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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편한 진실] 제주 4.3사건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푸른 그리스도의 계절 2010. 4. 22. 00:42
제주 4.3사건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
제주 기독교는 지혜로웠다?
4·3사건, 상당수 기독인이 학살자 vs. 교회 피해 극심 ▲ 제주섬. (강요배 화백 화집 '동백꽃 지다')
"4·3의 혹독한 어둠 속에서 제주 기독교는 한치 앞을 예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시대 제주 기독교는 참으로 지혜로웠다. 기독교는 우익의 입장이었지만 우익 단체에 가담하고 직접 좌익과 투쟁하는 선봉에 서지 않았다. 이도종과 조남수 그리고 강문호는 간접적으로 심정적으로 그들을 지원하고 협력하면서도 교회가 휘말리지 않도록 교육했다." -<제주 기독교회사> 중
박용규 교수(총신대 역사신학)는 "4·3항쟁에 교회가 휘말리지 않도록 교육한 것이 지혜"라고 했다. "기독교를 우익으로 분류했음에도 좌익 세력이 노골적으로 공격할 수 없었던 것은 기독교가 우익 단체에 합류하는 것을 자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회가 흉흉한 사건에서 적당히 떨어져 피해가 적었던 것이 지혜라는 말인가. 기독교가 우익 단체에 합류하기를 자제했다는 것은 사실일까.
해방 후 개신교 반공주의는 '교리' 수준으로 올라가 '교회법'으로 보호받기에 이르렀다고 강준만 교수는 그의 저서에 기록했다. 해방 후 개신교 신자들의 종종 폭력까지 동반하며 반공 태도를 취했다. 강인철 씨는 "개신교 신자들의 반공주의는 종교 이데올로기의 뒷받침을 받았다는 면에서 '성스러운 반공주의'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의 '관념론적 유물론'과 '전투적 무신론'의 측면을 일방적으로 부각해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적대적 측면을 극대화할 때, 반공 투쟁은 곧 '기독교 수호 투쟁'이 된다.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대립은 '악마와 천사 간 전쟁'으로 발전한다. 동시에 반공 투쟁에 나선 기독교 신자들은 성전(聖戰)에 참여한 군대, 곧 '십자군'이 되며, 이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순교자'가 된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제주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 서청 입도. (강요배 화백 화집 '동백꽃 지다')
서북청년단(서청)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해 제주도민에게 '악몽의 그림자'라는 악명을 얻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은 "서북청년단의 발족을 영락교회 청년회가 4·3제주항쟁 평정 등 '반공건국, 멸공건국, 승공건국'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고 말한다. 또 "개신교 청년들이 조선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등 반공주의적 청년단체에도 다수 참여했다"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서북청년단은 태극기와 이승만의 사진을 들고 다니면서 강매하고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 아래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자행하고 죽으면 빨갱이로 모는 행위 등을 일삼았다. 미군정이 1948년 1월, 남한 각 도의 공산주의자 활동에 대한 평가를 내리면서 "제주도에서 소위 좌익으로 불리는 자들 대부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고 분석하고 좌익보다는 우익의 테러 사태가 더 문제라는 것을 시사하는 문서를 남길 정도였다.
제주기독교100주년기념위원회는 '제주기독교 100년의 회고와 전망, 과제'라는 글에서 4·3사건에 대해 "교회의 피해가 극심했다"고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특히 "이도종 목사가 북제주 일대 교회를 순회하며 목회하다 무장공비에게 납치되어 순교했다"고 했다. 박용규 목사는 "혹독한 시련과 혼란 속에 제주 교회는 오히려 최고의 성장과 부흥을 이룩했다"고 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의지할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제주도민 학살을 자행한 서북청년단 중 개신교인이 많았다는 설명은 하지 않았다. 서북청년단 중에는 친일파로 변절한 개신교인 지주가 많았다.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쫓겨 내려온 청년들로 구성된 서청은 반공 사상이 투철했다. 이어 6·25 때 기독교는 부흥한다. 피난민들이 제주도에 모여 들었기 때문이다. 이때도 반공 사상을 지닌 보수 기독교인이 대거 제주에 유입했다. <제주기독교회사>는 제주 선교를 개척한 목회자들 대부분이 이북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이라 반공 사상이 투철했다고 기록한다. 4·3사건을 목도하고 희생자를 배출한 제주교인들은 목회자들이 설교 시간에 공공연하게 반공을 강조하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서청을 제주에 보낸 이승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 대통령이었다. 강준만 교수는 "이승만이 제헌국회도 식순에 없던 기도로 시작했고, 대통령 취임식도 기독교 방식으로 했다"고 했다.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하고, 해마다 성탄 메시지를 발표하고, 1953년 11월에는 성탄 선물과 크리스마스 카드를 많이 만들자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55년 12월에는 국회에서 성대한 성탄 파티를 열기도 했다. 이승만은 계엄령을 내리고 서청을 제주도에 보내 수많은 제주도민이 죽게 했다.제주특별자치도기독교교단협의회는 제주 기독교 100주년이라 부르는 2008년 자료집을 내면서 4·3 사건을 공산당으로 인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박용규 교수는 "4·3사건이 항쟁으로 평가되는 것은 진실을 왜곡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8년 9월 발간한 <제주기독교회사>에서 한 말이다. 2003년 10월 31일 대한민국 정부 이름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에게 사과한 후에 펴냈다.
반면 임문철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제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4·3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과거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 사태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려는 교과서포럼은 '대안교과서'의 4·3 내용을 당장 폐기하고 4·3 영령과 유가족 앞에 사죄하라"고 촉구했다.
천주교가 20년 동안 거의 세 배에 가까운 성장을 하고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는 이와 다르지 않다. <제주기독교회사>는 "19세기 끊이지 않았던 민란, 이재수의 난, 4·3 사건 등에 대해 제주 기독교는 주민을 위로하거나 그들의 아픔을 풀어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제주의 불교와 천주교는 이 일에 헌신적으로 앞장섰다"고 했다. <제주선교 100년,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서 서성환 목사(사랑하는 교회)가 지적한 부분도 다르지 않다.
"가톨릭교회는 해마다 4·3 추모 미사를 드리고 여러 행사를 열었다. 불교 또한 천도제를 올리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기독교는 연합추모집회나 기도회, 4·3입법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혹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교회 안에 있어 그렇다고 하지만, 교회의 화해의 복음을 생각하면 궁한 변명이다." -<제주선교 100년, 어제와 오늘과 내일> 중
안타깝게도 기독교와 천주교가 보인 다른 태도는 2009년 현재에도 변하지 않았다.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선다는 소식에 천주교 제주교구 사제단 임문철 신부는 "해군기지 건설은 평화의 역행"이라며 단식농성을 했다. 그러나 제주기독교교회협의회 '제주도의평화와행복을지키려는목자회모임'(목자회)은 "이미 결정된 해군기지 문제에 대해 논의를 중단하고 도정에 협력하라"며 "상생과 화합"을 외친다.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실천 없이 제주 선교를 외치는 기독교는 이재수의 난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정훈 목사(늘푸른교회)는 "이재수의 난은 제주도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은 일방적인 전도 활동으로 독선과 모순을 빚은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독청년아카데미 제주역사기행 참가자들,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다
▲ 4·3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묵도했다. ⓒ뉴스앤조이 김세진
"똑같은 장소, 비슷한 계절에 왔는데 다른 곳에 온 것 같아요"
기독청년아카데미 정인곤 간사는 세 번째 제주도를 방문한다고 했다. 처음엔 모 대형교회에서 하는 '제주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 발을 디뎠다. 당시 생각했던 제주도는 "심청이가 바다에 빠져 죽은 곳"이었다. 성난 바다를 가라앉히기 위해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던 곳이라 인권이나 목숨을 쉽게 생각하는 곳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미신이 팽배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제주도는 복음이 들어가야만 하는 지역, 미신과 우상이 만연한 지역, 비합리적인 요소를 깨뜨려야 하는 지역이었다. 청년부는 "제주에 복음의 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죽어가는 나의 백성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찬양을 목이 쉬도록 불렀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제주도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친구들과 하이킹을 하면서 들른 제주도는 흔히 잘 아는 관광의 도시 제주도였다. 푸른 물과 날씨에 매료되었다.
이번에는 기독청년아카데미 청년들과 함께 4·3 역사 현장을 방문했다. 3월 26일부터 29일까지 머무는 동안 강정마을에 가서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분들도 만났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제주는 새로운 곳 같다. 많은 고통을 당한 땅이고 그 고통이 현재 진행형이라니 충격이었다. 정치·사회·역사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반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4·3항쟁을 진압하러 들어온 서북청년단과 6·25전쟁을 계기로 기독교가 제주도에 성행했는데, 마치 제국주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선을 타고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가 제국주의 지배를 확장하려는 모습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일방적으로 '제주 선교'라는 이름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섬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다. 물론 섭리사적으로 기독교가 전래되어 섬의 폐쇄성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기는 했다. 하지만 섬사람들과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다. 기독교인이 공부하고 역사를 알아야 폭력 없이 접근할 수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믿기 힘든 고통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니요"
초등학교 교사 최유경 씨는 여행을 가기 전 제주 역사에 관한 글을 읽고 괴로웠다고 했다. <복음과 상황> 4월호에 실린 '미디어와 관광' 글을 읽으면서 "미디어의 영향으로 휴양 이미지가 강한 관광지를 방문한 사람은 그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여행을 준비하고 마치게 된다"는 말에 공감했다. 제주도에 관한 미디어를 보면서 아름다운 곳으로만 생각했는데 아픈 진실과 마주하니 불편했다. 그저 아름다운 줄 알았던 제주 역사 중심에는 4·3이 있었다.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려는 폭력을 직시했다. 이제야 안 것이 부끄럽고 미안하다.
▲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 강정마을 어르신들 뒤로 해군기지 건설 반대 벽 그림이 보인다. ⓒ뉴스앤조이 김세진
"감당하기 힘든 역사네요"
대학생 신병철 씨는 4·3에 대해 공부하면서 감당하기 힘든 역사를 공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우로 분열된 것이 얼마만큼의 아픔을 가져다주는지 이전엔 미처 몰랐다. 그런데 국가 안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들어서려는 해군기지가 오히려 마을을 파괴하려는 모습은 4·3과 다를 바 없었다. 새만금과 대추리가 생각났다.
대학생 장철순 씨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대책위 위원장과 마을회장을 보고 감동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분들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철저히 공부하고 운동을 해 왔는지가 와 닿았다.
"그들은 동북아 평화를 실천하고 계세요. 학자들처럼 이론적인 게 아니라 아는 것을 끌어다가 마을에서 평화를 이루고 있어요."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을 지지합니다."
우리 마을 인물이 제주에선 '학살 책임자'였네
▲ 별과 4·3기념공원에서. 별은 제법 힘든 일정을 잘 소화했다. 물론 평소보다 자주 업어달라고 응석을 부리기는 했지만. ⓒ주재일
다섯 살배기 딸아이와 제주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유채꽃 흐드러진 길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제주 남쪽 바다와 한라산을 번갈아 보며 걷는 산책길 '올레'도 일품이었습니다. 좋은 길안내꾼을 만나 들르는 음식점마다 맛난 제주 토속 음식을 저렴하게 맛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절경과 먹을거리에 안주할 수는 없었습니다. '역사 기행'을 하는 중이었으니까요.
우리는 20여 명의 청년들 틈에서 제주 4·3사건의 흔적을 밟아갔습니다. 해방의 벅찬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은 1947년 3월 1일 독립을 자축하러 제주 역사상 최대 인파가 모인 제주북초등학교와 관덕정 앞 광장부터 들렀지요. 과잉진압을 하던 경찰이 결국 총을 쏘았고 갓난아기를 안은 젊은 처자를 비롯해 여섯 명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싸움은 7년 동안 3만 명이 죽고서야 끝이 났습니다. 대부분 경찰과 군인이 무고한 마을 주민들을 학살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찾은 곤을동, 다랑쉬마을 등은 억울하게 죽어간 양민들의 피울음이 제주 특유의 바람과 섞여 불어오는 듯 했습니다.
"별아, 제주에 오니까 뭐가 제일 많은 것 같아?"
"몰라."
"잘 생각해봐. 네가 좋아하는 거야."
"으음… 돌!"별은 돌을 참 좋아합니다. 작은 호주머니에 어디서 주운 돌을 넣어옵니다. 허락 없이 버렸다가는 낭패를 봅니다. 제주에서도 검고 구멍이 숭숭 뚫린 돌을 보고 가만있지 못했습니다. 이 돌 집었다가 저 돌 집었다가. 행복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 가져갈 수 없는지 설명하느라 진땀을 흘렸지요.
"그리고 또 뭐가 많을까?"
"몰라."
"잘 생각해봐. 여기 오니까 춥지 않아? 왜 추울까. 뭐가 많이 불잖아."
"아… 바람"
"맞았어. 또 많은 게 있어. 뭘까."
"왜 자꾸 물어."서서히 짜증을 내는 별에게 설명했습니다. 바로 '여자'가 많다고. 왜 그런지도 이야기했지요. 60년 전 젊은 남자들을 너무 많이 죽이고 끌고 가서 여자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참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돌아다닌 북촌도 온통 여자들만 남았다고 합니다. 북촌에 있는 너븐숭이라는 곳에는 4․3 사건 때 죽은 아이들을 묻은 무덤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별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죄스러운 마음에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이 나라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이들은 50년 가까이 진실이 새어나오지 않게 입막음을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식 사과를 했습니다. 국가 권력을 잘못 사용했다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래도 한을 다 풀 길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안내한 역사학자는 아직도 찾지 못한 유골이 제주 도처에 널려 있는데, 관계 당국은 발굴하는 데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4·3평화공원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과거'의 아픔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물관이 다 그렇겠지 했는데, 상당히 잘 만들어놓았습니다. 차분하게 돌아보면 우리나라 현대사의 중요한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학생들 수학여행은 물론이고 놀러 가셨더라도 이곳에 들러보세요. 아름다운 제주가 품고 있는 깊고 진한 슬픔과 제주 사람들의 의로운 용기를 배워올 수 있습니다.
▲ 조병옥(왼쪽에서 두 번째)은 우리 마을에서는 박사로 통하지만, 사실 그는 제주 4·3 학살의 책임자였다. ⓒ주재일
그런데 그곳에서 낯익은 이름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조병옥'. 우리 마을 바로 위에 조병옥 씨의 큼지막한 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박사라고 부르지만, 4·3 사건 당시 그는 경무부장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쯤 되는 경찰 총책임자였지요. 그를 훌륭한 인물로 추앙하는 이들이 많습니다만, 슬프게도 역사 속에 그는 꼭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 사람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국무회의에서 지시했고, 조병옥 경무부장은 직접 제주에 내려와 경찰들을 독려하며 그 지시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실적이 떨어지는 경찰들을 때려가면서 '빨갱이 사냥'을 했다고, 안내하는 학자가 말했습니다. 일제 때 독립운동가를 잡으러 다녔던 친일파를 경찰로 다시 등용했습니다. 조병옥은 "꿩 잡는 게 매"라며 친일 경찰들의 능력을 높이 샀다고 합니다.
딸아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조병옥 묘까지 자주 놀러갑니다. 묘가 크면 과거에 훌륭한 일을 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게다가 조병옥 묘는 왕릉만큼이나 터가 넓습니다. 그런데 그가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죄 없는 양민들을 수없이 학살하도록 지시한 사람이었다니.
돌아오는 길에 딸에게 일러두었습니다. "조병옥 묘를 지날 때마다 다시는 그런 짓,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기억해라." 타산지석 아니 타산지묘입니다. 딸아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끄떡입니다.
한동안 침묵하다가 딸이 느닷없이 말했습니다. "아빠, 어젯밤 꿈에 친구들이랑 촛불집회했다." 4·3 사건에 관해 정확하게 모르지만 느낌으로 촛불집회하는 일 같은 사건이었다는 느낌을 받았나봅니다. "별아, 아직도 그런 일이 끝나지 않았단다. 집에 가서 약한 사람 무시하고 괴롭히는 일이 벌어지면 또 아빠랑 엄마랑 같이 촛불집회 가자." "응. 솔(세 살배기 작은딸)이도 같이 가야지."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시대에는 이념 때문에 생명을 빼앗는 일이 없기를, 더불어 평화를 누리는 대동 세상이 오기를 빌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마을에서부터 생명·평화 세상을 만들어가야겠습니다.
주재일/ <아름다운마을신문> 편집장
제주 4.3 60주년 평화UCC 공모작 가작 (출품자 : 김미정)
출처 :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글쓴이 : 땡큐삐리 원글보기메모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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