약 정부가 "합헌적" 수단---법률의 통과---을 사용하여 그러한 방해 공작에 대처하려 한다면, 정부는 자기 등 뒤로 손이 묶여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상원은 그러한 법안의 처리를 최소한 9개월 동안 지체시킴으로써 법안의 비준을 거부할 것이며, 법관들은 통과된 법이 어떤 법이든 간에, 법적 실효성을 줄이도록 하는 방식으로 그 법을 해석할 것이다. 고급 공무원, 군 장성과 경찰 수뇌들은, 정부 각료들이 자기들에게 지시하는 것을 수행하기 싫어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원과 법관들의 결정을 이용하고자 할 것이다. 그들은 정부가 "불법적"으로, 그리고 "위헌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칠, 거의 모든 언론 기관들의 후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군 장성들은 "불법적"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준비를 정당화하는 데 그러한 언론의 말들을 이용할 것이다.
정부가 실제로 위헌적인 방법으로---법률 제정을 통해서 만든 정책으로가 아니라---직접 행동하여 말단 공무원들, 말단 경찰들, 사병들에게 자신들의 상관에게 대항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면, 경제적 혼란에 대처하는 데 무력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것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공상이라고 넘겨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최근의 영국 역사에서 군 장성들이 그들이 싫어한 정부 결정들을 거부했던 사례가 적어도 두 번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1912년 하원은 통일된 아일랜드를 통치할 아일랜드 자치론을 규정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보수당 당수인 보너 로(Bonar Law)는 자유당 정부를 "헌법을 팔아먹은 불법적인 혁명 정부"라고 즉각 탄핵했다. 상원은 당연히 아일랜드 자치법 처리를 될 수 있는 대로 오랫동안(2년) 미루어 놓았다. 그 동안 전(前) 보수당 각료인 에드워드 카슨(Edward Carson)은 그 법에 저항하기 위해 아일랜드 북부에 준군사적인 세력들을 조직했다.
자유당 정부가 아일랜드에 주둔한 영국군을 지휘하는 군 장성들에게 군대를 북부로 이동시켜 이러한 준군사적인 세력에 대처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들은 명령을 거부하고 직위를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아일랜드가 1914년 남북 단일 의회를 구성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것은, 보통 "커러 항명 사건"(커러 curragh는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버드나무 가지로 짜서 짐승 가죽 등을 씌운 작은 배를 가리킨다---옮긴이)이라고 하는 이러한 사보타지 행위 때문이었다.
1974년에는, 1912년 사건의 축소판이 재현되었다. 북아일랜드 극우 세력인 왕당파는 북아일랜드의 신구교 연립 정부안을 수락하도록 강요당한 데 반발하여, 바리케이드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일하러 가지 못하도록 "총파업"을 조직했다. 영국 정부 각료들은 영국군과 북아일랜드 경찰인 왕립 얼스터 경찰대(Royal Ulster Constabulary)에 바리케이드를 철거하고 파업을 종식시키라고 지시했다. 군 고급 장교들과 경찰 간부들은 영국 정부에게 그러한 지시는 어리석어 군인도 경찰도 왕당파에 대항하는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신구교 연립 정부는 퇴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리하여 군부 고급 장교들의 견해가 영국 정부의 견해보다 더 강력한 것이라는 점을 입증했다.
1914년과 1974년에 온건한 정책을 추진하려 한 중도파 정부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데, 만약 전투적인 사회주의 정부가 선거로 들어섰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지 상상해 보시오.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어떤 진지한 개량주의자도 곧 선택의 기로에 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산업체를 소유하고 있으며 국가의 핵심적인 자리를 통제하고 있는 사람들을 무마하기 위해 개혁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그러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 모종의 실력 행사가 불가피할 전면적인 투쟁을 준비하든지, 양자택일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개량주의가 가망이 없는 세 번째 이유는, 의회민주주의가 어떤 혁명 운동도 의회민주주의를 통해 표출되지 못하게 하는 구조적 메커니즘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개량주의자들은 국가 기관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 사람들의 권력에 도전하는 최선의 길이 우선 좌익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의회란 항상 민중의 혁명 의식 수준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전혀 실현성 없는 공문구일 뿐이다.
민중은, 투쟁을 통하여 실제로 사회를 바꾸기 시작할 때에야 자기들 자신이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 이념이 갑자기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는 때는 수백만 인민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총파업에 참여하고 있을 때이다.
그러나, 그러한 수준의 투쟁은 구 지배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지 않는 한 무한정 유지될 수는 없다. 지배계급이 반격 기회를 노린다면, 그들은 공장 점거나 파업이 쇠퇴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군대와 경찰에 대한 통제력을 사용하여 투쟁을 분쇄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 파업 또는 점거가 비틀거리기 시작하면, 노동자들 내부의 단결과 자신감도 떨어지기 시작한다. 사기가 저하되고 쓰라린 감정이 스며든다. 심지어 가장 우수한 노동자조차도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일이 무모한 꿈이었을 뿐이라고 느끼기 시작한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의 주장을 들을 수 있는 대중 집회에서 단결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 혼자 집에 있으면서 텔레비젼과 신문의 관념에 빠져들고 있을 때, 파업 찬반 투표가 치러지기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
반(反)노동조합 법률에는 거의 언제나 빠짐없이, 노동자들의 비밀 우편 투표가 진행되는 사이에 파업을 중지하도록 강요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또한 그 때문이다. 그러한 조항들은 정확하게는 "냉각기"라고 부르는데, 노동자들의 단결과 자신감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의회 선거제는 제도화한 비밀 투표와 냉각기를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어떤 정부가 막강한 파업에 굴복하게 될 때, 정부는 "좋습니다. 총선이 그 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해 줄 때까지 3주만 기다리십시오" 이렇게 말한다. 정부는 그 사이에 파업이 중지되길 바란다. 그러면 노동자들의 단결력과 자신감은 점점 사라져 갈 것이다. 고용주들이 전투적 노동자들의 블랙 리스트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자본가 언론과 텔레비젼은 다시 정상적으로 움직여 집집마다 친정부적 관념을 주입시키기 시작할 수 잇다. 경찰은 "말썽을 일으키는" 노동자들을 구속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마침내 선거가 치러질 때, 투표는 노동자 투쟁의 '높은 수준'이 아니라 파업 후 '사그러들은 분위기'를 반영할 것이다.
1968년 프랑스에서 드골 정부는 정확히 이러한 방식으로 선거를 이용했다. 개량주의적 노동자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은 노동자들한테 파업을 끝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드골은 선거에서 승리했다.
에드워드 히드 영국 수상은 1974년에 크게 성공한 광부 파업을 맞아 똑같은 속임수를 쓰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광부들이 속지 않았다. 그들은 파업을 계속했고, 히드 수상은 선거에서 졌다.
만약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의 핵심 문제들을 선거가 결정해 주기를 기다린다면, 그들은 그러한 높은 투쟁 수준에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 국가
『프랑스 내전』이라는 소책자에서 마르크스는, 그리고 『국가와 혁명』이라는 소책자에서 레닌은, 사회주의가 어떻게 쟁취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개량주의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개괄해서 밝혔다. 그들의 생각들이 단순히 가벼운 태도에서 비롯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두 사람 다 노동계급이 행동하는 것을 봄으로써 자신들의 견해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즉, 마르크스는 파리꼬뮌을 보았고, 레닌은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를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레닌은 노동계급이 우선 관료 위계 체제에 바탕을 두는 옛 국가를 파괴한 다음에, 전적으로 새로운 원리에 바탕을 두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을 때에야 비로소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시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새로운 국가를 "꼬뮌국가" 또는 "국가 아닌 국가"라고 부름으로써 새로운 국가가 옛 국가와 얼마나 완전히 달라야 하는가 하는 것을 강조했다.
노동계급이 구 지배계급 잔당들한테 '명령'을 부과하려면 새로운 국가가 필요하다고 마르크스와 레닌은 말했다. 그것이 마르크스와 레닌이 새로운 국가를 "프롤레타리아독재"라고 부른 이유였다. 그러니까 노동계급은 사회가 어떻게 운영돼 나가야 하는거 하는 것을 '명령'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국가는 세계의 다른 지역의 지배계급들의 공격에 맞서서 혁명을 방어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일을 해내기 위해서 새로운 국가는 자기 자신의 무장 군대, 치안 유지 기관, 재판소와 심지어 감옥까지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새로운 군대, 경찰과 사법체계를 노동자들이 통제하고, 노동자들의 이익에 거스르는 방향으로 돌아서지 않게 하려면, 새로운 국가는 자본가 국가와는 완전히 다른 원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새로운 국가는 노동계급 다수의 뜻을 거역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수단이 아니라, (다수로서)노동계급이 사회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명령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주된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자본가 국가는 사회의 소수의 이익에 봉사한다. 노동자 국가는 압도 다수의 이익에 봉사해야 한다. 자본가 국가의 폭력은, 사회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고급 장교들에게 복종하도록 훈련받은, 소수의 살인 청부업자들을 통해 행사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 국가에서는 구 특권 계급의 잔재 세력들의 반사회적 행위에 대항해 다수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데만 강제력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 국가에서 국방과 치안 유지는 일반 노동자들이 수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반 노동자들은 자신의 동료 노동자들과 자유로이 어울리고, 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며, 같은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군인과 경찰 집단이 노동자 대중과 결코 분리될 수 없도록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서는 군인과 경찰은 치안유지 임무와 직책을 윤번제로 교체해 가면서 수행하는 일반 공장 노동자들의 사무직 노동자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군대와 경찰은 소수 집단의 장교들이 이끌어 가지 않고, 노동자 대중이 직접 선출한 대표들이 이끌어 가는 것이다.
자본가 국가에서는 의회 대표(국회의원)들이 법률을 통과시키기는 하지만, 그 법률을 집행하는 것은 관료, 경찰 고위 간부와 검사들 및 법관들의 일이다. 이것은 국회의원과 지방 의회 의원들이 그들의 약속(정강과 선거 공약)이 이행되지 않을 때 언제나 수많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발뺌할 수 있게 한다. 노동자 국가의 노동자 대표들은 법률이 집행되는가 하는 것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고위 엘리트 관료가 아닌 노동자 대표들이, 행정 사무를 보는 노동자들과 군대 등한테, 일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입법과 행정의 통합을 말한다---옮긴이). 여기서도 선출된 노동자 대표들은 법정에서 법률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자본가 국가의 의회 대표들은 높은 봉급을 받음으로써 자신들을 선출한 사람들과 구분된다. 노동자 국가에서 노동자 대표들은 평균적인 노동자들의 임금 만큼만 받아야할 것이다. 노동자 대표들의 결정을 수행햐는 요직에서 상근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자 대표들과 노동자들의 결정을 집행하는 일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자본가 국가의 국회의원처럼 5년 동안(혹은 고급 공무원의 경우 평생 동안) 그 자리에서 해임되지 않는 식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동자 대표들은 적어도 해마다 선거를 통해 민중의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며, 만약 그들이 노동자들의 요망 사항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자기들을 선출한 노동자들에 의해 언제든지 즉각 소환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가 국가의 의회 대표들은 일정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상층 계급, 중간 계급, 노동 계급, 빈민가 세입자는 물론 집주인, 육체 노동자는 물론 증권거래인 등---의 손으로 선출된다. 노동자 국가에서는 선거가 오직 노동하는 사람들(근로 인민 대중)의 손으로, 현안 문제들에 관해 정치적 다원주의에 바탕을 두고 공개 토론을 벌인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래서 노동자 국가의 핵심은 공장, 광산, 부두, 큰 사무실에 바탕을 둔 노동자 평의회가 될 것이며, 여기에 주부, 연금 생활자, 중고등 학생 및 대학생과 같은 집단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가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노동계급의 각 계층은 다당제에 바탕을 두고 자기들의 대표를 가질 것이며, 자기들의 대표자가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했는지 아닌지 직접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국가는, 대다수 노동계급과 분리되어 그들에게 거스르는 힘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공산주의" 국가를 자칭했던 동류럽 국가들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되어 있었다.
동시에 노동자 평의회 체제는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자기들의 공장을 운영하는 수단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결정된 전국적 계획에 따라 산업을 운영하려는 노동자들의 노력을 통합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현대의 컴퓨터 과학 덕택으로 모든 노동자들은 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경제적 대안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노동자 다수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 바---예컨대, 핵무기와 군수 산업에 자원을 낭비할 것인가 혹은 값싸고 믿을 만한 공공 교통 체계에 자원을 쓸 것인가, 사치품을 만들 것인가 혹은 학교와 병원을 지을 것인가---를 자기들의 대표가 선택하도록 지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국가의 사멸
새로운 국가 권력은 노동자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보다는 강제성이 훨씬 덜 문제가 될 것이다. 새로운 국가 권력이 통제할 구사회의 잔재들이 혁명의 성공에 머리를 숙이고 여러 혁명들이 외국의 지배계급들을 타도함에 따라, 강제력은 점점 덜 필요하게 될 것이며, 마침내는 노동자들이 경찰과 군대 일을 보기 위해 일자리를 비울 필요가 없을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가는 사멸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뜻했던 바이다. 국가는 사람들한테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고, 그 대신 재화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노동자 평의회의 단순한 하나의 기구가 될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는 자본주의에서 여러 계급 사이의 투쟁이 실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을 때마다 이러저러한 형태로 생겨났다. "소비에트"란 러시아인들이 1905년과 1917년의 노동자 평의회를 부르기 위해 사용했던 단어이다.
1918년 독일에서는 노동자 평의회가 간단히 말해 유일한 권력이었다. 1936년 스페인에서는 다양한 노동자 정당들과 다양한 노동조합들이, 지방 치안과 행정을 맡았고 노동자 평의회와 아주 비슷한 민병대 위원회(militia committees)로 통일되어 있었다. 1956년 헝가리에서 노동자들이 소련 군대와 싸울 때, 공장과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맡기 위해 평의회를 구성했다. 1972~73년 첼레에서는 "꼬르돈"(cordones)---대공장들을 연결한 노동자 위원회---이라는 노동 권력 기관을 만든 바 있다.
노동자 평의회는 처음에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활용하는 기구로서 시작된다. 노동자 평의회는 파업 기금을 모으는 것과 같은 아주 평범한 기능들로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관들은, 대표자들이 노동자들의 손으로 직접 선출되고 소환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투쟁이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전체 노동계급의 노력을 수렴할 수 있다. 노동자 평의회는 노동자 권력(workders' power)의 기초를 놓을 수 있는 것이다.
9 노동자는 어떻게 혁명적으로 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거리에 나가서 지나가는 노동자들한테 혁명을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이 어떤 대답을 듣게 될지 뻔하다. 당신더러 미쳤다고 얘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마도 당신의 질문이 기가 막힌다고 여길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이러한 무관심 혹은 반대는 별로 놀랄 일이 못된다.
우리가 자라난 곳은, 모든 사람이 이기적인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특권을 가진 소수층만이 국가와 산업의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신문과 텔레비젼이 계속해서 국민들한테 떠들고 있으며, 학교 입학 첫날부터 '선배와 손윗사람'의 명령에 따르도록 가르침을 받아 온 노동자 대중이 있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어느 사회에서--옮긴이)지배 사상은 지배 계급의 사상"인데, 상당히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지배계급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노동계급의 혁명 운동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뒤흔들어 놓는 일이 거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1871년 프랑스에서(파리꼬뮌--옮긴이), 1917년 러시아에서(러시아혁명--옮긴이), 1919년 헝가리와 독일에서(헝가리 및 독일 소비에트 혁명--옮긴이), 1920년 이태리에서(토리노 공장 점거운동--옮긴이), 1936년 스페인(프랑코 파시스트들에 대항한 스페인 내전--옮긴이)과 프랑스(프랑스 민중전선 정부 하의 총파업--옮긴이)에서, 1956년 헝가리에서(부다페스트 봉기--옮긴이), 1968년 프랑스에서(5월혁명--옮긴이), 1972~73년 칠레에서(아옌데 정권을 전복하려는 피노체트 군부에 대항하는 투쟁--옮긴이), 1975년 포르투갈에서(스피놀라 군부에 반대하는 투쟁--옮긴이), 1979년 이란에서(반팔레비혁명의 좌익--옮긴이) 노동계급은 나라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들 봉기가 일어난 이유는 자본주의의 본질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공황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는 체제이다. 결국, 자본주의는 완전 고용을 성취할 수 없고 모든 사람에게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자본주의가 내일 가져올 위기로부터 오늘 우리의 생활수준을 지켜줄 수도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호황기 동안에 노동자들은 이러한 것들(완전 고용, 번영, 안정된 생활 수준 등)을 기대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컨대,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영국 노동자들은 영구적 완전 고용, "복지 국가", 점진적이지만 실질적인 생활 수준개선을 기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난 20년에 걸쳐서 잇달아 집권한 정부들은, 실업자를 400만 명까지 증가시켰고, "복지 국가"를 갈갈이 날려 버렸으며, 생활 수준을 자꾸 낮추려 해 왔다.
우리는 많은 자본주의적 이념들(즉,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도록 세뇌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념적)공격 가운데 어떤 것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불가피하게 찾아온다. 갑자기,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때에, 노동자들의 분노는 갑자기 불타올라 그들은 고용주와 정부에 반대하여 어떤 행동을 하게 된다. 아마도 그들은 파업을 하거나 시위를 벌일 것이다.
좋든 싫든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 때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이제까지 받아들여 온 모든 자본가적 관념과는 모순되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은 자본가 계급의 대표들에 반대하여, 하나의 계급으로서 상호 연대하여 행동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이 감당할 수 없어 거부하곤 했던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이 이제 노동자들이 하는 행동과 일치되기 시작한다. 물론, 그러한 사상들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정도는, 노동자들의 머리 속에서 싹트기 시작하는 의식 수준이 아니라 투쟁의 규모에 따라서 결정된다. 처음에는 비록 자본주의적 이념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투쟁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이념을 의심하게 한다.
자본가의 힘은 다음 두 개의 지주, 그러니까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와 국가에 대한 통제에 의존하고 있다. 진정한 혁명 운동은, 당면한 경제적 요구를 위한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의 투쟁이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 지배의 두 지주와 충돌할 때 시작된다.
수년간 같은 공장에 고용되어 있던 일단의 노동자들을 예로 들어 보자. 이 노동자들의 단조로운 일상 생활 패턴 전체는 공장에서 그들이 맡은 직무에 따라 결정된다. 어느날 그 공장 기업주는 공장문을 닫겠다고 발표한다. 노동자들 가운데 자본가 편에 섰던 보수주의자들조차도 반감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그들로 하여금 기대하게 만든 수준의 생활을 계속하는 유일한 길은 공장을 점거하는 것---생산수단에 대한 기업주의 지배에 도전하는 것---뿐이라고 결정한다.
기업주가 '자신의' 재산권을 되돌려 달라고 경찰을 불러들이게 되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국가와도 대결하고 있음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은 이제 기업주는 물론 국가기구인 경찰과도 맞서야만 자신들의 일자리를 지킬 기회를 갖게 될 것임을 인식한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스스로 가르쳐 온 이념과 정반대 이념을 노동자들의 마음 속에 받아들이게 하는, 계급 투쟁 조건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러한 점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들한테 주입한 자본주의적 이념을 대부분의 노동자가 상당 기간 동안 받아들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수백만 노동자들 사이에서 혁명적인 분위기가 주기적으로 고조되어 온 것이 자본주의 역사의 특징이었음을 설명해 준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점이 있다. 많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혁명적 이념을 지지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가장 커다른 것들 가운데 하나는, 다른 노동자들이 결코 혁명적 이념들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스스로 어떤 일을 해봤자 소용없다는 느낌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노동자들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 노동자들은 돌연 자신들이 갖고 있던 무관심을 내팽개치게 된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존 사회에 대항하는 대규모 투쟁 과정을 통해 알게 될 때, 별안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일단 혁명 운동이 시작되면, 그것이 놀라운 속도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0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전제는 자본주의의 발전 그 자체가 노동자들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반란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한 반란이 일어날 때---대중 시위이든 무장 봉기이든 혹은 총파업이든---노동자 계급의 의식 변화는 놀랍다. 이전까지 오만가지 일로 산만해져 있던---고스톱 치는(원문에는 대마초 피우는 일로 되어 있음--옮긴이) 것에서부터 텔레비젼을 보는 것까지---노동자의 정신적 에너지가,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는 데로 급격히 모아진다. 그러한 문제와 씨름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은 놀라운 천재적인 해결 방안을 만들어 내는데, 마치 사태의 진전에 지배계급이 당황해 하는 것처럼, 이 해결 방안은 기존 혁명가들도 당황하게 한다.
그리하여, 예컨대,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에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 조직인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가 인쇄공 파업 기간 동안에 세워진 파업위원회로부터 발전했다. 처음에는 볼셰비키당---혁명적 사회주의자 가운데서도 가장 전투적인---도 소비에트를 불신했다. 다시 말해서, 볼셰비키들은 이전까지 비정치적이었던 노동자 대중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기구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그러한 경험은 많은 파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기존의 투사들은 자신들의 충고를 그렇게 오랫 동안 무시해 온 노동자들이 갑자기 스스로 전투적 행동을 조직하기 시작할 때 완전히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러한 자발성은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발성만 믿고---무정부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 아류와 같이---혁명 정당이 필요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잘못이다.
혁명적 상황에서는 수백만의 노동자들은 실로 대단히 빠르게 자신들의 관념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관념 구석구석을 한꺼번에 모두 바꾸지는 못한다. 모든 파업, 모든 시위, 모든 봉기의 내면에는 언제나 계속되는 찬반 양론이 있다. 어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취하고 있는 행동이 노동자 계급의 사회 운영을 위한 서곡이라고 볼 것이다. 또 다른 노동자들은 무언가 행동을 취하는 것이 '사물의 자연적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보기 때문에 결국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다. 중도적인 노동자들은 찬반 양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현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제도 언론을 동원하여, 행동하는 측의 노동자를 비난하면서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지원할 것이다. 지배계급은 또한 경찰이건, 군대건, 우익 조직이건 가리지 않고 파업 파괴를 위한 물리력을 동원할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측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의 계급투쟁에서 교훈을 이끌어 내고 찬반 양측 주장에 대해 사회주의에 관한 주장을 옹호할 수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이 있어야만 한다. 투쟁 속에서 심화되는 노동자들의 각성을 함께 이끌어 갈 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만 하며, 그럴 때에만 노동자들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함께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은 투쟁이 시작되기 이전에 존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조직은 자연발생적으로 탄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은 사회주의 이념과 계급투쟁 경험이 계속 상호작용하는 것을 통해서 건설된다. 단순히 사회를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사회주의 이념들을 일상적인 계급투쟁, 즉 파업, 시위, 캠페인 등에 적용함으로써만 노동자들은 사물을 변화시키기 위한 힘을 의식할 수 있으며, 변화에 대한 믿음을 얻을 것이다.
어떤 순간에는 사회주의자 당의 개입은 결정적일 수 있다. 즉, 변화를 추구하고, 혁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하며, 사회주의 사회를 향해 나아가려는 노동계급이 승리하도록 계급투쟁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정당인가?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은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 당의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당은 계속해서 계급투쟁과 관련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의 당원들과 당의 지지자들과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당 지도부는 언제나 투쟁의 집단적인 경험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민주적일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러한 민주주의는 선거 제도만이 아니라 당내의 끊임없는 토론---당이 바탕을 두고 있는 사회주의 이념과 계급투쟁 경험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은 또한 중앙집중화해야 한다. 왜냐하면, 혁명적 사회주의 당은 토론 모임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당이기 때문이다. 당은 계급투쟁에 집단적으로 개입할 수 있어야하고, 재빠르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하며, 당의 이름으로 일상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도부를 가져야 한다.
예컨대, 정부가 파업 자위대 연행을 명령한다면 당은, 민주적 결정을 우선시하여 회의를 소집할 필요 없이, 즉각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결정은 중앙이 내리고 집행한다. 민주주의는 그 결정이 올바른 것이었느냐 아니었느냐 하는 것을 밝힐 때 사후에 발휘된다. 만약 중앙의 결정이 투쟁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면 당 지도부를 갈아치울 수도 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은 민주주의와 중앙집중제 사이의 섬세하고 정교한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당은 자기를 위햐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통해서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계급의 투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투쟁에 적응하도록 해야 한다. 투쟁 수준이 낮고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노동자들이 거의 없을 때, 당은 왜소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규모에 만족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원을 늘리기 위해서 정치적 이념을 희석시키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유해하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쟁이 상승할 때, 상당히 많은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관념을 급속히 바꿀 수 있고, 그리하여 투쟁을 통해 자신들이 사물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때, 당은 문호를 개방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당은 방관자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당이 (노동)계급을 대신할 수는 없다. 당은, 계급의식이 가장 투철한 노동자들이 투쟁의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그들을 통일키시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계급투쟁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또한, 당이 (노동)계급한테 명령할 수도 없다. 당이 스스로를 지도부라고 단순히 선언할 수 없다. 즉, 당은 실천---작은 파업에서 혁명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이든---속에서 사회주의 이념의 정확성을 입증함으로써 그러한 위치를 확보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이 사회주의를 가져온다고 여기고 있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이 부를 생산하는 생산수단을 스스로 통제하고 이러한 통제력을 사회 변혁을 위해 사용할 때에만 올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바다 한가운데에 사회주의라는 섬을 건설 할 수는 없다. 스스로를 고립시켜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자신들의 삶을 살고자 했던 여러 소집단들의 시도는 결국 언제나 비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경제적·이데올로기적 압력이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집단들은 스스로를 자본주의로부터 고립시킴으로써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인 노동자 계급으로부터도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가 사회를 타락시키면서 낳은 결과---인종 차별, 성 차별, 착취, 야만 행위---에 맞서서 날마다 투쟁한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계급의 힘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11 제국주의와 민족해방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틀어 사용자 계급은 언제나 부를 추가로 얻는 원천---다른 나라에서 생산된 부의 탈취---에 눈을 돌려왔다.
중세 말기에 자본주의의 최초 형태가 성장함과 동시에 서구 국가들이 광범한 식민 제국을 침탈했다. 그래서 스페인 제국, 포르투갈 제국, 네덜란드와 프랑스 제국, 대영 제국이 등장했다. 지금은 가끔 "제3세계"라고 부르는 곳(아프리카,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사회 전체가 파괴되었던 반면, 서유럽 지배계급 수중에는 부가 쏟아졌다.
이런 식으로, 16세기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하고나서 유럽에 금이 대량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아메리카 사회 전체는 파괴되었고 아메리카에 살던 모든 민족들은 노예가 되었다. 예컨대, 콜롬버스가 최초로 정착지를 세운 아이티에서는 토착 원주민인 하라와크 인디언(전부 합해서 50만 명 정도)이 겨우 두 세대만에 씨가 말랐다. 멕시코의 원주민 인구는 1520년 2천만 명에서 1607년 2백만 명으로 줄었다.
서인도제도와 아메리카 대륙 일부의 원주민 인구의 감소는 아프리카에서 잡혀서 지긋지긋한 조건 속에서 대서양을 건너 수송된 노예들로 메워졌다. 대서양을 건너면서 약 900만 명의 노예가 수송도중에 죽었고, 대략 1500만 명의 노예가 살아남았다. 절반 정도의 노예가 영국 배로 수송되었는데, 그것은 영국 자본주의가 산업발전의 선두 주자가 될 수 있었던 한 이유였다.
노예 무역으로 벌어들인 부는 산업의 재원(財原)이 되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브리스톨(Bristol: 영국 서남부의 항구 도시--옮긴이)의 성벽은 흑인들의 피로 얼룩져 있다"고 한다. 이런 얘기는 다른 항구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얘기였다. 칼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서 임금 노동자를 속박하는 은폐된 노예제는 그 토대로서 신세계(아메리카 대륙)에서 노골적인 노예제를 필요로 했다."
영국이 인도를 정복했을 때처럼, 노예 무역은 노골적인 약탈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벵골(인도의 도시: 지금은 방글라데시 지역--옮긴이)은 최초의 영국인 방문객들이 그 문명의 훌륭함에 깜짝 놀랄 정도로 발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는 벵골에 오래 남아 있지 못했다. 맥콜리(Macauley) 경이 정복자 클라이브(Clive)의 전기에서 썼던 바와 같이, "거대한 인구가 희생양 신세로 내몰렸다. 이리하여 엄청난 부가 캘커타에 쌓였다. 반면에, 3천만의 인간이 무지무지하게 비참한 상태로 떨어졌다. 그들은 학정에 시달리며 사는데 익숙해 있었지만, 이런 학정에 시달린 적은 결코 없었다."
그때부터 벵골은 부유함으로 유명해진 게 아니라, 몇 년 마다 수백만 명이 기근으로 굶어죽는 가혹한 빈곤,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가난으로 유명해졌다. 그 동안 영국의 총 투자 자본이 겨우 6~7백만 파운드밖에 안 되었던 1760년대에 인도에서 영국으로 해마다 강제징발된 공물은 2백만 파운드나 되었다.
영국의 가장 오래된 식민지인 아일랜드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떨어졌다. 대기근이 찾아들어 아일랜드 인구가 기아와 이민으로 반으로 줄어든 1840년대말에, 영국 지주 부르주아지들은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를 먹여살리기에 충분하도고 남을 만큼의 식량을 아일랜드 지대로 가져갔다.
오늘날에는 세계를 보통 "선진국"과 "발전도상국"으로 나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발전도상국들이 수백 년 동안 더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선진국과 같은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구 국가들이 "발전"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나머지 국가들이 부를 강탈당하고 퇴보를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발전도상국의 많은 사람들이 300년 전에 비해 오늘날 더 가난하게 살고 있다.
마이클 배럿 브라운(Michael Barret Brown)에 따르면, "인도와 중국뿐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저발전 국가들의 국민들이 오늘날 소유하고 있는 1인당 부는 17세기에는 유럽보다 높았지만, 서유럽에서 부가 증가함에 따라 그 이하로 떨어졌다."
영국은 하나의 제국(empire)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최초의 공업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영국은 세계의 3분의 1에 달하는 자기 제국 안에 있는 원료, 시장, 이윤이 높은 투자 영역 등에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이 손을 대지 못하게 만들 만한 위치에 있었다.
독일, 일본, 미국과 같은 나라들이 새로운 공업 강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이들 국가들도 이런 이점들(즉, 원료, 시장, 이윤이 높은 투자 영역 등)을 갖고 싶어 했다. 이들 국가는 자기 제국 그러니까 "영향권"(식민지--옮긴이)을 건설했다. 경제 공황에 직면한 주요 자본주의 열강은 서로 상대방 국가의 "영향권"을 침입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는 세계 대전을 불러일으켰다.
세계 대전은 역으로 자본주의의 내부 조직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을 수행하는 수단인 국가는 훨씬 더 중요하게 되었다. 국가는 외국과 벌이는 경쟁과 전쟁에 대비하여 산업을 재조직하기 위해 대기업들과 훨씬 더 긴밀하게 유착했다. 자본주의는 국가 독점 자본주의가 되었다.
제국주의의 발전은 자본가들이 자국 노동계급을 착취할 뿐 아니라 다른 나라를 힘으로 지배하고 그 나라 민중을 착취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는 식민지 국가들의 억압받는 계급의 편에서 보면, 그들이 식민지 내부의 지배계급한테 착취당할 뿐 아니라 외국의 제국주의자들한테도 착취당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중으로 착취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식민지 나라들 내부의 지배계급 가운데 일부도 고통을 받았다. 식민지 지배계급은 자국 민중을 착취할 수 있는 기회가 대부분 제국주의에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식민지 현지 산업의 급속한 발전이 좋은 출세 기회를 제공해 주리라 기대했던 식민지 중간계급들도 고통을 받았다.
지난 70여년 동안, 식민지 국가와 예전에 식민지였던 국가에서 이들 모든 다양한 계급은 제국주의의 영향에 반대하여 떨쳐일어서 왔다. 외국의 제국주의 지배에 대항하여 전인민을 단결시키려는 운동이 발전해 왔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내걸었다.
외국 제국주의 군대의 철수
제국주의 국가간의 식민주 분할 등에 반대하여, 단일한 민족 정부를 중심으로 전민족적인 영토의 통일
외국 지배자들이 강요하는 외국어에 반대하여 일상 생활에서 토착언어 부활
국내에서 생산된 부를 그 나라의 '발전'과 '근대화'를 가져올 국내 산업 확장에 이용
이런 요구들이 중국(1912년: 신해혁명, 1923~1927년: 국민혁명, 1945~1948년: 국공내전), 이란(1905~1912년, 1917~1921년, 1941~1953년), 터키(1차대전 후), 서인도 제도(1920년대 이후), 인도(1920~1948년의 대영 독립 운동), 아프리카(1945년 이후), 베트남(미국이 패퇴한 1975년까지), 그리고 오늘날 남아프리카 등에서 지속적인 혁명 봉기의 요구였다.
이러한 혁명운동은 식민지 상층 계급이나 중간 계급 일부가 주도하곤 했다. 이러한 운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계급이 자국 노동계급은 물론 또 하나의 적과 맞서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른바 "제3세계"의 민족 운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자본가 국가들에 도전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한테 제3세계 민족 운동은 대단히 중요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이 제3세계의 민족 해방 운동과 동맹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하여, 예컨대, 오늘날 영국의 쉘 석유 회사의 노동자는 쉘 석유 회사가 남아프리카에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양도하라고 싸우고 있는 남아프리카의 해방 세력을 자신의 동맹자로 갖고 있는 셈이다. 만약 쉘 석유 회사가 제3세계 해방 운동을 쉽게 저지할 수 있게 되면, 쉘 석유 회사는 영국에서 노동자들의 요구에 맞서는 싸움에서 훨씬 더 강한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제3세계 국가의 민족 해방 운동이 사회주의자 지도부를 갖고 있지 못할 때에도, 그러니까 민족 해방 운동의 지도부가 단순히 외국의 지배를 국내 자본가 계급이나 "국가자본가"(state capitalist) 계급의 지배로 바꿔치기하기만 원한다고 하더라도 적용된다.
그러한 해방 운동을 분쇄하려 하는 제국주의 국가는 서구 노동자 최대의 적이기도 한 바로 그 제국주의 국가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마르크스는 "다른 민족을 억업하는 민족은 그 자신이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고, 레닌이 사회주의자 지도부를 갖지 않았더라도 "제3세계"의 억압받는 인민과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 사이에 동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억압받는 나라의 비사회주의자들이 민족 해방 투쟁을 이끌어 나가는 방향에 동의할 것(노동조합 지도자가 파업을 지도하는 방법에 사회주의자가 반드시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듯이)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민족 해방 투쟁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억압받고 있는 식민지 인민들을 적으로 대하는 그들의 지배계급을 너무나 쉽게 지지하는 셈이 된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는 민족 해방 투쟁이 지도되는 방식을 비판하기에 앞서 무조건적으로 민족 해방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억압받고 있는 나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문제를 그런 수준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언제나 민족 해방 투쟁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펴밝혀야 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트로츠키가 발전시킨 영구혁명론 속에 포함되어 있다. 트로츠키는 중간 계급 혹은 심지어 상층 계급의 사람들이 때떄로 억압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에서 가장 억압당하는 계급이나 집단을 짓누르는 여러 가지 멍에들 가운데 하나라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그러한 운동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상층 계급이나 중간 계급이 그러한 투쟁을 일관성 있게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강력한 대중 투쟁이 외국이 가하는 억압에만 도전하지 않고 가장 심한 억압을 당하는 계급들을 착취하며 살아가려는 그들 자신의 위치에 도전할 경우, 상층 계급이나 중간 계급 사람들은 이러한 대중 투쟁을 용갑하기를 두려워할 것이다.
투쟁이 어떤 일정한 수위에 이르면, 그들은 자기들이 주도하던 투쟁 대열에서 이탈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대중 투쟁을 분쇄하기 위해 외국 지배자들과 손을 잡기도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사회주의자와 노동계급 세력이 민족 해방 투쟁의 지도력을 갖지 못하면, 투쟁은 실패할 것이다.
트로츠키는 또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에서 노동계급은 소수일 뿐이며, 때로는 아주 극소수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은 종종 절대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매우 크고(예컨대, 인도와 중국에서 노동계급은 수천만 명의 숫자를 가진 강력한 세력이다), 또한 그 수에 비하여 그 나라 부의 거대한 몫을 만들어 내며, 그 나라를 지배하는 데 핵심 부분인 도시 지역에 압도적인 숫자가 집중되어 있다. 그리하여 혁명적 격변의 시기에 노동계급은 다른 피억압 계급에 대해 지도력을 가질 수 있고 전국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할 수 있다. 혁명은 민족해방의 요구로 시작되어 사회주의적 요구로 끝을 맺을 때 영속적(permanent)일 수 있다. 억압받는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이 처음부터 독자적인, 계급적 기초 위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할 때에만, 바로 그 때에만---물론 민족 해방을 추구하는 일반적 운동을 지지하면서, 그러나 언제나 중간 계급과 상층 계급의 지도자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경고를 한다면---민족 해방의 요구로 시작되어 사회주의 요구로 끝을 맺는 영구혁명이 완수될 수 있다.(그리고는 사회주의 건설이 시작된다. 물론, 완전한 사회주의는 몇몇 주요 선진국을 포함한 국제적 규모에서만 이룩될 수 있지만, 미해결의 민족·민주적 과제가 노동자 계급이 지도하는 민중 권력---노동자 권력,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수립과 구질서의 철저한 청산을 통해 완결될 수 있따는 점에서 2단계 혁명론인 반제·반봉건 민중민주 "혁명"론 및 반제·반독점 민중민주 "혁명"론과 구별된다. 신흥공업국의 영구혁명 전략은 반국가·반자본 일반인데, 여기서 '반자본 일반'이란 모든 자본을 사회화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이 아니라, 영구혁명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본의 대소를 구별하여 투쟁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럴 경우, 민중 권력 수립 후의 사회화 대상은 일차적으로는 대규모 사유재산 및 생산적인 사유 재산에 한정된다.--옮긴이)
12 마르크스주의와 여권운동(페미니즘)
여성 해방에 대해 지금까지 줄곧 서로 다른 두 가지 접근 방법---'여권운동'(feminism)과 혁명적 사회주의---이 존재해 왔다.
'여성운동'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여성 운동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권운동'은,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억압한다는 관점, 그러니까 남성의 생리 구조와 심리 구조에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대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주장은 오로지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독립함으로써만---"해방된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여권운동'가들이 따로 조직을 만드는 식의 완전 독립이건, 아니면 여성 위원회나 여성 간부 회의, 여성 문제 전담 기구 식의 부분적인 독립이건---여성 해방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후자의 부분적인 독립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사회주의자 '여권운동'가(socialist feminist)라고 부른다. 그러나, 최근에는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급진 여권운동'론이 여성 운동 내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완전 독립론은 줄곧 약간 진보적으로 사회 봉사를 하는 진영 정도에 머물러 왔다. 체제에 도전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여성들의 이러한 도피는 체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러한 체제 도전의 회피는 더 많은 '여권운동'가들을 다른 방향으로---보수 야당으로---몰려가게 했다. 적합한 자리---국회의원, 노동조합 간부, 지방 의회 의원---를 올바른 인식을 가진 여성들이 차지하는 것이, 모든 여성들이 남녀 평등을 추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다.
혁명적 사회주의의 전통은 매우 다른 이념 체계에서 시작된다. 이미 1848년 저술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우선 여성에 대한 억압은 남성들의 머리속 관념으로부터가 아니라 사유 재산의 발달과 그에 따른 계급에 기초한 사회의 출현으로부터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해방을 위한 투쟁이 모든 계급 사회를 종식시키기 위한 싸움---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또한 공장 제도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민중의 생활, 특히 여성들의 생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성들은, 계급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그들을 배제시켜 왔던 사회적 생산의 장(場)으로 되돌아왔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들에게 그들이 이전까지 결코 가져 본 적이 없는 잠재력을 부여했다. 집단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노동자로서 여성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상당한 능력과 독자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가족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생산 활동에서 여성의 역할 때문에 여성이 가장---그러니까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완전히 종속되었던 이전의 여성의 생활과 크게 대조되었다.
이로부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족의 물질적 기초, 그러니까 여성을 억압하는 물질적 기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성들이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는 것에서 오는 이익을 여성들 자신이 차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재산이 소수의 사람들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오늘날 여성들의 억압을 유지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조직되는 방식---특히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 자식들을 다음 세대의 노동자가 되도록 부양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가족이라는 특정한 틀을 이용하는 방식---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남성들에게---때로는 여성들에게도---노동에 대해 지불하는 반면, 여성들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들의 남편이나 아버지가 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고 그들의 자식들이 노동자로서 같은 일을 하도록 양육하는 데 그들의 삶을 바칠 것이라는 사실은(자본가 계급으로서는--옮긴이) 커다란 이익이다.
대조적으로, 사회주의는 여성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가족 안의 많은 역할(가사노동--옮긴이)을 사회가 떠맡게 되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그들의 계승자들이 '가족 제도 폐지'를 설파하려 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 제도 지지자들은 언제나 가족 제도 속에서 가장 억압당하는 여성들을 자신들의 지지자로 동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여성들이 '가족 제도 폐지'가 그들의 남편에게 자식에 대한 책임을 방기할 수 있다는 면책권과 자신들을 버릴 수 있는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족 철폐론자들과는 달리,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더 나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어떻게 해서 여성들이 오늘날의 가족 제도가 부과한 비참하고 답답한 생활을 강요당하지 않게 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항상 노력해 왔다.
'여권운동'가들은 언제나 이러한 식의 분석을 거부해 왔다. 그들은 세계를 변화시키고 여성들에 대한 억압을 끝장낼 수 있는 힘을 가진 곳---노동 속에서 집단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곳---에 있는 여성들에게 접근하지 않고, 피해자로서 여성들에게 접근한다. 예컨대, 1980년대 초의 캠페인은 매춘, 강간 또는 에이즈와 핵무기가 가족과 여성에게 가하는 위협과 같은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것들은 여성들이 약자라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여권운동'은 성적 억압이 계급 분화에 우선하며 계급적 구분을 초월한다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가정은 일부 여성들---소수---의 지위를 개선하는 반면, 계급 사회는 그대로 남아 있게 하는 결론들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여성운동은 "신 중간계급" 여성들---언론인, 작가, 강사, 상층 화이트칼라 노동자---이 주도하는 경향이 있다. 타이피스트, 서류정리원, 기능사원들은 배제되었다.
여성 해방 문제가 단지 소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노동계급 여성들을 위해 현실화되는 것은 급진적 변화와 혁명적 봉기의 시기에 비로소 그렇게 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은 여성들한테 그전까지 세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평등을 가져다 주었다. 이혼, 낙태, 피임이 자유로워졌다. 육아와 가사노동은 사회의 책임이 되었다. 여성들이 더 넓은 선택 기회를 누리고 자신의 생활을 관리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공동 식당, 세탁소, 탁아소 등이 문을 열었다.
물론 이러한 진보의 운명이 혁명 그 자체의 운명과 분리될 수는 없었다. 굶주림과 내전, 이로 인한 노동계급의 대량 사망, 국제 혁명의 패배는 결국 러시아 자체 안에서조차 사회주의의 실패를 뜻했다. 평등을 향한 변화는 거꾸로 되돌려졌다.
그러나, 소비에트 공화국 초기는 가장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여성 해방 전망은 훨씬 더 밝다. 영국에서는---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얘기이지만---5명의 노동자 가운데 2명이 여성이다.
여성 해방은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으로만 이룩될 수 있다. 이것은 여성들만의 독립된 조직이라는 '여권운동가'의 관념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통일된 혁명 운동의 일부로서 함께 행동하는 여성·남성 노동자만이 계급 사회를 타파하고 그와 더불어 여성에 대한 억압을 끝장낼 수 있다.
13 사회주의와 전쟁
20세기는 전쟁의 시기였다. 제1차세계대전으로 1천만 명이 죽었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5천5백만 명이 죽었으며,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2백만 명이 죽었다. 그리고 핵무기를 갖춘 두 개의 초강대국인 미국과 러시아는 이제 인류를 여러 번 파멸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다.
기존 사회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한테 이러한 소름끼치는 일을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인간이 사람들을 대량 살륙하는 것을 즐기는 천성적이고 본능적인 충동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인간 사회가 언제나 전쟁을 해 왔던 것은 아니다. 고든 차일드는 석기 시대 유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최초의 다뉴브족은 평화스런 종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은 전쟁 무기가 아니라 사냥 도구들이었다. 그들의 마을은 군사 방어 시설이 없었다...... 그러나, 신선기 시대 후기에는 무기가 가장 두드러진 품목이 되었다."
전쟁은 인간의 타고난 침략성(공격성)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다. 전쟁은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된 결과이다. 5천년~1만년 전, 재산을 소유한 계급이 최초로 나타났을 때, 그 계급은 자신의 부를 지킬 수단을 찾아 낼 필요가 있었다. 그 계급은 사회의 여타 부분과 분리된 무장 세력 그러니까 국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후, 다른 사회를 약탈하여 부를 더욱 늘리는 데 국가는 귀중한 수단이 되었다.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하는 것은, 전쟁이 인간 새활의 영원한 특징이 된다는 것을 뜻했다.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계급은 더 많은 노예를 공급해 주는 전쟁을 계속 벌이지 않았다면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중세의 봉건 영주들은, 자기 지역의 농노를 다스리고 다른 봉건 영주들한테서 빼앗은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중무장을 해야 했다.
300~400년 전 최초의 자본가 지배계급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너무 자주 전쟁에 의존해야 했다. 그들은 옛 봉건 지배자들의 잔재 세력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16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처절한 전쟁을 해야 했다. 영국과 같은 가장 성공을 거둔 자본주의 국가들은, 바다를 건너 가서 인도와 아일랜드를 약탈하고, 수백만명의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수송하고, 전세계를 그들 자신을 위한 약탈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들의 부를 늘리기 위해 전쟁을 이용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전쟁을 통해 건설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전쟁은 "불가피하고 심지어 정당한"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전적으로 전쟁에 의존할 수만은 없었다. 자본주의의 부(富)의 대부분은 공장과 광산의 노동자들을 착취함으로써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모국" 그 자체 내애세ㅓ 투쟁이 벌어지면 붕괴될 수 있는 것이었다.
각국의 자본가 계급은 외국에서는 전쟁을 치르는 반면, 국내에서는 평화를 원했다. 그래서 자본가 계급은 한편으로는 "군인 정신"을 가지라고 고무하면서, 또한 "폭력"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완전히 모순된 방식으로 군국주의에 대한 찬양과 평화주의적 언사를 혼합시키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전쟁 준비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전보다 더 중심적인 사안이 되었다. 19세기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서로 경쟁하는 많은 소기업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당시의 국가는 이들 자본가 상호간의 관계 및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규제하는 상대적으로 작은 기구였다. 그러나, 20세기에는 대기업들이 대부분의 소기업들을 집어삼켰고, 그리하여 각 산업에서 대부분의 경쟁(가격 경쟁)은 배제되었다. 경쟁은 점점 더 각국 대기업들간의 국제 경쟁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경쟁을 조정할 국제적 자본가 국가는 없다. 그 대신 각국은 자국 자본가들이 다른 나라의 자본가들에 대해 우위를 가질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각국 자본가들간의 생사를 건 싸움은, 파괴적 무기를 엄청나게 가진 각 자본주의 국가간의 생사를 건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투쟁은 두 번씩이나 세계 대전으로 비화했다.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은, 전세계의 지배를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들간의 투쟁, 그러니까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냉전은 가장 강력한 자본가 국가들이 각각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로 서로 결집하여 대치한, 세계 대전의 변형된 연장이었다.
이러한 전세계적 냉전에 덧붙여져, 많은 열전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다. 일반으로 그러한 열전은 1980년에 터진 이란-이라크 전쟁과 같이 누가 특정 지역을 장악하느냐 하는 것을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간의 전쟁이었다. 동서 양대 진영이 첨단 군사 기술을 제3세계 국가들한테 팔아 전쟁에 불을 붙였다.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소름끼치는 현실을 싫어한다. 그들은 자본주의는 원하지만 전쟁은 싫어한다. 그들은 그리하여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다른 대안을 찾으려 한다. 예컨대, 국제연합(UN)이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UN은 단지 전쟁 추구를 구체화하는 국가들이 서로 만나는 무대일 뿐이다. 거기서 그 나라들은, 마치 한차례 격돌을 벌이기 전에 탐색을 하는 권투 선수들처럼, 서로의 힘을 비교한다. 만약 한 나라나 어느 동맹이 다른 나라나 동맹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면, 양측은 전쟁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는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결과에 의심이 든다면, 그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 즉 전쟁으로 가는 길만을 알 뿐이다.
이것은 두 개의 거대한 핵 동맹국인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서방측이 동구권에 비해 군사적으로 우세했다고 하더라도, 소련이 그 간격을 절장적으로 불리하다고 믿을 정도로 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인류의 대부분을 쓸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미·소는 핵전쟁을 감행하여 승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자본주의와 영구히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초강대국 미·소간의 협정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양측의 상호불신은 그러한 협정의 효력을 감소시켰다. 양측은 상대가 무기 경쟁에서 자신을 압도하지 않을까 끊임없이 두려워하여 여전히 대량 파괴를 위한 더 우수한 무기를 개발하려 했다. 동서 양진영의 핵무기를 제한할 것이라 여겨졌던 1972년의 협정도 무기 경쟁의 가속화를 막지는 못했다.
1989년에 동유럽에서 대중 봉기가 일어나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무너지고 1991년에 소련이 붕괴함에 따라 냉전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신세계질서'와 '평화분담금'을 떠벌였다.
그러나 사태는 이와 정반대로 흘러갔다. 서방이 자신의 옛 동맹국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고, 옛 소련에서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전쟁을 벌였고, 소말리아와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내전이 벌어졌다. 야만스러운 전쟁이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자본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군사적 경쟁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군사적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모든 곳에서 지배계급은 전쟁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민족주의에 붙잡아매는 길임을 알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전쟁을 혐오하고 두려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전쟁을 종식시킬 수는 없다. 전쟁은 계급 사회의 불가피한 산물이다. 전쟁의 위협은 기존 지배자들한테 평화를 구걸한다고 해서 종식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계급 사회를 영원히 없애기 위해 싸우는 운동을 통해서만 지배자들을 무장 해제시킬 수 있다.
1970년대 말에 유럽과 미국에서 나타난 평화운동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쪽만의 무장 해제와 핵동결을 위해 크루즈 미사일과 퍼싱 미사일의 도입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본과 노동간의 투쟁과 별개로도 평화를 위한 투쟁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의 충동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 즉 노동계급을 동원하지 못했다.
오직 사회주의 혁명만이 전쟁의 공포를 종식시킬 수 있다.
(지은이 Chris Harman)
1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왜 필요한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론이 필요한가? 우리는 사회 불안정과 경제 공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고용주들한테 착취당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분노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사회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밖의 것은 먹물들한테나 맡겨 두라." 우리는 사회주의자 투사들이나 심지어 노조 운동가들 중에서도 이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흔히 본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추상적"이라고 말한다. 또,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이론적으로 그럴 듯하지만 실제 생활 상식에서는 그와 전혀 다르다고도 말한다.
이런 말은 사실 사회 변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강력히 선전하는 견해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그들의 의도는 마르크스주의란 모호하고 복잡하며 지루한 교조(敎條: 'ism')일 뿐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문제점은, 이런 주장의 대변자들이, 자기들은 깨닫지 못할지 모르지만, 보통은 자기들 나름의 "이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한테 사회적 문제에 관한 질문을 하나 던져 보면 이런저런 식의 일반화를 해가며 대답할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야." "열심히 노력만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지." "기업인이 없으면 우리에게 일자리 줄 사람도 없어." "도덕적 타락으로 그 나라가 그 꼴이 되었지." 도대체 이런 주장이 얼마나 많은지 어디서건 들을 수 있을 지경이다. 공장에서건 사무실에서건, 술집, 다방, 식당, 그 어디서건 말이다. 어느 누구나 자기 나름의 사회관과 역사관을 갖고 있다. 위의 견해들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사회 "이론"들이다. 누군가가 자기는 이론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정리해 둔 적이 없다는 뜻이다.
사회를 변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한테 이런 태도(이론 경시 풍조--옮긴이)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젼 등 소위 대중 매체들이 한결같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회와 정치 문제에 대한 의도적인 해석을 우리 머리에 주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 매체들은 우리가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떠드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들 다양한 주장에서 거짓된 바를 인식해 내지 못한다면 사회 번혁을 위해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없다.
이것은 150년 전 처음으로 입증되었다. 1830년대와 40년대 영국 북서부 지방은 공업이 발달하여 수십만의 남녀 성인 노동자와 미성년 노동자들이 비참한 수준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열악한 생활 조건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열악한 생활 조건을 타파하기 위해 그들은 최초의 노동자 대중 조직을 결성하여 싸웠다. 그것은 최초의 노동조합이었고, 영국 최초로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었으므로 인민헌장 운동(차티즘: Chartism)이라 불렀다. 물론, 인민헌장 운동은 소집단으로 이루어진 다른 초기 사회주의 운동과도 병행되었다.
노동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에 관한 문제가 즉각 부과되었다. 어떤 이들은 사회 지도자들을 평화적으로 설득하여 사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들 말했다. 즉, 대중의 '도덕적 힘', 다시 말해서 평화적 운동으로도 노동자들한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이런 견해에 근거하여 조직하고 시위하고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결과는 패배와 사기저하였다. 어떤 이들은 '물리적 힘'을 사용할 필요는 인정했는데도, 이 힘이 사회로부터 유리된 매우 작은 음모 집단에 의해 행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 동의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의 투쟁도 패배와 사기저하로 끝나고 말았다. 또, 어떤 이들은 노동자들이 군대 및 경찰과 대적하지 않고 경제투쟁을 통해 자기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중의 행동이 뒤따랐다. 1842년 세계 최초의 총파업이 영국 북부의 공업 지대에서 일어나 4주일이나 계속되었지만, 배고픔과 궁핍으로 인해 작업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패배를 거듭하던 노동운동의 제1단계의 끝무렵인 1848년에 독일인 사회주의자인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이란 소책자에서 자기 사상을 남김없이 명확하게 밝혔다. 그의 사상은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당시 노동운동에서 제기된 현실 문제들을 취급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발전시킨 사상은 오늘날과도 관련성을 갖고 있다. 그가 140년 전에 썻다고 썼다고 해서 그의 사상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주장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있다. 사실, 마르크스가 맞서서 논쟁을 벌였던 온갖 사회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인민헌장 운동가들이 '도덕적 힘'이냐 '물리적 힘'이냐 하는 것을 논했듯이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도 '의회 사회주의'냐 '혁명적 사회주의'냐 하는 것을 논하고 있다. 혁명가들 중에서 테러리즘에 찬성하는 주장과 반대하는 주장이 1848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공존하고 있다.
관념론
마르크스가 사회 문제들을 해석하려고 저술 활동을 하고 있을 당시, 공장에서는 기술 혁신으로 그 이전 세대가 꿈도 꿔보지 못한 규모의 부(富)가 축적되고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인류가 전(前)시대 고통의 원인이었던 자연적 재앙에 대항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기술 혁신과 그에 따른 엄청난 부의 축적이 대다수 대중의 생활 향상을 가져오진 못했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남녀 성인 노동자들과 미성년 노동자들의 생활은 토지를 경작하던 그들의 조상들보다 훨씬 열악한 것이었다. 그들의 임금은 그들을 굶겨 죽이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대량 실업의 주기적 발생으로 아예 최저 생계비를 훨씬 밑돌 정도였다. 결국, 그들은 비참하고 열악한 빈민가로 내몰려 적절한 의료도 받지 못한 채 무시무시한 전염병에 시달리곤 했다. 자본주의 공업화는 전반적인 행복과 복지를 가져오는 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더욱 혹심한 빈곤과 불행을 안겨 주었다.
이를 주목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만이 아니었다. 당시의 다른 위대한 사상가들 중에서 영국 시인 블레이크(Blake)와 셸리(Shelly), 프랑스 사회주의자 푸리에(Fourier)와 쁘루동(Proudhon), 독일 철학자 헤겔(Hegel)과 포이에르바흐(Feuerbach) 같은 이들도 자본주의 착취 현상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
헤겔과 포이에르바흐는 인간이 처한 이 불행한 상태를 '소외'(alienation:Ent fremdung)라고 불렀다. 요즘도 흔히 듣는 이 말이 뜻하는 바는, 헤겔과 포이에르바흐에 따르면, 인간이 자기가 과거에 했던 행동에 지배되고 억압받는 상태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神)이란 관념을 만들고 신 앞에 엎드려 절하고 나서는, 자기가 만든 것(즉 신)에 따라 살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낀다고 포이에르바흐는 지적했다. 그리고, 사회가 진보하면 진보할수록 오히려 인간은 더욱 비참해지고 '소외'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초기 저작에서 이 '소외'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사회의 부를 창조한 사람들, 즉 직접 생산자들의 삶에 적용하였다. "노동자는 부를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그의 생산 능력과 생산 범위가 증대하면 증대할수록, 더 가난해진다...... 물건의 가치가 증가함에 비례해서 인간의 가치는 하락한다...... 노동의 산물은, 소외된 그 무엇으로서, 즉 생산자로부터 독립된 어떤 힘으로서 노동과 대립하게 된다."
마르크스 시대에 사회 문제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설명은 여전히 종교적인 종류의 것이었다. 사회의 불행은 신이 자기들에게 명령하는 바를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죄'를 버릴 수가 있다면야 모든 게 잘 될 텐데......" 이와 비슷한 견해는 오늘날에도 들을 수 있다. 보통은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 않다는 점이 마르크스 시대의 설명과의 차이라면 차이랄까. 현대의 통속적인 견해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전에 개인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이 자기의 '이기심'이나 '물질주의'(혹은 '집착')를 버릴 수만 있다면야 사회는 자동적으로 나아질 텐데......"
이와 관련있는 어떤 견해는 '모든' 개인이 아니라 권력을 쥔 '소수'의 핵심적 인물들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발상은, 부와 권력을 쥔 자들이 "이치를 깨달아 반성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이라는 한 영국인 사회주의자는 자기가 고용한 노동자들을 좀더 친절하게 대하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어용 노조 지도자들도 이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사용자들의 범죄를 "실수"라고 부르는지 주시해 보라. 마치 약간의 분규만으로도 대기업을 설득하여 그들의 사회적 지배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음을 이내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모든 견해들을 '관념론'(idealism)이라고 못박았다. 사람들이 '관념'(ideas)을 갖는 것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이런 종류의 견해들이 관념을 인간의 생활 조건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관념론'이라고 낙인찍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관념은 그들이 살고 있는 생활의 종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기심"(혹은 "탐욕")을 예로 들어 보자.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이기심을 조장하고 있다.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조차 이기심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슬며시 고개를 쳐드는 것을 억누르기 어렵다. 아이들을 위해 최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하는 젊은 아버지 노동자나 쥐꼬리 만한 월급을 부모에게 송금하고자 하는 효녀 노동자는, 처자 부양과 부모 봉양을 위한 유일한 길이 끊임없이 다른 노동자들과 경쟁해서 더 나은 직장을 얻고 좋은 조건의 잔업을 얻으며 인사고과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런 사회의 노동자들은, 개개인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이기심'이나 '탐욕'을 버릴 수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권력과 부의 정상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건 훨씬 더 웃기는 얘기다. 만약 어떤 대기업 회장이 노동자들에게 설득당해 사회주의 관념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다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할 것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이들한테조차 관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의 관념을 형성시킨 모태인 사회 구조가 중요한 것이다.
요점을 달리 설명해 보자. 관념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관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사회에 살고 있다. 제도 언론과 제도 교육이 오도(誤導)하고 호도(糊導)하고 있는 관념이 옹호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도대체 어떻게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이념기구가 강요하는 관념과 완전히 다른 관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자들의 일상 경험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관념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요즈음 왜 "의식화"한 노동자들이 70년대보다 늘어났는가 하는 것을 단순히 "외부 세력의 개입"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째서 급진적 관념에 전보다 더 귀를 기울이는가 하는 것이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슷한 문제로서, "위인"들의 영향을 설명하려면 왜 대중이 그들을 따르기로 했는가 하는 것이 설명되어야 한다. 예컨대, 왜 수백만의 사람들이 나폴레옹이나 레닌이 제안한 바에 따르기로 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단순히 그들이 역사를 바꾸었다고 말해 봤자 헛일이다. 결국, 위인들을 대중 최면술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사회 생활의 무언가가 사람들로 하여금 나폴레옹이나 레닌이 제안한 바가 옳은 듯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떤 관념이 어디서 나온 것이며 왜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만 관념이 역사를 바꾼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관념의 이면에 숨어 관념을 형성시킨 사회의 물질적 조건들을 검토할 때만 관념의 혁명적 역할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2 역사에 대한 이해
관념 그 자체가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마르크스가 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마르크스는, 그 이전의 사상가들처럼, 역사를 이해하려면 인간을 물질 세계의 일부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행동은 다른 자연물(自然物)의 행동처럼 물질적 힘들에 따라 결정되어 왔다. 그러므로, 인간학은 자연계(自然界)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일부였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상가들을 유물론자(materialist)라고 불렀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이 여러 가지 종교적·관념론적 역사관에 비해 한층 진일보한 것이라고 보았다. 즉, 사회 조건을 바꾸는 것에 관해 과학적으로 논하려면 더 이상 신에게 기도한다거나 사람들의 "정신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관념론을 버리고 유물론을 택하는 것은 '신비한 것'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과학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행동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 모두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생물학이나 화학이나 물리학에도 그릇된 "이론"이 있듯이, 사회과학에도 잘못된 이론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첫째 예는 매우 광범위하게 유포된 기계적인 유물론의 시각으로서, 인간이 몇 가지 측면에서 "본성적"(natural)으로 행동하는 동물이라는 견해이다. 늑대가 '본성적'으로 다른 동물을 죽이고 양이 '본성적'으로 온순하듯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격적이고 지배욕이 강하며 경쟁적이고 탐욕스럽다는 것이다.(여기에는 여성이 '본성적'으로 부드럽고 남자에게 순종적이며, 부모와 남편을 공경하고 매사에 수동적이라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이런 견해를 근래에 정식화한 것이 바로 '인간·동물 동일 본성론'(the naked ape view)이다. 이 지극히 반동적인(reactionary) 주장이 내린 결론은 바로 인간이 '본성적'으로 공격적이라면 사회를 개선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으례 똑같을 테니 혁명을 통하여 새 사회를 건설하여도 그 사회는 항상 실패작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인간 본성"(human nature)은 사회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경쟁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전의 많은 사회에선 존재한 적이 거의 없었다. 처음으로 '수'(Sioux)족 인디안들한테 지능검사를 실시하려 했던 과학자들은 '수'족 인디안들이 왜 서로서로 협력해서 답을 구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인디안들이 사는 사회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을 강조했던 것이다. "공격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유럽인과 처음 대면한 에스키모인들은 도대체 "전쟁"이란 말(그들에게는 '말'이 아니라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이 뭘 뜻하는지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쓸어버린다'는 생각은 그들한테는 정신 나간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즉 인간 본성에 어울리는) 걸로 여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인 스파르타에서는 젖먹이를 산속에다 버려 놓고 추위를 이기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 '당연한'(즉 인간 본성에 어울리는) 걸로 여겼다.
또한, '불변의 인간 본성'론은 역사 속의 대사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고대 그리스나 로마제국 또는 잉카제국의 찬란한 영광, 근대 공업 도시 등에 살았던 인간들이, 중세의 진흙 오두막집에 살았던 무지한 농민과 같은 수준---동렬---에 놓이게 된다. 거기서 중요한 건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이지, 그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이 세운 장대한 문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사회가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들을 먹이는 데 성공한 반면, 어떤 형태의 사회는 수백만의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들을 굶겨 죽인다는 사실은, '불변의 인간 본성'론자들한테는 의미 없는 얘기일 뿐이다.
두 번째 예도 역시 많은 이들이 신봉하고 있는 통속적인 것으로서, 이 또한 기계론적 유물론의 시각에서 나온 것인데, 인간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은, 동물이 써커스에서는 정글에서와 다른 행동을 하도록 길들여질 수 있듯이, 인간의 행동도 이와 유사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인즉, 제대로 된 사람들이 사회를 통제하기만 한다면 '인간 본성'도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확실히 '불변의 인간 본성'론보다 진일보한 견해이지만, 사회 전반이 바뀔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역시 실패작이다.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현재의 사회 조건 때문에 제약을 받는다면, 사회 조건을 딛고 넘어서서 제어장치(制御裝置)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아는 이가 도대체 누가 있을까? 다른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는 여러 압력을 마술적으로 물리칠 수 있는, 신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우리 모두가 써커스에 나오는 동물이라면 누가 사자 조련사란 말인가?
이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결국에는 '인간 본성 불변'론자들처럼, 사회란 변화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게 되거나, 혹은 변화는 신이나 위인 또는 개개 관념의 힘과 같은 사회 밖에 있는 어떤 것이 만들어 낸다고 믿게 된다. 이쯤되면, 이들의 "유물론"은 신판(新版) 관념론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이런 "이론"은 결국에는 반드시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 중 한 부분이 사회를 초월하고 있는 걸로 생각하게 된다. 이런 류의 견해는 그러므로 흔히 반동적이다.
오늘날 이 견해의 지지자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스키너(Skinner)라는 미국의 보수 심리학자이다. 그는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끔 그들을 '제약하길' 원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므로 그가 주장하는 "제약한다"는 말은 사람들을 그 사회에 순응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을 뜻할 뿐이다.
세 번째 사이비 유물론적 견해는 세계의 모든 불행을 인구 증가 탓으로 돌린다. 이 견해는 주창자인 18세기 말의 영국 경제학자 맬서스(Malthus)의 이름을 따라서 맬서스 학파(Malthusian)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인구 증가'론은, 예컨대 미국에서 150년 전에는 1천만 명을 먹이기에 충분한 식량밖에 생산되지 못했는 데 반해, 지금은 2억 명을 먹이고도 남을 식량이 생산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 견해는 식구 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노동할 수 있고 부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 하나가 더 늘어난다는 것을 잊고 있다.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서술한 그릇된 설명들을 '기계적' 혹은 '천박한' 유물론의 여러 형태라고 불렀다. 이들 기계적 유물론은 인간이 물질 세계의 일부일 뿐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행동을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망각하고 있다.
역사 유물론
"우리는 인간을 의식, 종교 또는 그 밖의 무엇을 통해서든 동물과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 자신은 생활 수단, 즉 의식주의 수단을 생산(강조는 옮긴이의 것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동물과 구별되기 시작한다."---칼 마르크스는 이렇게 강조함으로써 사회 발전 과정을 독특하게 설명하였다.
인간은 유인원의 후손인 동물이므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관심거리는 배를 채우고 외부의 기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다른 동물이 이러한 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타고난 생물학적 육체 조건에 달려 있다. 늑대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본능에 따라 결정된 방법대로 먹이를 사냥해 잡아 먹음으로써 살아 간다. 또, 추운 밤에도 털 덕분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고 새끼들은 타고난 행동 양식대로 기른다. 그러나, 인간의 생활은 이런 식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실, 10만 년 내지 3만 년 전에 지구상에 존재하던 인류는 현재의 우리와는 전혀 다르게 생활했다. 그들은 동굴이나 땅에 구멍을 파고 살았다. 음식이나 물을 담을 그릇도 없었고, 식량은 낱알을 줍거나 돌로 맹수를 때려 잡아 해결했다. 글씨를 쓸 줄도 몰랐고 손가락 셈 이상의 계산을 할 줄도 몰랐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이웃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자기네 조상이 무슨 일을 했는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실제로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10만 년 전 인류의 신체 조건은 현대 인류의 신체 조건과 유사하고, 3만 년 전 인류의 신체 조건은 현대인과 똑같았다. 만일 혈거인을 목욕시키고 면도까지 시켜 양복을 입혀 번화가를 걷게 한다 해도, 어느 누구도 그를 이상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C. Gordon Child)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인류의 두개골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의 것이다...... 인간의 두개골이 지질학적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약 2만 5천 년 전에 인간의 문화적 진보가 막 시작되고 있었지만, 그 이래로 인간 육체의 진화는 사실상 멈추어 버렸다."
또 다른 고고학자 리키(Leaky)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2만 5천년 전의 오리그네시아(Aurignacian) 문명과 막달레니아(Magdalenian) 문명에 살던 인류와 현대 인류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엄청나지만, 신체적 차이는 무시해도 좋다." 여기서 고고학자들이 말하는 '문화'란, 동물이 본능적으로 아는 것과는 달리 인간이 서로서로 가르쳐 주고 배우는 것(예컨대, 모피나 양털로 옷을 만드는 법, 점토로 토기를 만드는 법, 불을 만들고 집을 짓는 법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미 처음부터---육체상의 진화가 멈추기 시작하고 문화적 진보가 이제 막 시작되던 처음부터 이미---인류의 생활은 다른 동물의 생활과 크게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한테만 있는 육체적 특징, 즉 큰 뇌수와 사물을 다룰 수 있는 사지 등을 사용해 자기의 필요에 맞게 주의 환경을 변형시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육체 조건의 변화 없이도 광범위하게 다양한 자연적·사회적 조건에 적응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더 이상 단순히 자기를 둘러싼 조건에 반응만을 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환경을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맹수를 공격하기 위해 돌과 막대기를 사용했고, 열과 빛을 얻기 위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불을 가지고 횃불을 켰으며, 동물 가죽과 식물로 몸을 가렸다. 수만 년에 걸쳐서 인간은, 스스로 불을 일으키는 것과 다른 돌멩이를 이용해 석기를 만드는 것과 결국은 자신이 심은 씨앗에서 식량이 자라게 하여 토기에 그것을 저장하는 것과 동물을 길들이는 것을 배웠다. 비교적 최근에---100만 년의 인류 역사에 비하면 불과 5천 년 전에---인간은 광석을 유용한 도구와 효율적인 무기의 재료인 금속으로 변형시키는 비법을 알아냈다. 이 모든 진보로 인간은 더욱 쉽게 먹고 입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 생활 그 자체의 조직에도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인간의 생활은 사회적이었다. 여러 사람의 공동 노력을 통해서만 맹수를 죽일 수 있었고, 식량을 모을 수 있었으며, 불을 계속 지필 수 있었다. 즉, 인간은 협동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이고 밀접한 협동을 통해서 인간은 또한 소리를 내서 언어를 발달시킴으로써 서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사회 집단은 단순했다. 건장한 수십 명의 인간 집단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을 만큼의, 자연적으로 자라는 농산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식량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종류의 생활을 해야 했다. 또, 식량을 저장하는 수단이 없었으므로 사유 재산이나 계급 분화가 있을 수 없었고 전쟁 동기를 유발시킬 어떤 노획물 같은 것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이러한 양상을 띤 사회가 지구상 곳곳에 수백 군데나 남아 있었다. 남·북미 대륙의 어떤 인디언 부족들이나, 아프리카의 적도 부근과 태평양 연안의 민족들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등이 그런 사회이다. 이 사람들이 우리들보다 영리하지 못하거나 더 "원시적 심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예컨대, 호주의 원주민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문자 그대로 수천종의 식물과 수십 가지의 상이한 동물들의 습성을 곧 알아낼 줄 알아야 했다. 인류학자 퍼스(Firth)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호주의 종족들은...... 사냥터에 있는 잡아 먹을 수 있는 동물, 물고기, 새 등의 습성과 특징, 서식처, 그리고 계절에 따른 이동까지 알고 있다. 그들은 바위, 돌맹이, 밀랍, 고무, 식물, 풀뿌리, 나무 껍질 등의 외적 속성뿐 아니라 그보다 덜 분명한 속성까지 알고 있다. 그들은 불을 일으키는 법과, 고통을 덜고 출혈을 막는 법 및 신선한 음식의 부패를 지연시키기 위해 열을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열을 이용해 어떤 나무는 딱딱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부드럽게 만들 줄도 안다...... 그들은 적어도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조수(潮水)의 운동과 혹성의 주기 및 계절의 순서와 지속 기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들은 풍향·풍속 체계와 연간 습도 및 기온 유형과 같은 기후의 변동이 자연계 생물체의 성장과 생활상의 끊임없는 변화와 서로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있다...... 게다가, 잡아 먹기 위해 죽인 동물에서 나온 부산물을 현명하고도 경제적으로 이용할 줄 안다. 예컨대, 캥거루 고기는 먹고 다리뼈는 석기를 만드는 데 도구로 사용하거나 쐐기로 이용하고, 근육은 창을 묶는 데에, 발톱은 밀랍과 섬유를 갖고 목걸이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기름은 붉은 황토와 섞어 화장품을 만들고 피는 목탄과 혼합해 페인트로 쓴다...... 그들은 간단한 역학적(力學的) 원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 부머랭(일종의 무기로서 던지면 곡선을 그리며 다시 돌아옴--옮긴이)이 정확히 곡선을 그리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듬고 또 다듬는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사막에서 생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영리'했던 것이다. 그들이 터득하지 못했던 것은 씨를 뿌려 자기들의 식량을 키우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우리 인류의 조상도, 지구상에 존재해 온 기간의 백분의 일에 해당하는 불과 5천 년 전에야 비로소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부(富), 즉 인간의 생활 수단을 생산하는 신기술의 발전은 항상 인간들 사이의 새로운 사회적 분업 형태, 즉 새로운 사회 관계를 생가나게 했다. 예컨대, 인간이 처음으로 씨를 뿌리고 동물을 길들임으로써 식량을 기르고 토기에 그 식량을 저장하는 일을 알게 되었을 때, 고고학자들이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회 생활의 전면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인간은 동물을 사냥하는 데뿐 아니라 이제는 땅을 개간하고 추수를 하는 데도 협력해야 했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생활할 수 있었고, 식량을 저장할 수 있었으며, 다른 공동체의 사람들과 재화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또, 최초의 도시들이 발달할 수 있었다. 그저 식량을 마련하는 데에만 종사하지 않고도 생활을 영위해 가는 사람들이 최초로 생겨날 수 있었다. 항아리를 만드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도구와 무기를 만들기 위한 부싯돌 채광과 금속 채광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전체 공동체 성원응ㄹ 위해 초보적인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등이 생겨났던 것이다. 더욱 불길한 것은 저장된 잉여 식량이 전쟁 동기를 유발·제공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주위의 세계를 다루거나 자연을 필요에 맞게 이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와 자신들의 생활을 변형시킨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과정을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 노동력과 생산수단 및 양자간의 기술적 관계--옮긴이)의 발전이 생산관계(relations of production: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소유관계--옮긴이)를 변화시키고, 생산관계의 변화를 통해 사회까지 변화시킨 과정이라고 요약했다.
더 최근의 예들이 많이 있다. 3백 년 전에 서구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땅을 일구고 살면서, 수세기 동안 변하지 않은 기술을 가지고 식량을 생산했다. 그들의 사고(생각)의 범위는 그 지역 촌락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들의 관념은 그 지역 교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대다수는 읽거나 쓸 필요가 없었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2백 년 전쯤에야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수만 명이 공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생활은 철저한 탈바꿈을 했다. 이제 그들은 조그만 촌락이 아니라 대도시에 살게 되었고, 결국 읽거나 글씨 쓸 줄 아는 것을 포함해 그들의 선조들은 꿈꾸지도 못했던 기술들을 배울 필요가 있게 되었다. 또, 철도와 증기선의 발명으로 지구의 반을 횡단해서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성직자들이 머리에 주입한 고리타분한 관념들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생산에서 물질적 혁명은 또한 생활 양식과 관념에서도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변화가 지금도 막대한 수의 사람들한테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 방글라데시나 터키 촌락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영국이나 독일의 공장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지녀 온 오랜 관습과 종교적 태도들의 더 이상 적합하지 못하다고 깨닫는 것을 보라. 아니면, 지난 50년간 다수의 여성들이 가정 밖의 직장일에 익숙해지면서, 여성이 실질적으로 남편의 소유물이라는 이전의 태도에 어떻게 도전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라.
사람들이 의식주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방식의 변화는 사회가 조직되는 방식과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변화를 초래한다. 이것이 마르크스 이전의(그리고 그 이후의 많은) 사상가들, 즉 관념론자들과 기계적 유물론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사회 변동, 즉 역사의 비밀이다.
관념론자들은 변화가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변화는 관념이 바뀌면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기계적 유물론자들은 인간이 물질 세계의 규정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객관적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변화하는가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기 주위 세계의 제약을 받지만, 역으로 그들은 세계에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작용하여 세계를 더욱 살기에 적당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상황을 변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자기들 자신까지 변화시킨다.
사회 변동을 이해하는 열쇠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의식주를 만들어 내는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곧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술과학(technology)의 발전이 자동적으로 더 나은 사회를 낳는다거나 새로운 발명이 자동적으로 사회변동을 일으킨다고 믿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견해(때로 기술과학 결정론 technology determinism이라 부른다)를 배격했다.
역사를 보면, 의식주의 생산을 촉진하는 관념들이 기존의 사회 형태나 사람들의 태도와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듭해서 이러한 관념들을 배척한 적이 있다. 예컨대, 로마제국에서는 일정한 크기의 땅에서 더 많은 수확을 얻는 방법에 대해 여러 견해들이 있었으나, 그러한 방안들을 채택하게 되면 채찍의 공포에 시달리며 노동하는 노예로부터 수확을 얻어낼 때보다 귀족이 일에 더욱 매달려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방안들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18세기에 영국이 아일랜드를 통치했을 때, 영국인들은 아일랜드의 공업 발전이 런던 기업가들의 이익과 상충되기 때문에 그것을 저지하려 했다. 만약 누군가가 성우(聖牛)를 죽여 인도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쥐고기를 가공처리해 영국인들에게 수분이 많은 부드러운 스테이크를 공급하는 방법을 내놓는다면, 그러한 방안들은 기존의 편견 때문에 묵살당할 것이다.
생산 발전은 낡은 편견(선입관념)과 낡은 사회 조직 방식(구체제)에 도전은 하지만, 자동적으로 이러한 구식 편견과 구식 사회 구성 형태를 뒤집어 엎지는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막기 위해' 싸운다. 그래서 새로운 생산 방식을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변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 만약 변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승리하면, 그때는 새로운 생산 형태가 실시될 수 없기 때문에 생산은 정체하거나 심지어는 퇴보하기조차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로 풀어 보자.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이 발전하면, 발전된 생산력은 기존의 생산관계 및 그것이 형성한 낡은 사회관계의 기초 위에서 성장한 관념들과 상충하게 된다. 이 충돌에서 새로운 생산력의 편에 서는 사람들이 승리하거나 아니면 낡은 체제 편에 서는 사람들이 승리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회가 진보하게 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사회가 틀에 박힌 채 그 상태 그대로 머물거나 심지어는 퇴보하기까지 한다.
3 계급투쟁
우리들은 계급으로 나누어진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즉, 우리 사회는 소수의 사람들이 막대한 사유 재산을 소유한 반면, 우리들 대부분은 거의 아무 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항상 그러했던 것으로 당연히 여기기 쉽다. 그러나, 사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는 계급과 사유 재산, 군대 혹은 경찰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5천 년 내지 1만 년 전까지에 이르는 50만 년 동안 인류가 발전해 온 길이었다.
계속해서 노동할 수 있기 위해 자신의 체력과 정신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식량을 사람들이 스스로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력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계급의 분화가 있을 수 없었다. 만약 노예가 생산하는 것 모두가 그 노예를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하다면 노예를 부려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생산의 진보가 일정 정도를 넘어서게 되면 계급이 분화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분화해야 했다. 식량이 충분히 생산되면 직접 생산자들이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소비를 하고도 잉여가 남았다. 그리고, 이 잉여 식량을 저장하고 그것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운반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 존재했다.
이 모든 식량(총생산물)을 노동해서 생산하는 사람들은 초과분의 잉여 식량을 그저 먹어 치워 버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매우 부실하고 가난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충동이 강했다. 그러나 잉여 식량을 다 먹어 버린 결과, 다음 해의 홍수나 기근 같은 자연의 파괴력과 외부의 굶주린 종족의 공격에 대해 그들은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이 책임지고 장래 재앙에 대비해 이러한 여분의 부를 저장하거나, 수공업자들(식량 이외의 생활용품을 생산하는)을 부양하거나, 방어 수단을 구축하는 데 사용하거나, 그 일부를 먼 곳의 부족들이 생산한 유용한 물건으로 교환한다든가 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매우 유리한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행정관과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살던 최초의 도시들에서 실행되게 되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생산물을 기록하기 위해 평판(平版) 위에 표시하는 것으로부터 문자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위의 사실들이 바로 우리가 소위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최초의 싹이 트는 단계였다. 그러나 중요한 단서(但書)로서, 증가된 부를 인구 중 소수가 관리하는 데 이 모든 것은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들 소수의 사람들은 전체 사회의 이익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그 부를 사용했다. 그런데, 생산이 더욱 발달될수록 부는 더욱 이 소수의 사람들 손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자연히 그 집중된 부는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과는 더욱 괴리되는 것이다. 사회를 이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시작되었던 여러 규칙들은, 부와 그것(부)을 생산하는 토지가 소수인의 사유 재산이라고 주장하는 "법률"이 되었다. 지배계급이 생기게 되었고, 법이 지배계급의 권력을 옹호해 주었던 것이다.
'토지에서 노동한 사람들이 자기네 생산물을 직접 관리할 수 있도록 사회가 다른 방식으로 발전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대답은 '그럴수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 본성"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여전히 매우 가난했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인구의 대다수는 땅을 파먹으면서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데 너무 바빠서, 읽기나 쓰기 체계를 발달시키고, 예술 작품을 창조하고, 교역을 위해 배를 건조하고, 별들의 행로를 연구해 보고, 수학의 기초 원리를 발견하고, 언제 강이 범람할지 혹은 어떻게 관개 수로를 건설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등의 일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어느 정도의 생활 필수품이 다수 대중한테서 탈취되어 이것이 하루 온종일 땀흘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소수의 특권 집단을 부양하는 데 사용될 때만, 이러한 일들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계급 분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이전의 인류 역사에서는 꿈꾸지도 못했던 생산의 발전을 이룩해 왔다. 자연적인 빈곤은 극복되었고, 지금 존재하는 빈곤은 자본가들이 저임금을 줌으로써 새로이 빚어진 인위적 빈곤이다. 오늘날의 계급 사회는 인류를 진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시키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필연적인 계급 분화를 일으킨 것은 최초의 순수한 농경 사회에서 읍과 도시 사회로 변화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부의 생산 방식이 발전하기 시작할 때마다 항상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예컨대, 천 년 전 영구의 지배계급은 토지를 소유하면서, 뼈빠지게 일하는 농노에 기생해 생활하는 봉건 귀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교역이 대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봉건 귀족과 함께 도시에서는 부유한 상인이라는 새로운 특권 계급이 성장했다. 그리고, 공업이 상당한 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상인들의 힘이 산업체 소유자(산업 자본가 계급)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사회 발전의 각 단계마다, 육체 노동을 해 부를 생산하는 피억압 계급과 그 부를 소유·통제하는 지배계급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 모두가 변화를 겪었다.
고대 로마의 노예 사회에서 노예는 지배계급의 사유 재산이었다. 노예 소유주는, 마치 그가 닭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닭이 생산해 내는 달걀을 소유하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가 생산해 내는 재화를 소유했다.
중세 봉건 사회에서 농노는 자기 토지를 보유(소유한 것은 아님--옮긴이)하고 거기에서 생산되는 것을 소유했다. 그러나, 이 토지를 보유하게 된 대가로 봉건 영주가 소유한 토지(領地: demesne--옮긴이)에서 보통 매주 사흘을 일해 주어야 했다. 즉, 그들의 시간은 구분이 되어, 반 정도는 영주를 위해 일하고 나머지 반 정도는 자신들을 위해 일하곤 했던 것이다. 만약 농노가 영주를 위해 일하기를 거부한다면, 영주는 농노를 채찍질, 투옥, 혹은 더 가혹한 방법으로 벌할 수 있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주는 노동자를 육체적으로 소유하지도 않으며, 자기를 위해 지불되지 않는 노동(不拂勞動)을 하기를 거부하는 노동자를 육체적으로 처벌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고용주는 노동자가 살아가기 위해서 얻어야만 하는 일자리인 공장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고용주는 아주 쉽게 노동자로 하여금 자기가 소유한 공장에서 만들어 내는 상품의 가치보다 훨씬 더 적은 임금을 받고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모든 경우에서 억압자 계급은, 일단 노동자들의 가장 기본 필수품이 충족되면, 남은 모든 부를 소유·통제한다. 노예 소유주는 자기 재산(노예)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기를 원하므로, 자가 운전자가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기 노예한테 먹을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노예가 육체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 이외에, 잉여로 남는 모든 것은 주인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한다. 봉건 농노는 자신의 땅뙈기에서 일함으로써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농노가 영지(領地: demesne)에서 하는 모든 가외 노동은 영주에게 돌어간다. 현대 노동자는 임금을 지불받는다. 그가 창출하는 그 밖의 모든 부는 이윤이나 이자나 지대의 형태로 고용주 계급한테로 간다.
계급투쟁과 국가
근로 대중이 저항하지 않고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인 적은 거의 없었다. 고대 이집트와 로마 노예 반란, 중국 전제 왕조 시대의 농민 반란, 고대 그리스 도시와 로마,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의 내전 등이 있었다. 칼 마르크스가 자기의 소책자 『공산당 선언』(1848) 서두에서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고 주장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문명의 성장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함으로써 일어난 계급투쟁에 좌우되어 왔다.
이집트의 왕(파라오)이나 로마의 황제나 중세의 군주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또한 아무리 호화롭게 살았다 해도, 그리고 아무리 장대한 궁전을 가졌다 해도,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농민이나 노예가 생산한 생산물이 자기들의 소유가 되는 것을 힘으로 보장하지 못했더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급 분화와 병행해서 또 다른 것, 즉 폭력 수단을 그들 자신과 그들의 지지자들이 지배할 수 있어야만 위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기 사회에서는,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정부 기관이나 군대나 경찰 같은 것---즉 국가(기구)---이 존재하지 않았다. 예컨대, 불과 60~70년 전에조차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국가(기구)가 없는 사회를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 사회의 국가가 수행하는 많은 업무들이 단순히 비공식적으로 전체 주민이나 대표자 회의를 통해서 수행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회의는 중요한 사회 규범을 위반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행위를 재판하곤 했다. 예컨대, 악한을 추방시킨다든가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필요한 처벌에 동의했으므로 처벌을 수행하기 위해 경찰이 별도로 필요하지도 않았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도 별도의 군대 조직 없이 이러한 경우를 대비해 선발된 지도자 아래 모든 젊은 남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단 소수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부를 지배하는 사회가 성립되면,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전쟁을 조직하는 이러한 간단한 방법들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대표자 회의나 어떤 무장 청장년 회의도 계급에 따라 분열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권 집단은 형법과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과 군대를 조직하고 무기를 생산하는 것을 오직 자기들의 손에 독점할 때에만 존속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계급 분화에는 재판관(판검사)과 경찰(및 비밀 경찰)과 장군 및 관료---이들 모두에게는 특권 계급의 지배를 보호해 준 보답으로 특권 계급이 쥐고 있는 부의 일부가 주어진다---와 같은 집단의 성장이 뒤따랐다.
이러한 국가(기구)의 여러 지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자기 상관의 명령에 주저없이 복종하도록 훈련받았고 피착취 인민 대중과 모든 정상적인 사회적 유대는 맺지 않았다. 국가는 특권 계급의 손아귀에 있는 살상 장치로서 발전했다. 그것도 매우 효율적인 장치로서.
물론, 이러한 장치를 움직이는 장군들이 흔히 어떤 황제나 왕과 불화가 생겨, 자기들 자신이 그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괴물같이 거대하게 무장한 지배계급조차도 종종 그런 사태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살상 장치를 계속 돌아가게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부(富)가 노동자 대중에 대한 착취에서 나오므로, 이같은 반란은 한결같이 사회를 구시대적 방식으로 지속시켰던 것이다.
사회가 좀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되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은, 단지 특권 계급뿐 아니라 이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무장한 기구, 즉 국가도 자기들의 타도해야 할 대상임을 역사 전반에 걸쳐서 자각해 왔다.
지배계급(과 그들을 지원하는 장군, 경찰, 판검사, 교도관 및 관료들)이 없으면 우선 무엇보다도 문명이 발전할 수 없었기에, 지배계급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일단 자신들의 권력이 확립되면, 문명이 더 이상 발전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게 된다. 그들의 권력 유지는 부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부를 자신들에게 넘겨주도록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들은 구식의 부 생산 방식보다 더 효율적인 방식을 새로이 도입할 수 있을지라도 부의 관리권(력)이 자기들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갈까봐 부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에 경계심을 갖게 된다.
지배계급과 그들의 억압 기구는 피착취 대중의 자발성과 독립성을 발전시키는 데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것이든 두려워한다. 그들은 또한, 새로운 특권 계급이 성장해서 자기들 자신의 무기와 군대의 비용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재력을 갖게 되는 것도 두려워한다. 어느 한도를 넘으면 생산의 발달을 돕지 않고 오히려 저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컨대, 전제 왕조 시대 중국 지배계급의 권력 유지는 토지를 소유하는 것에, 그리고 관개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운하와 제방(提防)을 통제하는 데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토지의 소유 및 운하·제방의 지배는 약 2천 년 동안 지속된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전제 왕조 시대 말기의 생산은 초기보다 그리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물론 그 대신, 유럽이 내내 중세의 어두움 속에 갇혀 있을 때 중국은 예술을 꽃피웠고 인쇄술과 화약을 발명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생산 형태가 수공업자들과 상인들의 주도로 도시에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자기들의 지배를 완전히 받지는 않는 사회 집단의 세력이 이렇게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전제 왕조 당국은 주기로 가혹한 조치를 취해, 성장하는 도시 경제를 분쇄했고 생산을 저하시켰으며 신흥 사회계급의 세력을 파괴했다.
새로운 생산력의 발전, 즉 부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의 발달은 보수적인 기존 지배계급의 이익과 상충했다. 투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가 사회의 모든 장래를 결정했다.
때로, 그 결과는 중국에서처럼 새로운 생산 형태가 등장하는 것이 저해받아 사회가 매우 오랫동안 거의 정체되다시피 하기도 했다. 때로, 로마제국에서처럼 새로운 생상 형태가 발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충분한 부가 생산되지 못하며, 결국 사회는 낡은 기반 위에서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게 되었다. 로마의 문명은 붕괴되었고, 도시는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은 조야한 농업 사회 형태로 되돌아갔다. 때로, 새로운 생산 형태에 토대를 둔 신흥 계급이 기존의 지배계급을---그들을 지탱시키는 사법 체계(司法體系), 군대, 이념, 종교와 더불어---조직적으로 약화시켜 마침내는 타도할 수 있었다. 이 때에야 비로소 사회가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각 경우에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느냐 뒤로 후퇴하느냐 하는 것은 계급간의 싸움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느 싸움에서와 마찬가지로, 승리는 미리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싸우는 계급들의 조직과 단결력, 지도력에 달려 있다.
4 자본주의 체제의 형성
노동자들이 듣는 가장 바보스러운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현재의 상황이 달라져도 별볼일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그것이 오래전이 아닌, 그리고 지구상의 어떤 먼 고장에서가 아닌, 바로 이 나라(영국을 가리킴--옮긴이)에서 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과 250여 년 전의 사람들한테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을 거대한 도시, 큰 공장, 비행기, 우주 탐험---촐도 체계조차 그들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과 같은 것들로써 묘사했다면, 그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여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압도적으로 농업적인 사회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방 촌락 밖으로 40리 이상을 여행해 보지 못했고, 생활 양식은 수천 년 동안 그러했듯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칠팔백 년 전에 이러한 사회체제 전반에 마침내 도전하게 되는 발전이 시작되었다. 수공업자 및 상인 집단이 도읍(都邑)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특정 영주에게 무료로 봉사하지 않고, 그 대신 생산물을 여러 영주들 및 농노들과 식료품으로 교환했다. 점차로 그들은 귀금속을 그러한 교환의 척도로 사용했다. 이것이 모든 교환 행위에서 얼마간 여분의 귀금속을 얻는, 즉 이윤을 얻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일보 대전진은 아니었다.
도시는 처음에 한 군주를 다른 군주와 서로 반목시켜 그 중간에서 어부지리를 얻음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 수공업자들은 기술이 향상됨에 따라 더욱 많은 부를 만들어 내고 영향력도 커졌다. 당시의 "중간 계급"---부르주아들을 당시에 그렇게 불렀다---은 중세 봉건 사회 내부의 한 계급으로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회를 지배했던 봉건 영주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부를 획득했다.
봉건 영주는 농노들을 시켜 자기 토지에서 생산할 수 있는 농산물에 직접 의존해서 생활했다. 그는 농노들한테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이러한 일을 할 수 있기 위해 자기가 가진 권력을 사용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시의 더 부유한 계급(부르주아지)은 비농산품을 판매한 수익에 의존해 생활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그러한 재화를 생산한 노동자들에게 일당 혹은 주당으로 임금을 지불했다.
이들 노동자들(흔히 도망친 농노들이었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오고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일단 자기가 수당을 받는 만큼의 일을 끝마치기만 하면. 노동자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유일한' 강제력은, 만약 누군가에게 고용되지 못하면 굶어 죽게 될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자유로운" 노동자는 굶어 죽기보다는 일한 대가로 자기가 생산한 상품의 값어치(가치)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으려 했기 때문에,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될 수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나중에 이러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구조를 다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에는) 중간계급인 부르주아와 봉건 영주는 전혀 다른 원천으로부터 부를 얻는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로 인해 그들은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기를 원하게 된다.
봉건 영주의 이상(理想)은, 성문법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어떤 외부 집단이 침입하여 자기 토지를 강제로 점유하는 일이 없고 농노들이 도망칠 수 없도록 자신의 토지에서 자신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였다. 영주는 모든 사람들이 타고난 사회적 신분을 받아들여 선조들의 시대처럼 현상(現狀)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했다.
필연적으로 당시의 부유한 신흥 중간 계급(즉, 부르주아지)은 사물을 다르게 보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업을 방해하거나 자기들이 쌓은 부(富)를 강탈해 가는 군주나 귀족들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기들 자신이 뽑은 대표자들이 작성하고 시행하는 확고한 성문법 체계를 통해 봉건 귀족과 군주를 견제하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더 가난한 계급들을 농노 신분에서 해방시켜 이들이 도시에서 일할 수 있게 되기를(그래서 자기들의 이윤을 증대시킬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그들 자신의 신분 문제에 대해서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흔히 봉건 영주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일이 자기 대(代)에서도 반복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한마디로 신흥 부르주아지는 사회를 대변혁시키기를 원했다. 구질서와 그들의 충돌은 경제적인 것이었을 뿐 아니라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일반 관념의 주된 원천이 교회 설교(성당 강론)이었던 문맹 사회에서 관념은 주로 종교적인 것이었다.
중세에는 봉건 영주의 신분을 타고난 주교와 수도원장들이 교회를 운영했기 때문에, 교회는 자연히 도시 부르주아지의 많은 행위들을 "죄악"이라고 공격하는 친(親)봉건제적 견해를 폈다.
그래서 16. 17세기의 독일,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서는 '중간 계급'이 자기들 나름의 종교를 만들기 위해 모였다.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 Protestantism)가 바로 그것인데, 개신교는 검약, 절제, 근면(특히 노동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주교와 수도원장의 주도권으로부터 중간 계급 신도의 독립을 설교했던 종교 관념이었다. 중간 계급(즉, 부르주아지)은 중세의 신 관념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모습대로 신을 만들어 냈다.
오늘날 우리는 마치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단순히 성찬식(성체 성사)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뜻하는 바에 대한 이견으로 싸우고 죽었던 것인 양, 즉 마치 당시의 큰 종교 전쟁과 내전들이 그저 종교적 차이로부터 비롯한 것인 양 학교나 텔레비젼에서 듣게 된다. 그러나, 훨씬 그 이상의 것이 문제로 되어 있었다. 즉, 부의 생산을 조직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에 기초한, 전적으로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사회 사이의 충돌이었다.
영국에서는 부르주아지가 승리했다. 현재의 지배계급(부르주아지)한테는 비록 무섭게 여겨지겠지만, 그들의 선조들은 왕의 목을 참수해 자기들의 신에게 봉헌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신성화시켰고, 그러한 행위를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을 들먹이며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서는 제1회전의 승리는 봉건 귀족한테 돌아갔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개신교도인 부르주아 혁명가들은 처절한 내전 끝에---비록 북부 독일에서는 봉건제의 성격을 띤 개신교가 종교로서 생존하긴 했지만---일망타진되었다. 부르주아지는 그 후 2세기 이상이나 기다려서야 비로소 1789년 파리에서 종교적 외피를 입지 않고 시작되었던 제2회전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착취와 잉여가치
노예 사회와 봉건 사회에서 상층 계급(유산 계급)은 근로 인민 대중에 대해 법적 제재력을 가져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봉건 영주나 노예 소유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즉, 농노나 노예)이 달아나버려, 특권 계급 자신을 위해 노동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인격에 대해 그러한 법적 제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가를 위해 일하기를 거부하는 노동자가 굶어 죽게 될 것이 보장될 수만 있다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소유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소유하는 대신에 노동자의 생계 원천, 즉 기계와 공장을 소유하고 지배한다면 그들은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적 생활 필수품은 인간의 노동으로 생산된다. 그러나, 땅을 경작할 도구와 자연에서 얻는 원료를 가공할 도구가 없으면, 그 노동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그 도구는 호미와 쟁기 같은 간단한 농기구로부터 현대의 자동화한 공장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기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도구 없이는 가장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조차도 육체적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생산할 수 없다.
현대 인류가 아득한 석기 시대의 조상들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도구들---보통 생산수단(means of production)이라 부르는---의 발전이다. 자본주의는 소수가 이러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재산 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컨대, 오늘날 영국 인구의 1퍼센트가 산업(여기서는 농업도 포함됨--옮긴이) 주식과 유가증권의 84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 생산수단---기계·공장·유전·비옥한 농토 등---의 대부분에 대한 효율적인 지배(소유, 관리, 통제를 포함한 개념--옮긴이)가 그들의 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인민 대중(민중)에게 그러한 일터(작업장)와 생산수단을 가동시켜 노동하도록 허락하면 대중은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는 것이다. 이 점(자본가 계급이 생산수단을 지배한다는 점)이 자본가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는데도---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주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에 대해 독점적 지배력을 확립하는 데는 수세기가 걸렸다. 예컨대, 17, 18세기의 영국 의회는 농민을 그들의 생산수단---그들이 수세기 동안 경작해 왔던 토지---에서 몰아내는 종획법(Enclosure Acts: 지주가 자기 토지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농민을 쫓아낸 후 목양장(牧羊場)을 만들 수 있게 한 법령--옮긴이)을 처음으로 통과시켰다. 토지는 특정 자본가 계급의 재산이 되어 버렸고,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 대중은 살아 가기 위해 자본가들한테 자기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이렇게 독점하게 되자, 자본가는 인민 대중이 함께 자유와 균등한 정치적 권리들을 누릴 수 있게 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아무리 "자유롭다"고 해도 여전히 생계를 위해 노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친(親)자본가 경제학자들은 당시 일어난 상황에 대해 단순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을 임금을 지불하고 사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가는 '노동'에 대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는 다른 사람한테 가서 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가는 "정당한 하루의 임금"을 주고, 그 보답으로 노동자는 "정당한 하루의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친자본가 경제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이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윤은 자본가가 자기의 생산수단, 즉 자신의 자본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 "희생"에 대한 "대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노동자한테는 전혀 곧이들리지 않는 논리이다.
"순 이윤율"이 10%라고 발표하는 한 회사를 예로 들어 보자. 그 회사의 자본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기계, 공장 등의 비용이 1억 파운드라면, 해마다 마모되는 기계를 대치하는 비용(감가상각비)과 원료 비용 및 임금을 지불하고도 그 회사는 천만 파운드의 이윤을 남겼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10년 후에 그 회사가 1억 파운드---원래의 투자액 전비용에 해당하는---의 총이윤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만약 이윤이 "희생"에 대한 "대가"라면, 분명히 10년 후에 모든 이윤은 중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때가 되면 자본가는 자기가 처음에 투자한 돈을 전액 되돌려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가는 이전보다 두 배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원(原)투자액과 그 동안 축적된 이윤을 몽땅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이렇게 되는 동안 노동자는 자기 삶의 에너지를 하루에 8시간씩, 일년에 300일을 공장에서 일하는 데 희생시켜 왔다. 노동자도 자본가와 같이 10년 후에 두 배로 잘 살게 되었는가? 분명코 그렇지 않다. 비록 노동자가 열심히 저축을 했다 해도 전기밥솥, 냉장고, 세탁기 이상으로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노동자가 결코 자기가 일하는 공장을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을 수 없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정당한 하루의 보수에 대한 정당한 하루 일"이라는 방식은, 노동자를 자본도 없고 그저 대략 똑같은 임금을 받기 위해 계속 노동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팽개쳐 두었지만, 자본가의 자본은 배가 시켜 놓았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평등"권은 불평등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위대한 발견 가운데 하나가 이 명백한 변칙에 대한 설명이었다. 자본가로 하여금 자기 노동자들이 행한 노동의 가치 전부를 지불하도록 강요하는 (법적·정치적·경제적) 장치는 없다. 예컨대, 오늘날 기계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한 주일에 190~200파운드에 해당하는 생산물을 새로이 산출해 낸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곧 그 노동자가 이 액수를 전부 지불 받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노동자는 훨씬 적은 액수를 받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동 외에 달리 택할 길은 굶주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생산하는 것의 가치 전부를 요구하지 않고, '그저 참을 만한' 생활 수준을 가능케 할 만큼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기의 모든 능력을 다 쏟아낼 수 있을 만큼의 대가를 지불받는다. 즉, 자본가가 날마다 부려먹을 수 있도록 자기의 일할 능력(마르크스가 노동력 labour power이라고 부른 것)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받는 것이다.
노동자들 자신이 일할 수 있도록 건강을 유지하고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가 될 아이들을 양육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보수를 노동자들이 받는다면, 자본가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력에 대해 "정당한"액수를 지불받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부(富)의 양은 그들이 일단 노동해서 생산할 수 있는 부의 양보다 훨씬 더 적다. 즉, 노동자들의 노동력 가치는 그들의 노동으로 창조되는 가치보다 훨씬 적은 것이다.
그 차액은 자본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마라크스는 그것을 잉여가치(surplus value)라고 불렀다.
자본의 자기증식(自己增殖)
현(現)체제를 변호하는 자들의 글을 읽게 되면, 그들이 이상한(그러나 그들한테는 당연한) 관념을 공유하고 있음을 금방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즉, 그들에 따르면 돈(화폐)은 마술적 속성을 갖고 있어서 식물이나 동물처럼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자본가는 은행에 돈을 예금할 때 그 돈의 액수가 늘어날 것을 기대한다. 자본가는 돈을 주식에 투자할 때 그 돈이 배당금의 형태로---해마다 새로운 돈을 '새끼 쳐서'---보상되기를 기대한다. 칼 마르크스는 '돈이 돈을 낳는' 현상을 주목해 '자본의 자기증식'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마르크스의 설명은 화폐가 아니라 노동과 생산수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ㅎ녀재의 사회에서 충분한 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을 돈으로 살 수 있고, 생산수단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다른 모든 사람이 자기들한테 팔게 할 수 있다. '자본의 자기증식'의 비밀, 즉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돈이 기적처럼 불어날 수 있는 비밀은 이러한 노동력을 사고 파는 데 있다.
반복해 강조하면, 자본가는 애당초부터---발전도상국은 국가 권력과 유착하여 받은 특혜 융자와 외국에서 도입된 자본(원조·차관 등)을 통해---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을 살 만큼 충분한 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고용하고 있는 각 노동자로부터 날마다 뽑아 내는 잉여가치로 더욱더 부유해지는 것이 보장된다. 어떤 자연 법칙이 아니라, 자본가의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싸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그의 돈은 계속 불어나는 것, 즉 그의 자본은 계속 증식되는 것이다.
배당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자기가 투자한 기업의 노동자를 단 한 명도, 단 한번도 대면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한테 수입을 주는 것은 돈의 신비스러운 힘이 아니라 그 노동자들이 흘린 피땀이다.(은행이나 증권 회사와 같은 금융 기관 등을 매개로 하여 이자 소득을 얻는 자산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배당금, 이자, 그리고 이윤은 모두 잉여가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가 일해서 얼마나 받는가 하는 것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고용주는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임금을 주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가가 더이상 깎아내릴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들 가운데 어떤 것은 육체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노동자들한테 하도 형편없는 임금을 주어 그들이 영양실조로 허덕여 일에 아무런 노력도 기울일 수 없다면 이는 무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기계 위에서 잠들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밤에는 일에서 벗어나 휴식할 보금자리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들이 약간 "사치스럽다"고 여기기도 하는 것, 즉 가끔 저녁에 술을 조금 마신다든가 텔레비젼을 본다든가 가끔 휴일을 즐길 수 있도록 적절한 보수를 생각해 주는 것은 자본가한테도 유익한 일이다. 이 모든 것들은 노동자가 더 상쾌한 기분으로 더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 모두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새로 보충하는 데 이바지한다. 임금이 너무 낮게 "책정"되면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자본가는 또한, 또 다른 것을 걱정해야 한다. 현재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그의 회사는 오랫 동안 존속한다는 사실이다. 회사는 현재 노동자의 자녀들이 노동력까지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한테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을 정도로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 또한, 자본가들은 정부가 이들 노동자 자녀들한테 교육 제도를 통해(읽기·쓰기·셈하기와 같은) 일정한 기술들을 가르치도록 책임을 분담시켜야 한다. 그러나, 특히 "저발전국"의 경우, 교육비를 조달할 수 없는 임금 수준은 미성년자나 부녀자들까지도 공장에 나가 일하게 만든다.
실제로, 또 다른 것이 역시 문제가 된다. 즉, 노동자가 어느 정도를 "괜찮은" 임금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보다 상당히 적게 보수를 받는 노동자는 자기 일을 "별볼일 없다"고 생각해 일자리를 잃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일을 소홀히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임금을 결정하는 이 모든 요인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그 모든 요인들은 자본가가 일당으로 사들이는 노동자의 노동력, 즉 그의 생활 에너지를 보장하는 수준을 지향한다. 노동자는 자기와 자기 가족이 계속 "먹고 살" 수 있고, 자기가 계속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할 만큼의 비용을 지불받는 것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 관해 한 가지 점이 더 지적되어야 한다. 막대한 양의 부가 경찰력과 군사력 같은 것에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과 군대 등은 국가가 운영하지만, 사실은 자본가 계급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즉, 군대와 경찰 등의 국가 군사·관료 기구)을 위해 소요되는 가치는---노동자들한테 귀속되지 않은---노동자들한테서 착취되어 자본가들의 주머니로 들어간 가치이다. 다시 말해 이것 또한 잉여가치의 일부이다.
결론적으로, 잉여가치=이윤+임대료+이자+국가(정부, 행정기관, 군대, 경찰, 감옥, 사법부 등)에 쓰이는 비용이다.
5 노동 가치 이론
"그러나, 기계, 즉 자본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재화를 생산한다. 만약 그렇다면, 노동은 물론 자본도 또한 부(富) 생산의 일부를 담당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모든 생산 요소는 그 대가를 마땅히 받아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친(親)자본가적 경제학을 배운 자들이 착취와 잉여가치(surplus value)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석에 대해 응답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론은 얼핏 듣기에 제법 그럴 듯해 보인다. 왜냐하면, 확실히 우리는 자본 없이는 재화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 없이 상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결코 없다. 우리의 출발점은 그러나 상당히 다르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자본은 어디서 나왔는가?" "생산수단은 맨처음 어떻게 생겼는가?"
그 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인간이 부를 창조하기 위해 역사상 사용해 온 모든 것은---신석기 시대의 돌도끼이건 또는 현대의 컴퓨터이건 간에---일단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 비록 도끼나 다른 도구들을 사용해서 만들어졌다고 할지라도, 이번에 그 도구들도 역시 그 이전에 행해진 노동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을 일컬어 "죽은 노동"이라고 불렀던 이유이다. 기업주들이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을 자랑할 때, 그들은 사실 그 이전 세대들이 행한 광대한 양의 집적된 노동을 지배(소유, 관리, 통제를 총괄하는 개념이다--옮긴이)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전 세대의 집적된 노동)은 그들 자본가들이 현재 하고 있는 만큼의 일만 했던 선조(혹은 선배)자본가들의 "노동"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개념은---보통 노동 가치론이라고 하는데---마르크스의 독창적 발견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시대까지 모든 훌륭한 친자본가 경제학자들조차 그것을 받아들였다.
영국 경제학자들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나 리카도(David Ricardo) 같은 사람들은 산업(여기서는 광공업을 가리킨다--옮긴이)자본주의 체제가 아직 초기 단계였을 때---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1789~99)을 전후한 시기에---이론적 저술 활동을 했다. 자본가들은 아직 (정치적으로)지배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자기들이 지배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부의 진정한 원천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스미스와 리카도는 이들 자본가들에게 "노동이 부를 창조하며, 따라서 부를 축적하려면 자본가들이 노동을 자본주의 이전에 속하는(전근대적인) 구 지배자들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말해 줌으로써 자본가들의 이익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노동계급과 친밀한 사상가들이 스미스와 리카도의 친구들(자본가 계급)에 대항하여 바로 그 주장을 되써먹기 시작했다. 즉, 그 친(親)노동자 사상가들은 노동이 부를 창조하는 동시에 노동은 또한 자본을 창조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본의 "권리"는 강탈당한 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반박했던 것이다.
그러자 곧 자본을 정당화·합리화해 줌으로써 자본가를 지원하는 경제학자들은 노동 가치 이론이 말도 안 되는 애물덩어리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은 앞문으로 차내면 뒷문으로 기어들어 오는 법이다.
영국방송협회(BBC) 텔레비젼 뉴스를 들어 보라. 자본가의 대변인들은, "노사 분규"(labor disputes)로 인해 "대폭적인" 임금 인상이 있으면 "기업인"의 투자가 위축되어 "성장"(도대체 누구를 위한 성장이길래?)이 둔화될 것이므로 실업자가 급증할 것이고, 또한 고율의 인플레가 유발되어 결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감소시키고야 말 것이라고 약올리고 위축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니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라고 노동자들의 다짐을 받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맞는가 틀리는가 하는 것은 잠시 접어 두자.(사실, 접어 두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투자를 위축시키고 성장을 둔화시키는 것은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통제를 강화하고 다른 기업과 벌이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동화와 기계화를 추진하는 것이 이윤율---우리는 이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을 저하시키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그 대신에, 그 주장이 제기되는 방식을 면밀히 살펴보자. 그들은 "기계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아니,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은 노동자들, 즉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인 즉,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더 많은 부가 창조될 것이고, 이는 다시 새 기계를 더 많이 투자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자기들 자신은 모를지라도---더 많은 노동(량)이 더 많은 자본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것을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일, 즉 노동이야말로 부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셈이다!
내가 주머니에 1파운드의 지폐를 갖고 있다고 하자. 왜 그것이 나한테 유용한가? 결국 그것은 인쇄된 종이 조각일 뿐이다. 그것이 나한테 가치가 있다는 것은, 내가 다른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유용한 물건을 그것과 교환해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 1파운드의 지폐는 그만한 양의 노동의 산물을 살 수 있는 권리일 뿐이다. 2파운드의 지폐는 그 두 배의 노동의 산물을 살 수 있는 권리이고, 3파운드의 지폐는 3배의 노동의 산물을 살 수 있는 권리이며 ...... 등이다.
우리가 부를 측량한다는 것은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들인 노동(량)을 측량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주어진 일정한 시간의 노동으로 같은 양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내가 책상을 만들기 시작하면 숙련된 목수보다 시간이 5~6배 더 걸릴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아무도 내가 만든 책상이 숙련된 목수가 만든 책상보다 5~6배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 책상을 만드는 데 목수의 노동---나의 나동이 아니라---이 얼마만큼이나 필요했는가에 따라 그 가치를 매길 것이다.
목수가 책상을 만드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고 하자. 그러면, 사람들은 책상의 가치가 한 시간의 노동에 상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즉, 책상의 가치는 현사회에서 보통 수준의 기술과 숙련도로 그것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노동 시간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어떤 물건의 가치 척도는 단순히 한 개인이 그것을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이 아니라, 평균 수준의 기술과 평균 수준의 숙련도를 가지고 일하는 개인이 들이는 시간---그는 이 필요한 평균 수준의 노동을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불렀다---임을 지적했다. 자본주의에서는 기술 진보가 계속 일어나고 있고, 따라서 재화를 생산하는 데 드는 노동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이 점은 중요하다.
예컨대, 진공관을 가지고 라디오를 만들던 때에 라디오는 매우 비쌌다. 왜냐하면, 진공관을 만들고 그것들을 선으로 연결하는 일 등에 많은 노동(량 혹은 시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후 훨씬 적은 노동으로 만들어지고 연결될 수 있는 트랜지스터가 발명되었다. 여전히 지공관 라디오를 만들고 있던 모든 공장 노동자들은 자기들이 생사하고 있는 라디오의 가치가 갑자기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라디오의 가치는 더이상 진공관을 가지고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트랜지스터를 갖고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한 가지 요점이 있다. 어떤 상품들의 가격은 날마다 또는 주마다 크게 오르락내리락 한다. 이런 변화(가격 변화)는 그 상품들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의 변화(가치의 변화) 외에도 다른 많은 요인들로 인해 일어날 수 있다.
브라질에 서리가 내려 모든 커피 작물이 죽었을 때, 전세계적으로 커피가 값이 폭등했다. 만일 내일 어떤 천재지변이 멕시코의 모든 텔레비젼을 파괴한다면, 텔레비젼 값이 똑같은 식으로 오를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경제학자들이 수요와 공급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와 같은 가격 변동을 끊임없이 일으킨다.
이런 이유로 많은 친자본가적 경제학자들이 노동 가치 이론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단지 수요와 공급만이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물건 값이 오르내릴 때 그것은 평균적 수준을 중심으로 오르내린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의 수면은 조수 때문에 높아지고 낮아지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해수면"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일정한 지점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이 대목에 대하여 홈페이지 주인이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사실 앞의 해수면에 관한 설명은 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수요 공급의 법칙은 여러 상품들 사이에 교환되는 비율을 결정하는 데는 아무런 설명도 해줄수 없다. 예를 들자면 지우개 5개와 공책 한개가 어떻게 같은 가치로 평가되어 교환이 가능한지 같은 경우에 대해서 왜 그러한 비율로 교환이 되는지는 설명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가격이 매일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사실을 그 가격이 오르내리는 중심으로서 일정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모든 텔레비젼이 (천재지변 등으로 인해)파괴된다면, 처음에 생산되는 신품은 수요가 아주 많을 것이므로 높은 가격에 팔릴 것이다. 그러나, 머지 않아 더욱더 많은 물건이 시장에 나와 서로 경쟁하게 되면, 결국 텔레비젼 가격은 하락하여 그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표시된 그것의 가치에 가까워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경쟁과 축적
자본주의가 역동적이고 진보적인 체제인 것으로 보였던 시대가 있었다. 대부분의 인류 역사를 통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은 고된 노동과 착취에 지배되어 왔다. 18세기와 19세기에 산업 자본주의가 출현했을 때에도 그것이 이런 사정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산업 자본주의는 어떤 유용한 목적을 위해 이런 고된 노동과 착취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소수의 기생적 귀족을 위한 사치품과 죽은 군주를 위한 사치스런 무덤을 만들거나 황제의 아들이 신이 저버린 후미진 곳을 지배하기 위한 쓸데없는 전쟁에 거대한 양의 부를 낭비하는 대신에, 산업 자본주의는 더 많은 부를 만들어 내기 위한 수단들을 생산하는 데 부를 사용했다. 자본주의의 발흥은 산업, 도시, 운송 수단이 그 이전의 인류 역사에서는 꿈꿀 수도 없었던 규모로 성장한 시기였다.
오늘날은 이상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영국의 올드햄, 핼리팩스, 빙글리와 같은 고장은 기적의 산실이었다. 인류는 전에는 결코 그렇게 많은 원면과 양모가 그렇게 빠리 수백만 명의 옷을 만들 수 있는 옷감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자본가들이 가진 어떤 특별하 미덕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용한 노동에 대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지불함으로써 자기들의 손에 더 많은 부를 얻는 데만 사로잡혀 있는, 언제나 매우 유해한 사람들이었다.
자본주의 이전의 많은 지배계급들(노예 소유주, 영주 등)은, 산업을 건설하지 않았을 뿐, 이런 점에서 자본가들과 흡사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그 이전의 지배계급과 달랐다.
첫째로, 우리가 이미 다루었던 것인데, 즉 자본가들은 노동자(피착취 직접 생산자)들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 대신 노동자들한테 그들의 일할 능력, 즉 그들의 노동력에 대해 시간당으로 지불했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라 "임금 노예"들을 사용한 것이다. 둘째로, 자본가들은 자기들의 노동자들이 생산해 낸 재화를 자기들 스스로가 소비하지 않았다. 봉건 영주는 농노가 생산해 낸 고기, 빵, 치즈, 술 등을 '직접 소비'하며 살았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생산한 재화를 다른 사람들한테 '팔아서' 살았다. 즉, 시장에서 상품을 팔아 이윤을 얻으며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노예 소유주 개인이나 봉건 영주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행할 수 있었던 자유보다 더 작은 자유를 자본가 개인에게 주었다. 상품을 팔기 위해서 자본가들은 그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싸게 생산해야 했다. 자본가는 공장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는 전지전능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힘을 쓸 수는 없었다. 그는 다른 공장들과 경쟁할 필요에 굴복해야 했다.
우리의 친애하는 자본가, 비룡 그룹의 김덕배 회장(브라우닝 브라우니 경을 이렇게 번역했음--옮긴이)을 예로 들어 보자. 그의 공장에서 생산된 일정량의 면포가 만들어지는 데 10시간의 노동이 들었다고 하자. 그러나, 다른 어떤 공장은 5시간의 노동으로 같은 양의 면포를 생산할 수 있었다고 하자. 김덕배 회장은 면포에 대해 10시간의 노동과 똑같은 가격그오 값을 매길 수는 없는 것이다.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더 싼 면포가 있는데도 비싼 가격을 사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사업을 할 수 있기를 원하는 자본가라면 누구나 자기가 고용한 노동자들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일하도록 확실히 해 두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또한 그가 고용한 노동자들이 다른 자본가들한테 고용된 노동자들보다 단위 시간당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가장 최신의 기계를 갖고 일을 하게끔 해야 했다. 사업을 계속하고자 하는 자본가는 더 많은 생산수단을 소유해야 했다.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자본을 축적해야 했던 것이다.
자본가들간의 경쟁은 그들 모두를 속박하는 시장 체제라는 하나의 힘을 낳았다. 경쟁은 자본가들이 항상 노동 과정을 가속시키도록 강요했고, 그리하여 새로운 기계에 그들이 투자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자본을 투자하게 했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될 수 있는 한 최저 수준으로 유지함으로써만 새로운 기계를 구비할 수 있었다.(물론 한편으로는 자기들 자신의 사치품도 살 수 있기도 했지만.)
마르크스는 주요 저작인 『자본론』에서 자본가는 구두쇠처럼 점점 더 많은 부를 얻는 데 골몰하게 된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구두쇠한테는 단순히 독특한 개성인 탐욕이 자본가한테는, 그가 단지 여러 바퀴 중의 하나일 뿐인 사회 구조(메커니즘)의 산물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자본가로 하여금 일정한 산업 부문에 투자된 자본의 양을 계속 증대시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으며,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인 경쟁이 개개 자본가들한테 외부의 강제적 법칙으로서 느껴지도록 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경쟁은 자본가로 하여금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의 자본을 증식시키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자본가는 누적적 축적을 통해서만 그의 자본을 증식할 수 있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이것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이시다!
생산은 인간의 욕구---심지어 자본가 계급의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자본가가 다른 자본가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루어지고 있다. 각 자본가에게 고용된 노동자들은, 다른 기업주들보다 더 빨리 축적하려는 고용주들의 욕구에 자기들의 삶이 지배당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바처럼, "부르주아 사회에서 산 노동은 죽은 노동(생산수단--옮긴이)을 축적하는 수단일 뿐이다...... 살아 있는 사람(노동자--옮긴이)은 종속되어 있고 아무런 개성도 없는 반면, 자본은 독립적이고 개성을 갖고 있다."
자본가들이 다른 자본가들과 벌이는 경쟁에서 자본을 축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압력은, 자본주의 체제 초기의 산업의 급속한 진보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문제가 결과로서 나타났다. 그것은 반복되는 경제 공황이었다. 공황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 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6 경제 공황
"한편에서 부의 축적, 또 다른 한편에서 빈곤의 축적"---마르크스는 이 말로써 자본주의가 가진 경향을 요약했다. 모든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와 벌이는 경쟁을 두려워하며,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을 하도록 하면서도 될 수 있는 대로 낮은 임금을 지불한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생산수단의 대폭적인 증대'와 다른 한편으로는 '고용된 노동자 수와 임금의 제한된 증대' 사이의 불비례 현상이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경제 공황의 기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살펴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누가 (갈수록 양적으로 급증하고 있는) 상품을 살 것인가?' 하고 묻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저임금은 그들이 자기 노동으로 생산된 상품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임금을 올리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임금 인상은 자본주의 체제의 원동력인 이윤을 감소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의 기업이 생산된 상품을 팔 수 없다면, 그 기업은 공장문을 닫고 노동자를 해고해야 한다. 그러면 임금으로 지출되는 총액은 훨씬 더 줄어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때문에) 더 많은 기업들이 자기들의 상품을 팔 수 없게 된다. "과잉 생산"의 위기가 시작되고, 대중이 구매할 수 없는(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상품들이 경제 전반에 걸쳐 쌓이게 된다.
이것은 지난 170여 년 동안 자본주의 사회에서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재치 있게 옹호하는 자들은 공황에서 빠져나오는 쉬운 길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에 따르면, 필요한 모든 것은 자본가들이 새로운 공장과 기계에 그들의 이윤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규 투자는 노동자들한테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고, 이번에는 이것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팔리지 않는 상품을 살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규 투자가 있는 한 생산된 모든 상품은 팔릴 수 있고 자본주의 체제는 완전 고용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함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가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을 계속 투자하게 만드는 경쟁 압력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임을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경쟁 압력이 있다고 해서 자본가들이 자기들의 모든 이윤을 언제든지 투자하려 할 것인가 하고 물었다. 자본가는 "합당한" 이윤이 보장된다고 생각할 때에만 상품에 투자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그러한 이윤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는 그의 돈을 투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은행에 넣어 두고 있을 것이다(아니면 투기나 사채놀이를 할 것이다).
자본가가 투자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그가 경제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경제 상황이 좋아 보이면, 자본가들은 모두 동시에 투자하기 위해 덤벼들어 건설부지를 찾고, 기계를 구입하고, 원자재를 찾아 지구를 샅샅이 뒤지고, 숙련된 노동을 돈을 특별히 더 주고 쓰는 등 서로 부딪쳐서 나자빠질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소위 "호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토지, 원자재, 숙련 노동을 확보하기 위한 광기어린 경쟁은 그것들의 가격을 상승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기업들은 그것들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이 올라 자기들의 모든 이윤이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음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투자 붐이 갑자기 투자 위축으로 바뀐다. 어느 누구도 새로운 공장을 지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건설 노동자들이 해고된다. 아무도 새로운 기계를 사길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기계 도구 산업이 공황에 직면한다. 아무도 생산되고 있는 철과 강철을 사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철강 산업의 가동률이 갑자기 평균 수준 훨씬 이하로 떨어지고, 이윤이 남지 않게 된다. 폐업과 조업 중단이 전산업으로 파급되면서 일자리가 없어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이 다른 산업 부문의 상품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이 대폭 하락한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한편에서는 수요가 뒷받침되지 않는 상품 더미가 썩어가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빈 공장 밖에서 실직한 노동자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머리가 돌아버릴 듯한 상태 그러니까 주기적 공황이 거듭되어 온 역사이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과잉 생산" 위기를 주기적으로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무계획적이므로 자본이 갑자기 투자로 밀려들고 빠져나가는 것을 중단시킬 아무런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국가가 이런 위기를 중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사적 투자가 잘 안 될 떄는 국가 투자를 늘리고 사적 투자가 너무 많은 때는 국가 투자를 줄이는 식으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함으로써, 국가는 생산을 고르게 안정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 투자 역시 바보 같은 짓에 속한다.
<¿µ±¹Ã¶°>(British Steel) 회사를 보라. 몇 해 전, 더 많은 철강을 더 싸게 생산하기 위해 고안된 거대한 현대식 자동 용광로 때문에 철강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아직도 더 많은 철강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영국은 이러한 대규모 투자 계획에 착수했던 유일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 독일, 미국, 브라질, 동유럽, 심지어 한국조차 똑같이 투자를 했다. 이제 세계적으로 강철이 남아돈다. 즉, 과잉 생산 위기인 것이다. 국가 투자는 감축되고 있다.
물론, 철강 노동자들도 위의 두 가지 방식 모두로 고통받고 있다.
이것은 부의 대량 생산이 오직 이윤에만 관심이 있는 소수의 특권 집단이 지배하는 경제 체제(즉,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인류가 지불하고 있는 대가이다. 이들 소수의 특권 집단들이 직접 산업체를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국가에 대한 통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산업을 통제하고 있느냐(영국철강의 경우처럼)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 소수의 특권 집단인 자본가들이 국내적으로건 국제적으로건 이러한 통제력을 이용하여 최대 몫의 이윤을 위하여 서로 경쟁하는 이면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마지막 광기는 이른바 "과잉 생산"의 위기가 결코 진짜 과잉 생산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예컨대, "남아도는" 강철은 세계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곳곳에는 아직도 나무 쟁기로 땅을 갈아야 하는 농민들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철로 만든 쟁기는 식량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돈이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그들한테 도대체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이윤을 획득할 수 없을 테니까.
공황이 심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황이 단조로운 규칙성을 띠고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마르크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황이 악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투자가 특별한 기복이 없이 균등한 비율로 이루어질 때조차 자본주의는 공황으로 향하는 전반적인 추세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과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이 자본가들로 하여금 노동 절약 설비에 투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날 영국에서 거의 모든 신규 투자는 고용되는 노동자 수를 줄이기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지난 20년 동안 산출량은 약간 늘었으면서도 현재 영국 산업에 고용된 노동자의 수가 10년 전의 고용된 산업 노동자 수보다 더 적다.
생산을 "합리화"함으로써만, 그러니까 생산성을 증대시킴으로써만, 그리고 노동력을 감축시킴으로써만, 한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보다 더 큰 몫의 이윤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체제 전반에 미치는 결과는 파괴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생산성이 증대한다고 해서 노동자의 수가 투자와 같은 속도로 증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체제가 계속 돌아가게 하는 연료인 이윤의 원천은 노동자들의 노동이다. 만약 당신이 투자에 상응하는 이윤의 원천(노동)의 증가 없이 점점 더 많은 투자를 한다면, 당신은 파산을 향하고 잇는 것이 된다. 마치 4기통 승용차를 굴리는 데 필요한 휘발유의 양으로 12기통 스포츠카를 몰려고 생각한다면 고장나는 것이 확실하듯이 말이다. 이 점은, 120여 년 전 마르크스가 "신규 설비에 거액의 투자를 쏟아 넣는 데 자본주의가 성공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갈수록 악화되는 공황을 뜻하는, 이윤율 저하 경향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던 이유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오날늘의 자본주의에 아주 간단하게 적용될 수 있다. "불황"에서 "호황"으로 전환된다는, 그러니까 "어려운" 시절에서 "좋은" 시절로 전환된다는, 낡은 경제변동론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끝없는 경기 침체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기 호전의 시기, 혹은 실업의 감소는 한계가 있고 극히 짧다.
(자본주의)체제를 옹호하는 자들은, 이런 현상이 투자 수준이 충분히 높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신규 투자가 없으면 새로운 일자리도 없고, 새로운 일자리가 없으면 새로운 상품을 살 돈도 없게 된다는 그들의 지적에 관한 한 우리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설명"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임금을 탓한다. 임금이 너무 높아서 이윤을 압박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투자하기를 겁내는 것은 "충분한 보답"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체제 옹호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정부의 임금 정책이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떨어뜨리고 이윤을 크게 해주었는데도 공황은 계속되어 왔다. 예컨대,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진 반면---상위 10%의 소득은 1974년 전체 국민 수득의 57.8%에서 1976년 60%로 상승했다---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은 20세기 들어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으며, 1975~78년은 심각한 공황기였다.
아직도 공황을 종식시키기에 충분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 미국, 서독 등 임금이 떨어져 온 다른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120년 전에 마르크스가 말한 것을 듣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노동을 가동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투자만큼 이윤의 원천인 노동이 빨리 증가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공황은 심화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1인을 고용하기 위해 필요한 공장과 기계의 가치가 상당히 낮았을 때 글을 썼다. 노동자 1인당 자본 가치는 그 때부터 폭등하여 마침내 오늘날은 2만 파운드, 심지어 3만 파운드에 달한다. 자본주의 기업간의 경쟁은 자본가로 하여금 더욱 크고 더욱 비싼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왔다. 이제 대부분의 산업에서 기계를 새로 도입하면 노동자 수를 줄이는 것이 당연한 일로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국제적, 경제 기구인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는, 세계의 주요 국민경제의 고용 수준은 기적이 일어나 투자가 급증한다고 해도 계속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해 왔다.
투자는 급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은 그들의 이윤에 신경을 쓰기 때문에 자기들의 투자가 4배 증가해도 이윤은 겨우 2배가 된다면 그들은 정말로 속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이윤의 원천인 노동보다 산업이 더 빨리 성장하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인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바와 같이 '이윤율'(총이윤/총투하자본)은 저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어떤 새로운 투자도 위험한 모험으로 보이는 시점이 결국 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새로운 공장과 기계에 필요한 지출액의 규모는 어마어마할 것이지만, 이윤율은 전보다 더 낮아질 것이다. 이런 시점에 이르렀을 때 각 자본가(혹은 자본주의 국가)는 새로운 초대규모 투자 계획을 꿈꿀 수는 있지만 파산의 두려움 때문에 실행에 옮기기를 두려워할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경제는 이와 아주 흡사하다. 영국의 로버(Rover)사는 새로운 생산 라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손해를 볼까 두려워하고 있다. <¿µ±¹Ã¶°>(British Steel) 회사도 그들이 15년 전에 계획했던 거대한 공장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의 생산량을 팔 수 없기 때문에 그 거대한 공장 건설 계획을 동결해 두어야 한다. 일본 조선업자들도 새로운 조선소에 투자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일부 낡은 조선소들은 문을 닫고 있다.
더 거대하고, 더 생산성이 높은 기계를 설치하는 데 자본주의가 성공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자본주의를 명백히 영구적 공황으로 몰아간 것이다.
고대 노예 사회와 중세 봉건 사회는, 혁명이 일어나 사회를 변혁시키거나 사회를 퇴보시키는 영구적 위기에 돌입하는 양단간의 사태에 이른 바 있었다. 로마의 경우에 혁명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의 문명은 파괴되고 암흑 시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어떤 봉건 사회의 경우---영국과, 그 후의 프랑스도---혁명이 낡은 질서를 파괴하여 자본주의 하에서 새로운 사회적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제 자본주의 그 자체는 영구적 위기로 인해, 결국 인류가 기아와 전쟁의 야만주의로 퇴보할 것이냐 아니면 사회주의 혁명이냐 하는 선택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7 노동자 계급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존재하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는 말로 『공산당 선언』을 시작했다.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을 위해 부를 생산하도록 지배계급이 어떻게 강요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전의 역사에서 자주 내전으로 비화한 계급간의 대규모 투쟁이 발생해 왔다. 고대 로마의 노예 반란, 중세 유럽의 농민 봉기, 17세기와 18세기의 대규모 내전과 혁명이 그것이다.
이들 모든 대규모 투쟁에서 대중 봉기 세력은 사회의 가장 억압받는 층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재빨리 덧붙여 말한 바와 같이, 그 반란과 봉기의 결과는 피지배 계급의 모든 노력이 하나의 특권적인 소수의 지배자들을 또 다른 소수의 지배자들로 교체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컨대, 고대 중국에서는 몇 차례의 성공한 농민 반란이 있었지만, 농민들은 단지 하나의 왕조를 다른 왕조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비슷한 경우로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힘을 발휘한 계급은 파리의 무산 계급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마지막에 가서 사회는 그들이 지배하지 못하고 왕과 귀족을 대신한 은행가와 실업가들이 지배했다.
하층 계급이 자기들이 싸운 혁명을 지속적으로 지도하는 데 실패한 것은 두 가지 주요한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사회의 일반적 부(富)의 수준이 너무 낮았다. 아주 소수층만이 문명을 지탱하기 위한 예술과 학문을 발전시킬 만한 시간과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 이유는, 단지 광범위한 인민 대중이 아주 심각한 빈곤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가 진보하려면 계급 분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 피억압 계급의 비참한 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사회를 이끌어 갈 준비를 갖추지 못하게 했다. 대체로 피지배 계급은 문맹이었고, 자신들의 고유한 생활 터전 밖의 사정이 어떤지 알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의 일상 생활이 그들을 제작기 분리시켜 버렸다. 농민은 자기 땅을 경작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고, 도시 수공업자는 자신의 소규모 사업을 운영하는 데만 몰두하여 다른 수공업자들과 단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들과 어느 정도 경쟁 관계에 있었다.
농민 봉기는 지방 봉건 영주들의 토지를 분배받기 위해 분기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되곤 했으나, 일단 영주들을 패퇴시키면 농민들은 토지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하는 것을 둘러싸고 자기들끼리 싸우곤 했다. 마르크스가 말한 바와 같이, 농민들은 "자루 속에 든 감자"와 같았다. 곧, 농민들은 어떤 외부의 억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할 수는 있었으나, 자기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영구히 연합할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부를 창조하는 노동자들은 이제까지 존재했던 모든 하층 계급하고는 다르다. 첫째, 이제는 더 이상 인류의 진보를 위해 계급 분화가 필요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주기적으로 전쟁이나 경제 공황을 통해 거대한 양의 부를 파괴할 만큼 엄청난 부가 창출되고 있다. 부는 평등하게 분배될 수 있고, 사회는 학문과 예술 등이 만개할 수 있다.
둘째, 자본주의에서 삶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노동자들한테 사회를 관리할 수 있는 준비를 시킨다. 예컨대, 자본주의는 교육받고 숙련된 노동자들을 필요로 한다. 또한, 자본주의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대도시권의 대공장으로 몰아넣는데, 거기서 그들은 서로 긴밀하게 접촉하게 되고 또한 사회를 변혁하는 데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는 공장 안에서 생산을 통해 노동자들이 서로 협력하게 만들고, 노동자들의 그러한 협력 기술은,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노동조합으로 조직할 때와 같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것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대규모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거대한 기구들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피지배 계급이 그렇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더구나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일반 노동자들보다 한 계단 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가령 사무직 노동자나 기술자)의 집단을 다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조합 등을 조직해야만 하는 임금 노동자로 전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마지막으로, 교통과 통신의 발달---철도, 도로, 항공, 우편, 전화, 라디오, 텔레비젼 등---은 노동자들한테 그들이 생활하고 있는 지역이나 그들이 종사하는 산업의 외부와 교류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전국적 및 국제적 규모로---이전의 피지배 계급이 가졌던 비젼을 초월하여---하나의 계급으로 조직될 수 있다.
이 모든 사실들은, 노동계급이 기존 사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음을 뜻한다.---다른 왕조나 자산가 집단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사회를 변혁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대표자를 선출하여 통제함으로써,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모든 역사적 운동은 소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운동이었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대다수를 위한, 대다수의, 자기 의식적인 독자적 운동이다."
8 사회는 어떻게 변혁될 수 있는가?
압도 다수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대체로 혁명이 없이도 사회가 변혁될 수 있다고 주장해 왔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은 더욱 많다. 그들은, 필요한 모든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전통적 정치 제도---의회와 지방 의회---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기에 충분한 대중적 지지를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사회주의자들은 기존의 국가 기구---정부, 행정기관, 사법부, 경찰, 군대, 감옥---가 사용자 계급의 힘을 제한하는 법을 시행하게 함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기존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실력 행사없이 사회주의가 도입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보통 개량주의라고 하는 것인데, 가끔 수정주의(왜냐하면 그것이 마르크스의 이념을 완전히 수정했기 때문에), 혹은 사회민주주의(1914년까지 이 용어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뜻했지만), 혹은 유로코뮤니즘(서구 공산당들의 정치 노선으로서, 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통해서 권력을 장악하는 노선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이라고 하기도 한다. 동구권에서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대중의 저항으로 무너진 뒤에 이러한 개량주의 노선은 더욱 널리 퍼지고 있다.
개량주의는 얼핏 보기에 매우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그리고 신문과 텔레지변에서 들어 온 바---국민의 민주적 의사에 따라 선출된 국회의원이 국민을 대표하고, 의회가 국정을 운영한다는 것---와도 들어맞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를 통해 사회주의를 도입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나 왔다. 이리하여 전후(제2차세계대전 후) 영국에서는 세 차례의 노동당 정부가 구성되었지만---1945년과 1966년에는 압도 다수로---오히려 1945년보다 사회주의에 더 근접하지 못했다.
다른 나라의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1970년에 칠레에서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사람들은 이것이 "사회주의로 가는 새로운 길"이라고 주장했다. 3년 뒤 아옌데 정부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은 군 장성들이 아옌데 정부를 전복해 버렸고, 칠레 노동계급 운동은 분쇄되었다.
개량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상호 연관된 이유가 있다.
첫째,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사회주의자들이 '점진적'으로 사회주의적 조치들을 도입하고 있는 동안에, 실질적은 경제력은 여전히 구 지배계급의 수중에 있다. 구 지배계급은 이러한 경제력을 사용하여 전(全) 산업 부문의 조업을 중단시킬 수도 있고, 실업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투기와 매점을 통해서 물가를 상승시킬 수도 있고, 돈을 해외로 빼돌려 국제 수지의 위기를 조장할 수도 있으며, 언론을 통하여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사회주의 정부에 돌리는 선전전을 시도할 수도 있다.
이리하여 1964년과 1966년에 해럴드 윌슨의 영국 노동장 정부는---부유한 사람들이나 기업들이 대규모로 해외로 돈을 빼돌림으로써---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여러 조치들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럴드 윌슨 자신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햇다. "우리는, 우리가 선거 공약으로 제시한 정책이 실행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국제 투기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여왕의 최고 각료인 수상은, 영구의 선거는 촌극이며 영국 국민은 정책을 선택할 수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의회민주주의에 종말을 고하도록 요구 받고 있었다."
윌슨의 의심스러운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6년 동안 그는 실제로 투기꾼들이 요구하는 종류의 정책을 추구했다는 사실이 첨가될 필요가 있다.
똑같이 고의적인 방법으로 (국내외 자본가들의 농간으로)국제 수지 위기가 조성됨으로써, 1974년에 선출된 노동당 정부는 병원, 학교, 사회 복지에 대한 공공 지출을 잇달아 세 차례나 삭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칠레의 아옌데 정부는 대기업들의 훨씬 더 커다란 붕괴 공작에 부딪혔다. "기업주들의 파업"으로 전 산업 부문의 조업이 두 번씩이나 중단되었고, 한편으로는 투기 때문에 물가가 엄청난 수준으로 폭등했으며, 상업 자본가들의 매점매석으로 생활 필수품을 구입하기 위한 줄서기 소동이 벌어졌다.
자본주의가 점진적으로 개혁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기존 국가기구가 '중립적'이 아니라 최상부에서 최하부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국가는 거의 모든, 물리력 행사 수단, 그러니까 폭력 수단을 장악하고 있다. 만약 국가 조직들이 중립적이라면, 그리하여 특정 정부가 국가 조직들에게 명하는 바를 무엇이든(사회주의적 정책이건 자본주의적 정책이건 관계없이 무엇이든) 수행한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국가는 대기업의 경제 방해 책동(자본 사보타지)을 중지시키는 데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 기구가 작동하는 방식과 명령을 실제로 누가 내리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 국가 기구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가 기구는 단지 정부만이 아니다. 국가 기구 혹은 기관은 다른 많은 부속 기관---경찰, 군대, 사법부, 공무원, 국유화한 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가진 거대한 조직체이다. 국가의 이러한 다른 부속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노동계급이다. 그들도 노동자들처럼 살고, 임금을 받는다.
그러나,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아니다. 사병은 어느 전장에서 싸우게 되는지, 혹은 파업을 분쇄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지 못한다.
사회보장국에 있는 창구 직원은 실업 수당으로 얼마가 지불될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지 못한다. 국가 기관 전체는 상명하달의 관료제적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은 물리력을 행사하는 국가 기구들---육·해·공군과 경찰---에 특히 맞는 얘기이다. 사병들이 무기를 다루는 것을 허락받기 훨씬 전에, 즉 군에 입대할 때 민처음 배우는 것이 그들의 개인적 의사와 관계없이 무조건 명령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불합리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배운다. 사병들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연병장에서 어처구니 없는 명령에 따른다면, 그들은 발포 명령을 받았을 때도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발포할 것이다.
어느 군대에서건 가장 "악질적"이라고 여겨지는 "범죄"는 명령 불복종---하극상---이다. 이 "죄"는 아주 중대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전시에 명령 불복종은 아직도 영국에서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누가 명령을 내리는가?
영국 군대의 명령 계통을 보면(다른 나라 군대도 마찬가지이다), 사단장-여단장-연대장-대위-하사관-사병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명령 계통의 어떤 단계에서도 선출된 국민의 대표---국회의원이나 지방 의회 의원---들이 끼어들지 못한다. 일단의 사병들이 장교의 명령이 아니라 국회의원의 명령에 따르는 것도 불복종이 된다.
군대는 대량 학살 기구이다. 군대를 지휘하고 다른 군인들을 자신들 곁의 지휘관으로 승진시키는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장성들이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장성들은 선출된 정부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나, 사병들은 정치인들이 아닌 장성들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련된다. 만약 장성들이 선출된 정부의 의사에 거스르는 명령을 사병들에게 내린다면, 정부는 그러한 명령을 뒤집을 수가 없다. 정부는 단지 장성들이 마음을 돌리도록 설득을 시도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정부가 장성들이 내리는 명령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 하는 것을 안다고 해도 군대의 일은 언제나 비밀이기 때문에, 장성들이 자기들이 싫어하는 정부에게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숨기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이것은 장성들이 언제나 혹은 보통, 정부가 자기들에게 말하는 바를 무시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는 보통, 장성들이 정부 제안의 대부분에 대해서 협조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생사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는 장성들은 정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자기들의 학살 기구인 군대를 움직일 수 있고, 이러한 행위에 대해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것이 칠레에서 아옌데가 전복될 때 실제로 장성들이 행했던 바다.
그래서 '누가 군대를 이끄는가?' 하는 문제는 실제로 '누가 장성들인가?' 하는 문제가 된다. 영국에서는 고급 장교의 약 80%가 비싼 수업료를 내는 "일류" 학교에 다녔다. 이것은 50년 전과 같은 비율이다(노동당 정부가 총 17년 동안 집권했어도 이것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했다). 고급 장교들은 대기업 소유주들과 친분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호화 사교 클럽에 속해 있고, 유사한 사회적 기능을 하며 어울리고, 같은 관념을 공유하고 있다(만약 의심이 간다면 『데일리 텔리그래프』의 거의 모든 호에 실려 있는 독자 투고란을 보시오). 고급 공무원, 검사, 법관 및 경찰 수뇌들도 마찬가지이다.
330명의 하원 의원들이 지지했다는 것만으로, 대기업에 있는 자신의 친구와 친척들로부터 경제력을 빼앗으라는 정부의 명령에 그들(장성, 고급 공무원, 검찰, 법관, 경찰 수뇌 등)이 복종하리라고 생각하는가? 3년 동안 정부의 명령을 사보타지하다가, 때가 무르익었을 때 아옌데 정부를 타도해 버린 칠레의 장성, 법관, 고급 공무원의 사례를 그들이 재현하는 게 오히려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실제로 영구의 헌법은, 국가 기구를 통제하는 사람들이 국가 기구를 물리적으로 타도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선거로 수립된 좌익 정부의 의지를 꺾어 놓을 수 있는 경우를 함축하고 있다. 만일 좌익 정부가 선출된다면, 그 정부는 고용주 계급의 대규모 경제 사보타지(공장 폐쇄, 자본의 해외 도피, 생활 필수품의 매점·매석, 물가 인상 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만약 정부가 "합헌적" 수단---법률의 통과---을 사용하여 그러한 방해 공작에 대처하려 한다면, 정부는 자기 등 뒤로 손이 묶여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상원은 그러한 법안의 처리를 최소한 9개월 동안 지체시킴으로써 법안의 비준을 거부할 것이며, 법관들은 통과된 법이 어떤 법이든 간에, 법적 실효성을 줄이도록 하는 방식으로 그 법을 해석할 것이다. 고급 공무원, 군 장성과 경찰 수뇌들은, 정부 각료들이 자기들에게 지시하는 것을 수행하기 싫어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원과 법관들의 결정을 이용하고자 할 것이다. 그들은 정부가 "불법적"으로, 그리고 "위헌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칠, 거의 모든 언론 기관들의 후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군 장성들은 "불법적"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준비를 정당화하는 데 그러한 언론의 말들을 이용할 것이다.
정부가 실제로 위헌적인 방법으로---법률 제정을 통해서 만든 정책으로가 아니라---직접 행동하여 말단 공무원들, 말단 경찰들, 사병들에게 자신들의 상관에게 대항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면, 경제적 혼란에 대처하는 데 무력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것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공상이라고 넘겨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최근의 영국 역사에서 군 장성들이 그들이 싫어한 정부 결정들을 거부했던 사례가 적어도 두 번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1912년 하원은 통일된 아일랜드를 통치할 아일랜드 자치론을 규정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보수당 당수인 보너 로(Bonar Law)는 자유당 정부를 "헌법을 팔아먹은 불법적인 혁명 정부"라고 즉각 탄핵했다. 상원은 당연히 아일랜드 자치법 처리를 될 수 있는 대로 오랫동안(2년) 미루어 놓았다. 그 동안 전(前) 보수당 각료인 에드워드 카슨(Edward Carson)은 그 법에 저항하기 위해 아일랜드 북부에 준군사적인 세력들을 조직했다.
자유당 정부가 아일랜드에 주둔한 영국군을 지휘하는 군 장성들에게 군대를 북부로 이동시켜 이러한 준군사적인 세력에 대처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들은 명령을 거부하고 직위를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아일랜드가 1914년 남북 단일 의회를 구성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것은, 보통 "커러 항명 사건"(커러 curragh는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버드나무 가지로 짜서 짐승 가죽 등을 씌운 작은 배를 가리킨다---옮긴이)이라고 하는 이러한 사보타지 행위 때문이었다.
1974년에는, 1912년 사건의 축소판이 재현되었다. 북아일랜드 극우 세력인 왕당파는 북아일랜드의 신구교 연립 정부안을 수락하도록 강요당한 데 반발하여, 바리케이드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일하러 가지 못하도록 "총파업"을 조직했다. 영국 정부 각료들은 영국군과 북아일랜드 경찰인 왕립 얼스터 경찰대(Royal Ulster Constabulary)에 바리케이드를 철거하고 파업을 종식시키라고 지시했다. 군 고급 장교들과 경찰 간부들은 영국 정부에게 그러한 지시는 어리석어 군인도 경찰도 왕당파에 대항하는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신구교 연립 정부는 퇴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리하여 군부 고급 장교들의 견해가 영국 정부의 견해보다 더 강력한 것이라는 점을 입증했다.
1914년과 1974년에 온건한 정책을 추진하려 한 중도파 정부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데, 만약 전투적인 사회주의 정부가 선거로 들어섰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지 상상해 보시오.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어떤 진지한 개량주의자도 곧 선택의 기로에 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산업체를 소유하고 있으며 국가의 핵심적인 자리를 통제하고 있는 사람들을 무마하기 위해 개혁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그러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 모종의 실력 행사가 불가피할 전면적인 투쟁을 준비하든지, 양자택일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개량주의가 가망이 없는 세 번째 이유는, 의회민주주의가 어떤 혁명 운동도 의회민주주의를 통해 표출되지 못하게 하는 구조적 메커니즘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개량주의자들은 국가 기관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 사람들의 권력에 도전하는 최선의 길이 우선 좌익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의회란 항상 민중의 혁명 의식 수준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전혀 실현성 없는 공문구일 뿐이다.
민중은, 투쟁을 통하여 실제로 사회를 바꾸기 시작할 때에야 자기들 자신이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 이념이 갑자기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는 때는 수백만 인민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총파업에 참여하고 있을 때이다.
그러나, 그러한 수준의 투쟁은 구 지배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지 않는 한 무한정 유지될 수는 없다. 지배계급이 반격 기회를 노린다면, 그들은 공장 점거나 파업이 쇠퇴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군대와 경찰에 대한 통제력을 사용하여 투쟁을 분쇄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 파업 또는 점거가 비틀거리기 시작하면, 노동자들 내부의 단결과 자신감도 떨어지기 시작한다. 사기가 저하되고 쓰라린 감정이 스며든다. 심지어 가장 우수한 노동자조차도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일이 무모한 꿈이었을 뿐이라고 느끼기 시작한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의 주장을 들을 수 있는 대중 집회에서 단결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 혼자 집에 있으면서 텔레비젼과 신문의 관념에 빠져들고 있을 때, 파업 찬반 투표가 치러지기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
반(反)노동조합 법률에는 거의 언제나 빠짐없이, 노동자들의 비밀 우편 투표가 진행되는 사이에 파업을 중지하도록 강요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또한 그 때문이다. 그러한 조항들은 정확하게는 "냉각기"라고 부르는데, 노동자들의 단결과 자신감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의회 선거제는 제도화한 비밀 투표와 냉각기를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어떤 정부가 막강한 파업에 굴복하게 될 때, 정부는 "좋습니다. 총선이 그 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해 줄 때까지 3주만 기다리십시오" 이렇게 말한다. 정부는 그 사이에 파업이 중지되길 바란다. 그러면 노동자들의 단결력과 자신감은 점점 사라져 갈 것이다. 고용주들이 전투적 노동자들의 블랙 리스트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자본가 언론과 텔레비젼은 다시 정상적으로 움직여 집집마다 친정부적 관념을 주입시키기 시작할 수 잇다. 경찰은 "말썽을 일으키는" 노동자들을 구속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마침내 선거가 치러질 때, 투표는 노동자 투쟁의 '높은 수준'이 아니라 파업 후 '사그러들은 분위기'를 반영할 것이다.
1968년 프랑스에서 드골 정부는 정확히 이러한 방식으로 선거를 이용했다. 개량주의적 노동자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은 노동자들한테 파업을 끝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드골은 선거에서 승리했다.
에드워드 히드 영국 수상은 1974년에 크게 성공한 광부 파업을 맞아 똑같은 속임수를 쓰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광부들이 속지 않았다. 그들은 파업을 계속했고, 히드 수상은 선거에서 졌다.
만약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의 핵심 문제들을 선거가 결정해 주기를 기다린다면, 그들은 그러한 높은 투쟁 수준에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 국가
『프랑스 내전』이라는 소책자에서 마르크스는, 그리고 『국가와 혁명』이라는 소책자에서 레닌은, 사회주의가 어떻게 쟁취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개량주의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개괄해서 밝혔다. 그들의 생각들이 단순히 가벼운 태도에서 비롯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두 사람 다 노동계급이 행동하는 것을 봄으로써 자신들의 견해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즉, 마르크스는 파리꼬뮌을 보았고, 레닌은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를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레닌은 노동계급이 우선 관료 위계 체제에 바탕을 두는 옛 국가를 파괴한 다음에, 전적으로 새로운 원리에 바탕을 두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을 때에야 비로소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시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새로운 국가를 "꼬뮌국가" 또는 "국가 아닌 국가"라고 부름으로써 새로운 국가가 옛 국가와 얼마나 완전히 달라야 하는가 하는 것을 강조했다.
노동계급이 구 지배계급 잔당들한테 '명령'을 부과하려면 새로운 국가가 필요하다고 마르크스와 레닌은 말했다. 그것이 마르크스와 레닌이 새로운 국가를 "프롤레타리아독재"라고 부른 이유였다. 그러니까 노동계급은 사회가 어떻게 운영돼 나가야 하는거 하는 것을 '명령'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국가는 세계의 다른 지역의 지배계급들의 공격에 맞서서 혁명을 방어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일을 해내기 위해서 새로운 국가는 자기 자신의 무장 군대, 치안 유지 기관, 재판소와 심지어 감옥까지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새로운 군대, 경찰과 사법체계를 노동자들이 통제하고, 노동자들의 이익에 거스르는 방향으로 돌아서지 않게 하려면, 새로운 국가는 자본가 국가와는 완전히 다른 원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새로운 국가는 노동계급 다수의 뜻을 거역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수단이 아니라, (다수로서)노동계급이 사회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명령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주된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자본가 국가는 사회의 소수의 이익에 봉사한다. 노동자 국가는 압도 다수의 이익에 봉사해야 한다. 자본가 국가의 폭력은, 사회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고급 장교들에게 복종하도록 훈련받은, 소수의 살인 청부업자들을 통해 행사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 국가에서는 구 특권 계급의 잔재 세력들의 반사회적 행위에 대항해 다수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데만 강제력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 국가에서 국방과 치안 유지는 일반 노동자들이 수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반 노동자들은 자신의 동료 노동자들과 자유로이 어울리고, 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며, 같은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군인과 경찰 집단이 노동자 대중과 결코 분리될 수 없도록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서는 군인과 경찰은 치안유지 임무와 직책을 윤번제로 교체해 가면서 수행하는 일반 공장 노동자들의 사무직 노동자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군대와 경찰은 소수 집단의 장교들이 이끌어 가지 않고, 노동자 대중이 직접 선출한 대표들이 이끌어 가는 것이다.
자본가 국가에서는 의회 대표(국회의원)들이 법률을 통과시키기는 하지만, 그 법률을 집행하는 것은 관료, 경찰 고위 간부와 검사들 및 법관들의 일이다. 이것은 국회의원과 지방 의회 의원들이 그들의 약속(정강과 선거 공약)이 이행되지 않을 때 언제나 수많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발뺌할 수 있게 한다. 노동자 국가의 노동자 대표들은 법률이 집행되는가 하는 것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고위 엘리트 관료가 아닌 노동자 대표들이, 행정 사무를 보는 노동자들과 군대 등한테, 일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입법과 행정의 통합을 말한다---옮긴이). 여기서도 선출된 노동자 대표들은 법정에서 법률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자본가 국가의 의회 대표들은 높은 봉급을 받음으로써 자신들을 선출한 사람들과 구분된다. 노동자 국가에서 노동자 대표들은 평균적인 노동자들의 임금 만큼만 받아야할 것이다. 노동자 대표들의 결정을 수행햐는 요직에서 상근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자 대표들과 노동자들의 결정을 집행하는 일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자본가 국가의 국회의원처럼 5년 동안(혹은 고급 공무원의 경우 평생 동안) 그 자리에서 해임되지 않는 식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동자 대표들은 적어도 해마다 선거를 통해 민중의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며, 만약 그들이 노동자들의 요망 사항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자기들을 선출한 노동자들에 의해 언제든지 즉각 소환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가 국가의 의회 대표들은 일정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상층 계급, 중간 계급, 노동 계급, 빈민가 세입자는 물론 집주인, 육체 노동자는 물론 증권거래인 등---의 손으로 선출된다. 노동자 국가에서는 선거가 오직 노동하는 사람들(근로 인민 대중)의 손으로, 현안 문제들에 관해 정치적 다원주의에 바탕을 두고 공개 토론을 벌인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래서 노동자 국가의 핵심은 공장, 광산, 부두, 큰 사무실에 바탕을 둔 노동자 평의회가 될 것이며, 여기에 주부, 연금 생활자, 중고등 학생 및 대학생과 같은 집단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가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노동계급의 각 계층은 다당제에 바탕을 두고 자기들의 대표를 가질 것이며, 자기들의 대표자가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했는지 아닌지 직접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국가는, 대다수 노동계급과 분리되어 그들에게 거스르는 힘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공산주의" 국가를 자칭했던 동류럽 국가들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되어 있었다.
동시에 노동자 평의회 체제는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자기들의 공장을 운영하는 수단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결정된 전국적 계획에 따라 산업을 운영하려는 노동자들의 노력을 통합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현대의 컴퓨터 과학 덕택으로 모든 노동자들은 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경제적 대안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노동자 다수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 바---예컨대, 핵무기와 군수 산업에 자원을 낭비할 것인가 혹은 값싸고 믿을 만한 공공 교통 체계에 자원을 쓸 것인가, 사치품을 만들 것인가 혹은 학교와 병원을 지을 것인가---를 자기들의 대표가 선택하도록 지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국가의 사멸
새로운 국가 권력은 노동자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보다는 강제성이 훨씬 덜 문제가 될 것이다. 새로운 국가 권력이 통제할 구사회의 잔재들이 혁명의 성공에 머리를 숙이고 여러 혁명들이 외국의 지배계급들을 타도함에 따라, 강제력은 점점 덜 필요하게 될 것이며, 마침내는 노동자들이 경찰과 군대 일을 보기 위해 일자리를 비울 필요가 없을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가는 사멸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뜻했던 바이다. 국가는 사람들한테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고, 그 대신 재화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노동자 평의회의 단순한 하나의 기구가 될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는 자본주의에서 여러 계급 사이의 투쟁이 실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을 때마다 이러저러한 형태로 생겨났다. "소비에트"란 러시아인들이 1905년과 1917년의 노동자 평의회를 부르기 위해 사용했던 단어이다.
1918년 독일에서는 노동자 평의회가 간단히 말해 유일한 권력이었다. 1936년 스페인에서는 다양한 노동자 정당들과 다양한 노동조합들이, 지방 치안과 행정을 맡았고 노동자 평의회와 아주 비슷한 민병대 위원회(militia committees)로 통일되어 있었다. 1956년 헝가리에서 노동자들이 소련 군대와 싸울 때, 공장과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맡기 위해 평의회를 구성했다. 1972~73년 첼레에서는 "꼬르돈"(cordones)---대공장들을 연결한 노동자 위원회---이라는 노동 권력 기관을 만든 바 있다.
노동자 평의회는 처음에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활용하는 기구로서 시작된다. 노동자 평의회는 파업 기금을 모으는 것과 같은 아주 평범한 기능들로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관들은, 대표자들이 노동자들의 손으로 직접 선출되고 소환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투쟁이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전체 노동계급의 노력을 수렴할 수 있다. 노동자 평의회는 노동자 권력(workders' power)의 기초를 놓을 수 있는 것이다.
9 노동자는 어떻게 혁명적으로 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거리에 나가서 지나가는 노동자들한테 혁명을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이 어떤 대답을 듣게 될지 뻔하다. 당신더러 미쳤다고 얘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마도 당신의 질문이 기가 막힌다고 여길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이러한 무관심 혹은 반대는 별로 놀랄 일이 못된다.
우리가 자라난 곳은, 모든 사람이 이기적인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특권을 가진 소수층만이 국가와 산업의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신문과 텔레비젼이 계속해서 국민들한테 떠들고 있으며, 학교 입학 첫날부터 '선배와 손윗사람'의 명령에 따르도록 가르침을 받아 온 노동자 대중이 있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어느 사회에서--옮긴이)지배 사상은 지배 계급의 사상"인데, 상당히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지배계급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노동계급의 혁명 운동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뒤흔들어 놓는 일이 거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1871년 프랑스에서(파리꼬뮌--옮긴이), 1917년 러시아에서(러시아혁명--옮긴이), 1919년 헝가리와 독일에서(헝가리 및 독일 소비에트 혁명--옮긴이), 1920년 이태리에서(토리노 공장 점거운동--옮긴이), 1936년 스페인(프랑코 파시스트들에 대항한 스페인 내전--옮긴이)과 프랑스(프랑스 민중전선 정부 하의 총파업--옮긴이)에서, 1956년 헝가리에서(부다페스트 봉기--옮긴이), 1968년 프랑스에서(5월혁명--옮긴이), 1972~73년 칠레에서(아옌데 정권을 전복하려는 피노체트 군부에 대항하는 투쟁--옮긴이), 1975년 포르투갈에서(스피놀라 군부에 반대하는 투쟁--옮긴이), 1979년 이란에서(반팔레비혁명의 좌익--옮긴이) 노동계급은 나라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들 봉기가 일어난 이유는 자본주의의 본질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공황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는 체제이다. 결국, 자본주의는 완전 고용을 성취할 수 없고 모든 사람에게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자본주의가 내일 가져올 위기로부터 오늘 우리의 생활수준을 지켜줄 수도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호황기 동안에 노동자들은 이러한 것들(완전 고용, 번영, 안정된 생활 수준 등)을 기대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컨대,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영국 노동자들은 영구적 완전 고용, "복지 국가", 점진적이지만 실질적인 생활 수준개선을 기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난 20년에 걸쳐서 잇달아 집권한 정부들은, 실업자를 400만 명까지 증가시켰고, "복지 국가"를 갈갈이 날려 버렸으며, 생활 수준을 자꾸 낮추려 해 왔다.
우리는 많은 자본주의적 이념들(즉,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도록 세뇌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념적)공격 가운데 어떤 것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불가피하게 찾아온다. 갑자기,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때에, 노동자들의 분노는 갑자기 불타올라 그들은 고용주와 정부에 반대하여 어떤 행동을 하게 된다. 아마도 그들은 파업을 하거나 시위를 벌일 것이다.
좋든 싫든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 때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이제까지 받아들여 온 모든 자본가적 관념과는 모순되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은 자본가 계급의 대표들에 반대하여, 하나의 계급으로서 상호 연대하여 행동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이 감당할 수 없어 거부하곤 했던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이 이제 노동자들이 하는 행동과 일치되기 시작한다. 물론, 그러한 사상들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정도는, 노동자들의 머리 속에서 싹트기 시작하는 의식 수준이 아니라 투쟁의 규모에 따라서 결정된다. 처음에는 비록 자본주의적 이념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투쟁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이념을 의심하게 한다.
자본가의 힘은 다음 두 개의 지주, 그러니까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와 국가에 대한 통제에 의존하고 있다. 진정한 혁명 운동은, 당면한 경제적 요구를 위한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의 투쟁이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 지배의 두 지주와 충돌할 때 시작된다.
수년간 같은 공장에 고용되어 있던 일단의 노동자들을 예로 들어 보자. 이 노동자들의 단조로운 일상 생활 패턴 전체는 공장에서 그들이 맡은 직무에 따라 결정된다. 어느날 그 공장 기업주는 공장문을 닫겠다고 발표한다. 노동자들 가운데 자본가 편에 섰던 보수주의자들조차도 반감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그들로 하여금 기대하게 만든 수준의 생활을 계속하는 유일한 길은 공장을 점거하는 것---생산수단에 대한 기업주의 지배에 도전하는 것---뿐이라고 결정한다.
기업주가 '자신의' 재산권을 되돌려 달라고 경찰을 불러들이게 되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국가와도 대결하고 있음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은 이제 기업주는 물론 국가기구인 경찰과도 맞서야만 자신들의 일자리를 지킬 기회를 갖게 될 것임을 인식한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스스로 가르쳐 온 이념과 정반대 이념을 노동자들의 마음 속에 받아들이게 하는, 계급 투쟁 조건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러한 점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들한테 주입한 자본주의적 이념을 대부분의 노동자가 상당 기간 동안 받아들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수백만 노동자들 사이에서 혁명적인 분위기가 주기적으로 고조되어 온 것이 자본주의 역사의 특징이었음을 설명해 준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점이 있다. 많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혁명적 이념을 지지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가장 커다른 것들 가운데 하나는, 다른 노동자들이 결코 혁명적 이념들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스스로 어떤 일을 해봤자 소용없다는 느낌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노동자들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 노동자들은 돌연 자신들이 갖고 있던 무관심을 내팽개치게 된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존 사회에 대항하는 대규모 투쟁 과정을 통해 알게 될 때, 별안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일단 혁명 운동이 시작되면, 그것이 놀라운 속도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0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전제는 자본주의의 발전 그 자체가 노동자들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반란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한 반란이 일어날 때---대중 시위이든 무장 봉기이든 혹은 총파업이든---노동자 계급의 의식 변화는 놀랍다. 이전까지 오만가지 일로 산만해져 있던---고스톱 치는(원문에는 대마초 피우는 일로 되어 있음--옮긴이) 것에서부터 텔레비젼을 보는 것까지---노동자의 정신적 에너지가,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는 데로 급격히 모아진다. 그러한 문제와 씨름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은 놀라운 천재적인 해결 방안을 만들어 내는데, 마치 사태의 진전에 지배계급이 당황해 하는 것처럼, 이 해결 방안은 기존 혁명가들도 당황하게 한다.
그리하여, 예컨대,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에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 조직인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가 인쇄공 파업 기간 동안에 세워진 파업위원회로부터 발전했다. 처음에는 볼셰비키당---혁명적 사회주의자 가운데서도 가장 전투적인---도 소비에트를 불신했다. 다시 말해서, 볼셰비키들은 이전까지 비정치적이었던 노동자 대중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기구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그러한 경험은 많은 파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기존의 투사들은 자신들의 충고를 그렇게 오랫 동안 무시해 온 노동자들이 갑자기 스스로 전투적 행동을 조직하기 시작할 때 완전히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러한 자발성은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발성만 믿고---무정부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 아류와 같이---혁명 정당이 필요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잘못이다.
혁명적 상황에서는 수백만의 노동자들은 실로 대단히 빠르게 자신들의 관념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관념 구석구석을 한꺼번에 모두 바꾸지는 못한다. 모든 파업, 모든 시위, 모든 봉기의 내면에는 언제나 계속되는 찬반 양론이 있다. 어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취하고 있는 행동이 노동자 계급의 사회 운영을 위한 서곡이라고 볼 것이다. 또 다른 노동자들은 무언가 행동을 취하는 것이 '사물의 자연적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보기 때문에 결국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다. 중도적인 노동자들은 찬반 양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현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제도 언론을 동원하여, 행동하는 측의 노동자를 비난하면서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지원할 것이다. 지배계급은 또한 경찰이건, 군대건, 우익 조직이건 가리지 않고 파업 파괴를 위한 물리력을 동원할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측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의 계급투쟁에서 교훈을 이끌어 내고 찬반 양측 주장에 대해 사회주의에 관한 주장을 옹호할 수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이 있어야만 한다. 투쟁 속에서 심화되는 노동자들의 각성을 함께 이끌어 갈 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만 하며, 그럴 때에만 노동자들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함께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은 투쟁이 시작되기 이전에 존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조직은 자연발생적으로 탄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은 사회주의 이념과 계급투쟁 경험이 계속 상호작용하는 것을 통해서 건설된다. 단순히 사회를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사회주의 이념들을 일상적인 계급투쟁, 즉 파업, 시위, 캠페인 등에 적용함으로써만 노동자들은 사물을 변화시키기 위한 힘을 의식할 수 있으며, 변화에 대한 믿음을 얻을 것이다.
어떤 순간에는 사회주의자 당의 개입은 결정적일 수 있다. 즉, 변화를 추구하고, 혁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하며, 사회주의 사회를 향해 나아가려는 노동계급이 승리하도록 계급투쟁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정당인가?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은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 당의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당은 계속해서 계급투쟁과 관련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의 당원들과 당의 지지자들과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당 지도부는 언제나 투쟁의 집단적인 경험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민주적일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러한 민주주의는 선거 제도만이 아니라 당내의 끊임없는 토론---당이 바탕을 두고 있는 사회주의 이념과 계급투쟁 경험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은 또한 중앙집중화해야 한다. 왜냐하면, 혁명적 사회주의 당은 토론 모임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당이기 때문이다. 당은 계급투쟁에 집단적으로 개입할 수 있어야하고, 재빠르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하며, 당의 이름으로 일상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도부를 가져야 한다.
예컨대, 정부가 파업 자위대 연행을 명령한다면 당은, 민주적 결정을 우선시하여 회의를 소집할 필요 없이, 즉각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결정은 중앙이 내리고 집행한다. 민주주의는 그 결정이 올바른 것이었느냐 아니었느냐 하는 것을 밝힐 때 사후에 발휘된다. 만약 중앙의 결정이 투쟁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면 당 지도부를 갈아치울 수도 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은 민주주의와 중앙집중제 사이의 섬세하고 정교한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당은 자기를 위햐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통해서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계급의 투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투쟁에 적응하도록 해야 한다. 투쟁 수준이 낮고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노동자들이 거의 없을 때, 당은 왜소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규모에 만족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원을 늘리기 위해서 정치적 이념을 희석시키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유해하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쟁이 상승할 때, 상당히 많은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관념을 급속히 바꿀 수 있고, 그리하여 투쟁을 통해 자신들이 사물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때, 당은 문호를 개방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당은 방관자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당이 (노동)계급을 대신할 수는 없다. 당은, 계급의식이 가장 투철한 노동자들이 투쟁의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그들을 통일키시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계급투쟁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또한, 당이 (노동)계급한테 명령할 수도 없다. 당이 스스로를 지도부라고 단순히 선언할 수 없다. 즉, 당은 실천---작은 파업에서 혁명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이든---속에서 사회주의 이념의 정확성을 입증함으로써 그러한 위치를 확보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이 사회주의를 가져온다고 여기고 있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이 부를 생산하는 생산수단을 스스로 통제하고 이러한 통제력을 사회 변혁을 위해 사용할 때에만 올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바다 한가운데에 사회주의라는 섬을 건설 할 수는 없다. 스스로를 고립시켜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자신들의 삶을 살고자 했던 여러 소집단들의 시도는 결국 언제나 비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경제적·이데올로기적 압력이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집단들은 스스로를 자본주의로부터 고립시킴으로써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인 노동자 계급으로부터도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가 사회를 타락시키면서 낳은 결과---인종 차별, 성 차별, 착취, 야만 행위---에 맞서서 날마다 투쟁한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계급의 힘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11 제국주의와 민족해방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틀어 사용자 계급은 언제나 부를 추가로 얻는 원천---다른 나라에서 생산된 부의 탈취---에 눈을 돌려왔다.
중세 말기에 자본주의의 최초 형태가 성장함과 동시에 서구 국가들이 광범한 식민 제국을 침탈했다. 그래서 스페인 제국, 포르투갈 제국, 네덜란드와 프랑스 제국, 대영 제국이 등장했다. 지금은 가끔 "제3세계"라고 부르는 곳(아프리카,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사회 전체가 파괴되었던 반면, 서유럽 지배계급 수중에는 부가 쏟아졌다.
이런 식으로, 16세기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하고나서 유럽에 금이 대량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아메리카 사회 전체는 파괴되었고 아메리카에 살던 모든 민족들은 노예가 되었다. 예컨대, 콜롬버스가 최초로 정착지를 세운 아이티에서는 토착 원주민인 하라와크 인디언(전부 합해서 50만 명 정도)이 겨우 두 세대만에 씨가 말랐다. 멕시코의 원주민 인구는 1520년 2천만 명에서 1607년 2백만 명으로 줄었다.
서인도제도와 아메리카 대륙 일부의 원주민 인구의 감소는 아프리카에서 잡혀서 지긋지긋한 조건 속에서 대서양을 건너 수송된 노예들로 메워졌다. 대서양을 건너면서 약 900만 명의 노예가 수송도중에 죽었고, 대략 1500만 명의 노예가 살아남았다. 절반 정도의 노예가 영국 배로 수송되었는데, 그것은 영국 자본주의가 산업발전의 선두 주자가 될 수 있었던 한 이유였다.
노예 무역으로 벌어들인 부는 산업의 재원(財原)이 되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브리스톨(Bristol: 영국 서남부의 항구 도시--옮긴이)의 성벽은 흑인들의 피로 얼룩져 있다"고 한다. 이런 얘기는 다른 항구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얘기였다. 칼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서 임금 노동자를 속박하는 은폐된 노예제는 그 토대로서 신세계(아메리카 대륙)에서 노골적인 노예제를 필요로 했다."
영국이 인도를 정복했을 때처럼, 노예 무역은 노골적인 약탈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벵골(인도의 도시: 지금은 방글라데시 지역--옮긴이)은 최초의 영국인 방문객들이 그 문명의 훌륭함에 깜짝 놀랄 정도로 발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는 벵골에 오래 남아 있지 못했다. 맥콜리(Macauley) 경이 정복자 클라이브(Clive)의 전기에서 썼던 바와 같이, "거대한 인구가 희생양 신세로 내몰렸다. 이리하여 엄청난 부가 캘커타에 쌓였다. 반면에, 3천만의 인간이 무지무지하게 비참한 상태로 떨어졌다. 그들은 학정에 시달리며 사는데 익숙해 있었지만, 이런 학정에 시달린 적은 결코 없었다."
그때부터 벵골은 부유함으로 유명해진 게 아니라, 몇 년 마다 수백만 명이 기근으로 굶어죽는 가혹한 빈곤,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가난으로 유명해졌다. 그 동안 영국의 총 투자 자본이 겨우 6~7백만 파운드밖에 안 되었던 1760년대에 인도에서 영국으로 해마다 강제징발된 공물은 2백만 파운드나 되었다.
영국의 가장 오래된 식민지인 아일랜드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떨어졌다. 대기근이 찾아들어 아일랜드 인구가 기아와 이민으로 반으로 줄어든 1840년대말에, 영국 지주 부르주아지들은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를 먹여살리기에 충분하도고 남을 만큼의 식량을 아일랜드 지대로 가져갔다.
오늘날에는 세계를 보통 "선진국"과 "발전도상국"으로 나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발전도상국들이 수백 년 동안 더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선진국과 같은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구 국가들이 "발전"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나머지 국가들이 부를 강탈당하고 퇴보를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발전도상국의 많은 사람들이 300년 전에 비해 오늘날 더 가난하게 살고 있다.
마이클 배럿 브라운(Michael Barret Brown)에 따르면, "인도와 중국뿐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저발전 국가들의 국민들이 오늘날 소유하고 있는 1인당 부는 17세기에는 유럽보다 높았지만, 서유럽에서 부가 증가함에 따라 그 이하로 떨어졌다."
영국은 하나의 제국(empire)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최초의 공업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영국은 세계의 3분의 1에 달하는 자기 제국 안에 있는 원료, 시장, 이윤이 높은 투자 영역 등에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이 손을 대지 못하게 만들 만한 위치에 있었다.
독일, 일본, 미국과 같은 나라들이 새로운 공업 강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이들 국가들도 이런 이점들(즉, 원료, 시장, 이윤이 높은 투자 영역 등)을 갖고 싶어 했다. 이들 국가는 자기 제국 그러니까 "영향권"(식민지--옮긴이)을 건설했다. 경제 공황에 직면한 주요 자본주의 열강은 서로 상대방 국가의 "영향권"을 침입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는 세계 대전을 불러일으켰다.
세계 대전은 역으로 자본주의의 내부 조직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을 수행하는 수단인 국가는 훨씬 더 중요하게 되었다. 국가는 외국과 벌이는 경쟁과 전쟁에 대비하여 산업을 재조직하기 위해 대기업들과 훨씬 더 긴밀하게 유착했다. 자본주의는 국가 독점 자본주의가 되었다.
제국주의의 발전은 자본가들이 자국 노동계급을 착취할 뿐 아니라 다른 나라를 힘으로 지배하고 그 나라 민중을 착취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는 식민지 국가들의 억압받는 계급의 편에서 보면, 그들이 식민지 내부의 지배계급한테 착취당할 뿐 아니라 외국의 제국주의자들한테도 착취당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중으로 착취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식민지 나라들 내부의 지배계급 가운데 일부도 고통을 받았다. 식민지 지배계급은 자국 민중을 착취할 수 있는 기회가 대부분 제국주의에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식민지 현지 산업의 급속한 발전이 좋은 출세 기회를 제공해 주리라 기대했던 식민지 중간계급들도 고통을 받았다.
지난 70여년 동안, 식민지 국가와 예전에 식민지였던 국가에서 이들 모든 다양한 계급은 제국주의의 영향에 반대하여 떨쳐일어서 왔다. 외국의 제국주의 지배에 대항하여 전인민을 단결시키려는 운동이 발전해 왔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내걸었다.
외국 제국주의 군대의 철수
제국주의 국가간의 식민주 분할 등에 반대하여, 단일한 민족 정부를 중심으로 전민족적인 영토의 통일
외국 지배자들이 강요하는 외국어에 반대하여 일상 생활에서 토착언어 부활
국내에서 생산된 부를 그 나라의 '발전'과 '근대화'를 가져올 국내 산업 확장에 이용
이런 요구들이 중국(1912년: 신해혁명, 1923~1927년: 국민혁명, 1945~1948년: 국공내전), 이란(1905~1912년, 1917~1921년, 1941~1953년), 터키(1차대전 후), 서인도 제도(1920년대 이후), 인도(1920~1948년의 대영 독립 운동), 아프리카(1945년 이후), 베트남(미국이 패퇴한 1975년까지), 그리고 오늘날 남아프리카 등에서 지속적인 혁명 봉기의 요구였다.
이러한 혁명운동은 식민지 상층 계급이나 중간 계급 일부가 주도하곤 했다. 이러한 운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계급이 자국 노동계급은 물론 또 하나의 적과 맞서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른바 "제3세계"의 민족 운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자본가 국가들에 도전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한테 제3세계 민족 운동은 대단히 중요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이 제3세계의 민족 해방 운동과 동맹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하여, 예컨대, 오늘날 영국의 쉘 석유 회사의 노동자는 쉘 석유 회사가 남아프리카에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양도하라고 싸우고 있는 남아프리카의 해방 세력을 자신의 동맹자로 갖고 있는 셈이다. 만약 쉘 석유 회사가 제3세계 해방 운동을 쉽게 저지할 수 있게 되면, 쉘 석유 회사는 영국에서 노동자들의 요구에 맞서는 싸움에서 훨씬 더 강한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제3세계 국가의 민족 해방 운동이 사회주의자 지도부를 갖고 있지 못할 때에도, 그러니까 민족 해방 운동의 지도부가 단순히 외국의 지배를 국내 자본가 계급이나 "국가자본가"(state capitalist) 계급의 지배로 바꿔치기하기만 원한다고 하더라도 적용된다.
그러한 해방 운동을 분쇄하려 하는 제국주의 국가는 서구 노동자 최대의 적이기도 한 바로 그 제국주의 국가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마르크스는 "다른 민족을 억업하는 민족은 그 자신이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고, 레닌이 사회주의자 지도부를 갖지 않았더라도 "제3세계"의 억압받는 인민과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 사이에 동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억압받는 나라의 비사회주의자들이 민족 해방 투쟁을 이끌어 나가는 방향에 동의할 것(노동조합 지도자가 파업을 지도하는 방법에 사회주의자가 반드시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듯이)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민족 해방 투쟁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억압받고 있는 식민지 인민들을 적으로 대하는 그들의 지배계급을 너무나 쉽게 지지하는 셈이 된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는 민족 해방 투쟁이 지도되는 방식을 비판하기에 앞서 무조건적으로 민족 해방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억압받고 있는 나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문제를 그런 수준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언제나 민족 해방 투쟁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펴밝혀야 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트로츠키가 발전시킨 영구혁명론 속에 포함되어 있다. 트로츠키는 중간 계급 혹은 심지어 상층 계급의 사람들이 때떄로 억압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에서 가장 억압당하는 계급이나 집단을 짓누르는 여러 가지 멍에들 가운데 하나라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그러한 운동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상층 계급이나 중간 계급이 그러한 투쟁을 일관성 있게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강력한 대중 투쟁이 외국이 가하는 억압에만 도전하지 않고 가장 심한 억압을 당하는 계급들을 착취하며 살아가려는 그들 자신의 위치에 도전할 경우, 상층 계급이나 중간 계급 사람들은 이러한 대중 투쟁을 용갑하기를 두려워할 것이다.
투쟁이 어떤 일정한 수위에 이르면, 그들은 자기들이 주도하던 투쟁 대열에서 이탈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대중 투쟁을 분쇄하기 위해 외국 지배자들과 손을 잡기도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사회주의자와 노동계급 세력이 민족 해방 투쟁의 지도력을 갖지 못하면, 투쟁은 실패할 것이다.
트로츠키는 또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에서 노동계급은 소수일 뿐이며, 때로는 아주 극소수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은 종종 절대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매우 크고(예컨대, 인도와 중국에서 노동계급은 수천만 명의 숫자를 가진 강력한 세력이다), 또한 그 수에 비하여 그 나라 부의 거대한 몫을 만들어 내며, 그 나라를 지배하는 데 핵심 부분인 도시 지역에 압도적인 숫자가 집중되어 있다. 그리하여 혁명적 격변의 시기에 노동계급은 다른 피억압 계급에 대해 지도력을 가질 수 있고 전국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할 수 있다. 혁명은 민족해방의 요구로 시작되어 사회주의적 요구로 끝을 맺을 때 영속적(permanent)일 수 있다. 억압받는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이 처음부터 독자적인, 계급적 기초 위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할 때에만, 바로 그 때에만---물론 민족 해방을 추구하는 일반적 운동을 지지하면서, 그러나 언제나 중간 계급과 상층 계급의 지도자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경고를 한다면---민족 해방의 요구로 시작되어 사회주의 요구로 끝을 맺는 영구혁명이 완수될 수 있다.(그리고는 사회주의 건설이 시작된다. 물론, 완전한 사회주의는 몇몇 주요 선진국을 포함한 국제적 규모에서만 이룩될 수 있지만, 미해결의 민족·민주적 과제가 노동자 계급이 지도하는 민중 권력---노동자 권력,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수립과 구질서의 철저한 청산을 통해 완결될 수 있따는 점에서 2단계 혁명론인 반제·반봉건 민중민주 "혁명"론 및 반제·반독점 민중민주 "혁명"론과 구별된다. 신흥공업국의 영구혁명 전략은 반국가·반자본 일반인데, 여기서 '반자본 일반'이란 모든 자본을 사회화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이 아니라, 영구혁명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본의 대소를 구별하여 투쟁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럴 경우, 민중 권력 수립 후의 사회화 대상은 일차적으로는 대규모 사유재산 및 생산적인 사유 재산에 한정된다.--옮긴이)
12 마르크스주의와 여권운동(페미니즘)
여성 해방에 대해 지금까지 줄곧 서로 다른 두 가지 접근 방법---'여권운동'(feminism)과 혁명적 사회주의---이 존재해 왔다.
'여성운동'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여성 운동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권운동'은,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억압한다는 관점, 그러니까 남성의 생리 구조와 심리 구조에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대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주장은 오로지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독립함으로써만---"해방된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여권운동'가들이 따로 조직을 만드는 식의 완전 독립이건, 아니면 여성 위원회나 여성 간부 회의, 여성 문제 전담 기구 식의 부분적인 독립이건---여성 해방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후자의 부분적인 독립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사회주의자 '여권운동'가(socialist feminist)라고 부른다. 그러나, 최근에는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급진 여권운동'론이 여성 운동 내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완전 독립론은 줄곧 약간 진보적으로 사회 봉사를 하는 진영 정도에 머물러 왔다. 체제에 도전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여성들의 이러한 도피는 체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러한 체제 도전의 회피는 더 많은 '여권운동'가들을 다른 방향으로---보수 야당으로---몰려가게 했다. 적합한 자리---국회의원, 노동조합 간부, 지방 의회 의원---를 올바른 인식을 가진 여성들이 차지하는 것이, 모든 여성들이 남녀 평등을 추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다.
혁명적 사회주의의 전통은 매우 다른 이념 체계에서 시작된다. 이미 1848년 저술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우선 여성에 대한 억압은 남성들의 머리속 관념으로부터가 아니라 사유 재산의 발달과 그에 따른 계급에 기초한 사회의 출현으로부터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해방을 위한 투쟁이 모든 계급 사회를 종식시키기 위한 싸움---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또한 공장 제도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민중의 생활, 특히 여성들의 생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성들은, 계급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그들을 배제시켜 왔던 사회적 생산의 장(場)으로 되돌아왔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들에게 그들이 이전까지 결코 가져 본 적이 없는 잠재력을 부여했다. 집단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노동자로서 여성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상당한 능력과 독자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가족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생산 활동에서 여성의 역할 때문에 여성이 가장---그러니까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완전히 종속되었던 이전의 여성의 생활과 크게 대조되었다.
이로부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족의 물질적 기초, 그러니까 여성을 억압하는 물질적 기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성들이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는 것에서 오는 이익을 여성들 자신이 차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재산이 소수의 사람들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오늘날 여성들의 억압을 유지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조직되는 방식---특히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 자식들을 다음 세대의 노동자가 되도록 부양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가족이라는 특정한 틀을 이용하는 방식---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남성들에게---때로는 여성들에게도---노동에 대해 지불하는 반면, 여성들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들의 남편이나 아버지가 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고 그들의 자식들이 노동자로서 같은 일을 하도록 양육하는 데 그들의 삶을 바칠 것이라는 사실은(자본가 계급으로서는--옮긴이) 커다란 이익이다.
대조적으로, 사회주의는 여성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가족 안의 많은 역할(가사노동--옮긴이)을 사회가 떠맡게 되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그들의 계승자들이 '가족 제도 폐지'를 설파하려 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 제도 지지자들은 언제나 가족 제도 속에서 가장 억압당하는 여성들을 자신들의 지지자로 동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여성들이 '가족 제도 폐지'가 그들의 남편에게 자식에 대한 책임을 방기할 수 있다는 면책권과 자신들을 버릴 수 있는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족 철폐론자들과는 달리,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더 나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어떻게 해서 여성들이 오늘날의 가족 제도가 부과한 비참하고 답답한 생활을 강요당하지 않게 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항상 노력해 왔다.
'여권운동'가들은 언제나 이러한 식의 분석을 거부해 왔다. 그들은 세계를 변화시키고 여성들에 대한 억압을 끝장낼 수 있는 힘을 가진 곳---노동 속에서 집단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곳---에 있는 여성들에게 접근하지 않고, 피해자로서 여성들에게 접근한다. 예컨대, 1980년대 초의 캠페인은 매춘, 강간 또는 에이즈와 핵무기가 가족과 여성에게 가하는 위협과 같은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것들은 여성들이 약자라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여권운동'은 성적 억압이 계급 분화에 우선하며 계급적 구분을 초월한다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가정은 일부 여성들---소수---의 지위를 개선하는 반면, 계급 사회는 그대로 남아 있게 하는 결론들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여성운동은 "신 중간계급" 여성들---언론인, 작가, 강사, 상층 화이트칼라 노동자---이 주도하는 경향이 있다. 타이피스트, 서류정리원, 기능사원들은 배제되었다.
여성 해방 문제가 단지 소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노동계급 여성들을 위해 현실화되는 것은 급진적 변화와 혁명적 봉기의 시기에 비로소 그렇게 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은 여성들한테 그전까지 세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평등을 가져다 주었다. 이혼, 낙태, 피임이 자유로워졌다. 육아와 가사노동은 사회의 책임이 되었다. 여성들이 더 넓은 선택 기회를 누리고 자신의 생활을 관리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공동 식당, 세탁소, 탁아소 등이 문을 열었다.
물론 이러한 진보의 운명이 혁명 그 자체의 운명과 분리될 수는 없었다. 굶주림과 내전, 이로 인한 노동계급의 대량 사망, 국제 혁명의 패배는 결국 러시아 자체 안에서조차 사회주의의 실패를 뜻했다. 평등을 향한 변화는 거꾸로 되돌려졌다.
그러나, 소비에트 공화국 초기는 가장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여성 해방 전망은 훨씬 더 밝다. 영국에서는---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얘기이지만---5명의 노동자 가운데 2명이 여성이다.
여성 해방은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으로만 이룩될 수 있다. 이것은 여성들만의 독립된 조직이라는 '여권운동가'의 관념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통일된 혁명 운동의 일부로서 함께 행동하는 여성·남성 노동자만이 계급 사회를 타파하고 그와 더불어 여성에 대한 억압을 끝장낼 수 있다.
13 사회주의와 전쟁
20세기는 전쟁의 시기였다. 제1차세계대전으로 1천만 명이 죽었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5천5백만 명이 죽었으며,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2백만 명이 죽었다. 그리고 핵무기를 갖춘 두 개의 초강대국인 미국과 러시아는 이제 인류를 여러 번 파멸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다.
기존 사회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한테 이러한 소름끼치는 일을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인간이 사람들을 대량 살륙하는 것을 즐기는 천성적이고 본능적인 충동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인간 사회가 언제나 전쟁을 해 왔던 것은 아니다. 고든 차일드는 석기 시대 유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최초의 다뉴브족은 평화스런 종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은 전쟁 무기가 아니라 사냥 도구들이었다. 그들의 마을은 군사 방어 시설이 없었다...... 그러나, 신선기 시대 후기에는 무기가 가장 두드러진 품목이 되었다."
전쟁은 인간의 타고난 침략성(공격성)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다. 전쟁은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된 결과이다. 5천년~1만년 전, 재산을 소유한 계급이 최초로 나타났을 때, 그 계급은 자신의 부를 지킬 수단을 찾아 낼 필요가 있었다. 그 계급은 사회의 여타 부분과 분리된 무장 세력 그러니까 국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후, 다른 사회를 약탈하여 부를 더욱 늘리는 데 국가는 귀중한 수단이 되었다.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하는 것은, 전쟁이 인간 새활의 영원한 특징이 된다는 것을 뜻했다.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계급은 더 많은 노예를 공급해 주는 전쟁을 계속 벌이지 않았다면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중세의 봉건 영주들은, 자기 지역의 농노를 다스리고 다른 봉건 영주들한테서 빼앗은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중무장을 해야 했다.
300~400년 전 최초의 자본가 지배계급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너무 자주 전쟁에 의존해야 했다. 그들은 옛 봉건 지배자들의 잔재 세력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16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처절한 전쟁을 해야 했다. 영국과 같은 가장 성공을 거둔 자본주의 국가들은, 바다를 건너 가서 인도와 아일랜드를 약탈하고, 수백만명의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수송하고, 전세계를 그들 자신을 위한 약탈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들의 부를 늘리기 위해 전쟁을 이용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전쟁을 통해 건설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전쟁은 "불가피하고 심지어 정당한"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전적으로 전쟁에 의존할 수만은 없었다. 자본주의의 부(富)의 대부분은 공장과 광산의 노동자들을 착취함으로써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모국" 그 자체 내애세ㅓ 투쟁이 벌어지면 붕괴될 수 있는 것이었다.
각국의 자본가 계급은 외국에서는 전쟁을 치르는 반면, 국내에서는 평화를 원했다. 그래서 자본가 계급은 한편으로는 "군인 정신"을 가지라고 고무하면서, 또한 "폭력"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완전히 모순된 방식으로 군국주의에 대한 찬양과 평화주의적 언사를 혼합시키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전쟁 준비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전보다 더 중심적인 사안이 되었다. 19세기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서로 경쟁하는 많은 소기업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당시의 국가는 이들 자본가 상호간의 관계 및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규제하는 상대적으로 작은 기구였다. 그러나, 20세기에는 대기업들이 대부분의 소기업들을 집어삼켰고, 그리하여 각 산업에서 대부분의 경쟁(가격 경쟁)은 배제되었다. 경쟁은 점점 더 각국 대기업들간의 국제 경쟁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경쟁을 조정할 국제적 자본가 국가는 없다. 그 대신 각국은 자국 자본가들이 다른 나라의 자본가들에 대해 우위를 가질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각국 자본가들간의 생사를 건 싸움은, 파괴적 무기를 엄청나게 가진 각 자본주의 국가간의 생사를 건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투쟁은 두 번씩이나 세계 대전으로 비화했다.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은, 전세계의 지배를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들간의 투쟁, 그러니까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냉전은 가장 강력한 자본가 국가들이 각각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로 서로 결집하여 대치한, 세계 대전의 변형된 연장이었다.
이러한 전세계적 냉전에 덧붙여져, 많은 열전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다. 일반으로 그러한 열전은 1980년에 터진 이란-이라크 전쟁과 같이 누가 특정 지역을 장악하느냐 하는 것을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간의 전쟁이었다. 동서 양대 진영이 첨단 군사 기술을 제3세계 국가들한테 팔아 전쟁에 불을 붙였다.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소름끼치는 현실을 싫어한다. 그들은 자본주의는 원하지만 전쟁은 싫어한다. 그들은 그리하여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다른 대안을 찾으려 한다. 예컨대, 국제연합(UN)이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UN은 단지 전쟁 추구를 구체화하는 국가들이 서로 만나는 무대일 뿐이다. 거기서 그 나라들은, 마치 한차례 격돌을 벌이기 전에 탐색을 하는 권투 선수들처럼, 서로의 힘을 비교한다. 만약 한 나라나 어느 동맹이 다른 나라나 동맹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면, 양측은 전쟁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는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결과에 의심이 든다면, 그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 즉 전쟁으로 가는 길만을 알 뿐이다.
이것은 두 개의 거대한 핵 동맹국인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서방측이 동구권에 비해 군사적으로 우세했다고 하더라도, 소련이 그 간격을 절장적으로 불리하다고 믿을 정도로 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인류의 대부분을 쓸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미·소는 핵전쟁을 감행하여 승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자본주의와 영구히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초강대국 미·소간의 협정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양측의 상호불신은 그러한 협정의 효력을 감소시켰다. 양측은 상대가 무기 경쟁에서 자신을 압도하지 않을까 끊임없이 두려워하여 여전히 대량 파괴를 위한 더 우수한 무기를 개발하려 했다. 동서 양진영의 핵무기를 제한할 것이라 여겨졌던 1972년의 협정도 무기 경쟁의 가속화를 막지는 못했다.
1989년에 동유럽에서 대중 봉기가 일어나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무너지고 1991년에 소련이 붕괴함에 따라 냉전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신세계질서'와 '평화분담금'을 떠벌였다.
그러나 사태는 이와 정반대로 흘러갔다. 서방이 자신의 옛 동맹국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고, 옛 소련에서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전쟁을 벌였고, 소말리아와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내전이 벌어졌다. 야만스러운 전쟁이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자본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군사적 경쟁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군사적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모든 곳에서 지배계급은 전쟁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민족주의에 붙잡아매는 길임을 알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전쟁을 혐오하고 두려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전쟁을 종식시킬 수는 없다. 전쟁은 계급 사회의 불가피한 산물이다. 전쟁의 위협은 기존 지배자들한테 평화를 구걸한다고 해서 종식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계급 사회를 영원히 없애기 위해 싸우는 운동을 통해서만 지배자들을 무장 해제시킬 수 있다.
1970년대 말에 유럽과 미국에서 나타난 평화운동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쪽만의 무장 해제와 핵동결을 위해 크루즈 미사일과 퍼싱 미사일의 도입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본과 노동간의 투쟁과 별개로도 평화를 위한 투쟁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의 충동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 즉 노동계급을 동원하지 못했다.
오직 사회주의 혁명만이 전쟁의 공포를 종식시킬 수 있다.
출처 : 사민사랑
글쓴이 : 이상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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