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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민중신학의 이론적 구조
    민족을 꿈꾸다 2009. 1. 23. 08:28

    젊은민중신학자들의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1997년 제2차 신학 아카데미 강의안

    기간: 1996년 3.24-5.19(공휴일 제외) 매주 월 저녁 7:00-9:00시

    장소: 경동교회 교육관 2층

    주제: 민중신학 - 실천이론으로서의 민중신학과 오늘의 과제

    강사: 최형묵(조직신학 / 본 연구소 연구실장)

    문의처: 이준모 목사(사무국장/부평해인교회 032-542-7813)

     

     

    제2강 3/31

    민중신학의 이론적 구조 - 실천이론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성격

     

    1.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 역사 초기에 신학이란 원래 성서에 관한 묵상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성립 이전의 신학에 관한 이해였다.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신학, 곧 합리적 지식으로서의 신학은 성립은 12세기에 이르서였다. 아벨라르두스(Abelardus, 1079-1142)에 의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이 ‘신학’(theologia)은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이르러 본격적인 하나의 체계를 갖춘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 ‘신학’(theologia)은 말 그대로 ‘신에 관한 학문’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학에 대한 이해는 가장 전통적이며 일반적인 신학에 관한 이해로 여겨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와 같은 신학에 관한 이해는 곧바로, ‘신학은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이라는 주장을 옹호하게 되었다. 이 견해가 필연적으로 그와 같은 결론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신학에 관한 이해가 형성되던 시기에 교회는 교회는 하나님이 현존하는 배타적인 거룩한 장소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인간의 재발견, 더 구체적으로 인간 개체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난 후 신학에 대한 이해는 달라진다. 이른바 자유주의적 신학 이해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자유주의적 신학 이해는,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이라는 명제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에서 신학은 신앙인 개인의 실존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최근 서구의 진보적 신학 또는 제3세계 신학의 등장은 신학에 대한 이해를 또 다시 새롭게 하고 있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롭게 답변하려고 하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신학은 신앙적으로 인식하고 사고하는 비판적 학문이다. 일차적으로 신학은 증인들의 소리를 통해 알려진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심한다.”(H. J. Kraus)

     

    “신학은 말씀의 빛을 받아서 그리스도교 신앙실천에 관해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G. Gutierrez)

     

    “신학이란 그리스도교 신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이며 “신학은 언제나 그 시대의 언어를 매체로 하여 재해석하는 작업”이며 또한 신학이 신학이 “한 시대의 언어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단순히 유행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관심의 반영”이다(서남동)

     

    이상의 제시된 몇 가지 예를 놓고 우리는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재음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들에서 공통되는 점은, 우선 신학이란 단순히 신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각각의 주장에서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공통적인 요소는, 신학이란 신앙의 전통과 특정한 시공간에서의 그 신앙전통 수용자들의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우선 이 점만을 확인하자.

     

    2. 민중신학이 이해하는 ‘신학’ - ‘두 이야기의 합류’의 신학적 의의

     

    이와 같이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서남동의 ‘두 이야기의 합류’ 개념에서 더욱 명료해진다. 서남동은 앞서 예시한 주장과 더불어 “기독교의 민중전통과 한국의 민중전통이 현재 한국교회의 ‘신의 선교’ 활동에서 합류되고 있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민중신학의 과제라고 말함으로써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의 본질적인 준거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이해는 신학의 구성요소 내지는 신학의 근거(또는 규범)가 달라졌음을 보여 준다.

    전통적인 신학에 관한 정의, 곧 신학은 ‘신에 관한 학문’이라는 말의 의미를 일단 전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먼저 그 ‘하느님’을 무슨 수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 때 전통적 신학에서는 그 근거가 분명하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다. 하나는 개신교의 성서주의요, 또 다른 하나는 가톨릭의 전통주의다.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개신교), ‘교회의 거룩한 전통이 전하는 하느님’(가톨릭), 이것이 신학의 근거였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양자의 전통을 아울러 이야기하자면,) 성서와 교회의 역사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뜻을 캐묻는 것이 신학의 임무인 셈이었다. 그러나 서남동이 말한 신학의 이해는 이와 다르다.

    첫째, 하느님의 자기계시의 장을 새롭게 이해하고 있다. 성서와 교회의 전통을 포함하는 그리스도교적 전통에 한국의 전통을 새롭게 추가하고 있다. 일반화시켜 말하자면, 구체적 신앙 주체들이 속한 특정집단, 곧 민족적 단위의 전통(민족사적 전통)을 추가한 것이다.

    둘째, 단순히 ‘전통’을 말하고 있지 않고 ‘민중전통’을 말하고 있다.

    셋째, ‘전거’(典據, point of reference, <참고자료>)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종래의 입장과 결정적 분기점을 형성하고 있다. 종래의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는 성서이든 전통이든 그것들은 일종의 규범과 같은 지위를 가졌다. 비록 성서 자체 혹은 교회 전통 자체가 규범이 아니고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이 진정한 의미의 규범이라 하더라도,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진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규범과 같은 지위를 누리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반면에 ‘전거’라는 말은 이 ‘규범’과는 다른 일종의 ‘참고자료’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한국의/민족사적 전통과 함께 하나의 참고자료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진리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과거의 전통이 아니라 현재 ‘하느님의 선교활동’ 곧 ‘실천’이 된다.

    이상의 차이점들을 종래의 입장과 관련하여 재음미해보자.

    첫째, 하느님의 자기계시가 이루어진 영역으로서 민족사적 전통을 추가한 것은 언뜻 보아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역사상 어떠한 그리스도교의 전통도 그 전통이 발생한 바로 그 역사의 현장과 유리되어 생성된 적이 없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전통이란 그때그때마다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구체화되면서 형성되었다. 성서 자체가 이미 특수한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상황 또는 서구 민족들의 역사적 상황과 결합된 것은 정당하고 한국 민족의 역사적 상황과 결합된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하느님이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라면, 우리 민족의 역사 또한 하느님의 활동 무대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하느님은 한국 민족의 역사 가운데서 이미 활동하셨고 지금도 활동하고 계신다. 이 점에서 한국의 전통을 새롭게 추가한 것은 그리스도교 정체성과 다른 어떤 이질적인 요소를 첨가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인정해야 할 사실을 비로소 언급한 것일 뿐이다. 또한 이 ‘합류’는 비단 ‘두’ 이야기의 합류로 한정되지 않는다. 서남동이 말하는 합류는 열린 구조이다. 특정한 시공간에서의 주체들의 실천에 따른 선택적 수용으로 또 다른 ‘이야기’가 함께 합류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단순히 ‘전통’을 말하지 않고 ‘민중전통’을 말한 것은, 이 역사 속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에 대한 또 다른 표현방식이다. 하느님의 뜻은 추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느님은 서로 분열되어 있고 대립하고 있는 인간들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선택적 행위로 뜻을 이루어 간다다. 하느님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누리며 만족해 하는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에 하느님은, 늘 빼앗기고 짓눌려 살아 왔기 때문에 어서 빨리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민중을 택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어갈 주체로 세운다. 출애굽 사건에서의 히브리 민중들, 예수의 선택받은 민중이 이를 입증해 준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인식은 이 세계가 적대적 세력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세계에서 억압받는 민중들의 삶의 존재조건은 민중들로 하여금 현실세계를 정확하게 직시하게 한다. 그들은 우선 세계의 생성과 발전이 자신들의 구체적 노동을 통해서 이룩됨을 깨닫고 그들 자신이 역사발전의 주체임을 자각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을 자신들로부터 즉 ‘아래로부터 위로’ 바라봄으로써 세계 현실에 관한 모든 이론에 관한 실천의 우위를 확실하게 자각한다. 더불어 적대적 세력들로 분열된 세계 현실에서 억압받고 빼앗긴 위치에 선 그들은 지배자들의 사이비 보편성을 간파한다. 그래서 그들은 지배자들의 사이비 보편성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당파적 실천이 진정한 보편성의 계기가 된다는 것을 자각한다. 결국 민중의 당파성이 지배계급의 당파성과 다른 점은, 지배계급은 이러한 당파성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사이비 보편성으로 둔갑시키는 데 반해, 억눌리고 빼앗기는 대중은 자기들의 당파성이 엄연한 당파성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내적 계기로 삼는 운동의 결과로 참된 보편성이 실현된다는 것을 자각한 점에 있다. 즉 민중들의 해방을 위한 당파적 실천 속에 인간의 보편적 해방을 위한 참된 계기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민중신학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셋째, 두 전통이 ‘실천’ 속에 합류하고 있다는 통찰은 민중신학의 실천이론적 성격을 분명히 해 준다. 더불어 이 통찰은, 오늘 여기의 우리들이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분명히 밝혀 준다. 전통이 의의를 지니는 것은 ‘오늘 여기에서의 우리들’의 ‘실천’ 때문이다. 이 실천 때문에 전통은 과거의 유산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개입할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이 실천으로 말미암아 별개로 존재해 왔던 전통들이 상호작용을 하여 소위 ‘지평융합’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은 ‘실천’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서남동의 ‘합류’의 신학은, 크게 보아 안병무가 말한 ‘사건’의 신학과 맥을 같이 한다. 본래 안병무의 ‘사건’의 개념은 실존주의 신학의 (신앙의) 사건을 재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 실존주의 신학에서 사건은 시공간을 달리하는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의 의미를 연결하는 개념으로 ‘관계성’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이 때 사건은 실존적 만남을 강조하나, 민중신학에서 재해석된 사건은 그 ‘관계성’의 함의를 역사적 지평으로 확대한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주어진 그때그때마다의 ‘현장’을 전제한다. 서남동의 합류의 신학에서 이해된 실천 역시 마찬가지다. 민중신학은 그 사건의 현장, 실천의 현장을 ‘민중사건의 현장’이라 말한다. 이 현장은 앞서 말한 대로 적대적 세력들로 분열되어 있는 역사의 현장을 말한다.

    이 역사의 현장에서 민중들이 일으키는 사건, 민중해방 실천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민중신학이다. 그러기에 민중과 그들의 실천은 민중신학의 자료라는 소극적인 측면을 갖는 데 그치지 않고, 민중신학을 형성하는 구성적 계기가 된다. 민중신학이 전통의 재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민중의 삶을 싸고 도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 현실에서의 실천을 강조하며, 이를 위한 비판적 학문들과의 의사소통을 중요시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이러한 노력은 실천이론으로서 민중신학의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과정인 것이다.

     

    3. 실천이론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임무 - 신학의 장(場)과 실천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민중신학의 임무가 무엇인지 사실상 밝힌 셈이다. 그러나 보다 분명히 그 과제를 발힌다는 차원에서, 결론 삼아 민중신학에 의해 도달한 신학의 장과 실천의 의미를 재확인하려 한다.

    우리는 민중신학이 위치하고 있는 ‘신학의 자리’가 ‘교회’나 신앙인 개인의 ‘실존’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신학의 자리는 ‘민중사건의 현장’, ‘민중해방 실천의 현장’이다. ‘하느님의 선교’라는 말은 이를 뒷받침하는 신학적 개념이다.

    그러나 이것이, 민중신학이 그 장을 배타적으로 설정하여 교회나 개인 실존의 차원을 필연적으로 배제한다는 것을 의도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관계의 차원이 교회나 개인의 실존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듯이, 교회나 개인의 실존 역시 전적으로 사회적 차원으로 곧바로 환원되지 않는다. 민중신학은 이 점을 인식하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로 삼는다. 민중신학이 일반 사회이론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교회적 형태로 존재하든 개별적 혹은 또 다른 집단적 형태로 존재하든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수용하고 이를 계승하는 분명한 실체(주체)가 존재한다는 점은 민중신학이 일반 사회이론으로 환원될 수 없는 현실적 조건이다. 다만 민중신학이 ‘민중사건’을 신학의 주요 구성요인으로 보고 그 현장을 중시하는 것은 교회나 개인의 실존의 문제를 역사적 사회적 관계 안에서 볼 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민중신학이 신학의 장을 새로이 이해하는 데 기여한 만큼 그 의의는 다시 한번 강조될 필요가 있다. 민중신학은 그리스도교 혹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내적 과제를 수행할 뿐 아니라, 보편적인 민중해방 사건을 향한 과제를 수행한다. 이 점에서 민중신학은 그리스도교적 혹은 교회내적 담론으로서 역할할 뿐 아니라, 보편적인 비판담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때 민중신학은 보편적인 비판의 준거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적 가치에 입각하여 현실세계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과제를 실천이론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주요한 실천의 한 형태라 생각한다. 즉 그것은 ‘이론의 차원에서 개입하는 실천의 영역’에 해당한다. 이러한 시각은 실천에 대한 단선론적 시각의 극복을 전제한다. 우리는 여러 층위의 실천이 가능하다고 보며, ‘실천이론으로서의 민중신학’이라 말할 때 이론적 성찰 자체가 하나의 실천 행위가 되는 신학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주요교재 및 참고자료>

    최형묵, <<사회변혁운동과 기독교신학>> 서울: 나단, 1992, 제1장 <기독교운동과 신학>

    서남동, <두 이야기의 합류>, <<민중신학의 탐구>> 서울: 한길사, 1983, 45-82

    강원돈, <신학적 해석학의 새로운 모색> / <신학하는 방법의 새로운 모색>, <<물의 신학>> 서울: 한울, 1992

    박성준, 제5장 <‘사건’과 ‘합류’의 해석학>, <<민중신학의 형성과 전개>> 서울: 시대와 민중사, 1997(근간)

    구티에레즈, <<해방신학>>, 제1장 <신학, 그 비판적 사색>

    미구에즈 보니노, <<해방의 정치윤리>>,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 제3장 <실천에서 이론으로 그리고 다시 실 천으로>

     

    첨부파일 민중신학의 이론적 구조 - 최형묵.hwp

     

    출처 : 반석의 신앙 따라잡기
    글쓴이 : peterb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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