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와 서양신화의 비교연구: 여성학적 해석을 중심으로
발표자: 신은희(오하이오대 교수)
1. 신화와 역사: “은유의 해석학”
이 글의 목적은 단군신화를 세계신화들과 함께 여성학적 관점에서 비교 연구함으로서 한국적 여성론을 제시해보고자 하는데 있다. 이를 위하여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두 가지 이슈가 있다. 첫째는 신화의 개념정의이고, 둘째는 신화의 비교연구의 방법론에 관한 이해이다.
첫째, 이 글에서 일관성 있게 사용할 ‘신화’라고 하는 용어의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단군 이야기’가 신화인가 역사인가 하는 질문 자체는 오늘날과 같은 후기 현대사회의 상황에서는 그리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신화와 역사의 구분 논쟁은 서양학계의 경우 19세기말과 20세기초까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둘의 구분은 계몽주의(enlightenment)의 산물이었고, 현대주의(modernism)라고 하는 출발선상에서 생겨났던 하나의 ‘맥락이론’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탈현대(post-modernism)의 흐름은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종교의 ‘역사성’에 대한 회의론을 제기하면서, 신화와 역사의 뚜렷한 구분을 시대착오적인 방법으로 인식하고 있다. 사실, 탈현대주의(post-modernism)는 역사의 죽음을 선언함과 함께 시작한다. 이 말의 의미는 역사적 실증적 연구만이 종교적 본질이나 진리를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론이 더 이상 될 수 없음을 뜻한다. 물론, 이러한 흐름은 ‘사실’(hard fact)에 기초한 역사적 사건들의 중요성을 모두 상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화와 역사가 더 이상 배타적인 관계성이 아님을 의미한다. 오히려, 신화와 역사는 상호적인 관계성(two-way traffic)으로 이해된다. 과거의 어떤 역사적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신화적 해석, 또한 일련의 첨가된 전승들을 통하여 그 사건의 상징적 진리와 중요성이 전달된다는 점에서 둘의 관계성은 상호적이다. 따라서, 신화인가 역사인가의 질문은 이제 ‘역사속의 신화’(myth in history), ‘역사에 관한 신화’(myth about history), 혹은 ‘신화적 역사’(mystical history)와 같은 개념으로 전환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따라서 신화란, 시대에 따라 한 개인의 상상력에 의하여 자유롭게 만들어진 우화(fable), 창작물(invention), 또는 환상(illusion)이 아니다. 신화는 고대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어온 한 종족의 집단적 무의식의 표현이며, 그 민족의 특수한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최초의 예증적 계시(primordial exemplary revelation)이며 정신적인 전통이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사용하는 ”신화“의 개념 역시 신화와 역사가 양립하여 상호 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둘째, 비교신화연구의 방법론이란 ‘교차문화적 해석학’(cross-cultural hermeneutics)이라고도 이름할 수 있다. 각각 다른 문화적 토양에서 오랜 기간동안 발전되어온 문명의 집단적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신화를 비교해 본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동서문화가 밀접하게 공존하여야만 하는 현실에서 이러한 비교연구는 필연적이며 또한 가능한 작업일 수 있다. 이를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면 비교연구는 반드시 ‘상관적 대화의 기술’(co-relational dialogical method)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관적 대화란 각각의 특정한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상황, 즉, 신화가 발전되어 왔던 독특한 컨텍스트(context)의 이해를 기초로 연구하는 것이다.
Friedrich Max Müller나 Goethe의 표현처럼, 만약 인간이 오직 하나의 종교와 언어만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어떠한 종교와 언어도 알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는 문화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비교연구에 있어서는 각각의 특정한 ‘지역성’(locality)을 고려하여 해석하여야 함을 시사한다. 동서양의 비교연구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찾을 수 있는 방법론적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상황성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특정한 종교전통에서 발생되고 진행 되어온 독특한 종교성의 패턴이, 지역성을 초월하여 다른 문화권에서도 비슷하게 발전되어 왔을 것을 전제하는 단순한 오류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단군신화를 세계신화들과 비교해석함의 의미는 특정한 신화의 우월성을 창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서로 다른 세계의 종교전통 속에서 독특하게 발전되어온 각각의 신화적 고유성과 신화적 상징체계를 그 맥락 가운데서 해석하여 본다는 점에 있다.
문화적 실재(cultural reality)이며 영성적 원형(spiritual archetype)인 신화는 상징적 체계가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화적 상징은 다양한 시대적 상황과 해석자의 관점 그리고 특정한 정치적 경험에 의하여 여러 가지 각도에서 재평가 될 수 있다. 리꾀르(Paul Ricoeur)는 신화해석의 방법론으로서 ‘은유의 해석학’(hermeneutics of metaphor)을 제시한다. 리끼르는 신화의 상징체계에서 ‘은유적 진리’(metaphorical truth)를 발굴하는 것을 신화해석의 주요업무로 이해한다. 은유적 진리의 전제는, 신화는 기본적으로 직접 이해할 수 없는 종교적 상징들도 구성되어 있으므로 그 신화가 창조된 문화적 상황안에서 ‘은유적으로’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신화의 은유적 진리는 사실적 실재(factual reality)보다 더 사실적이며 한 종족의 정신적 전통속에 집단적으로 내재되어 쌓여온 정신적 심연을 반사하는 진리라고 설명한다. 은유는 실재를 구성하기도 하나 객관적 혹은 실증적 실재(objective reality) 그 자체와는 동질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리끼르는 신화해석에서는 이처럼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진리이외에 실증 그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thing-in-itself 객관적 실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서양신화와 단군신화를 해석하는 방법론의 하나로서 각 신화속에 내재하고 있는 은유적 진리들을 여성학적 관점에서 재조명함으로써 한국적 여성론의 종교적 철학적 모형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서양신화의 여성학적 이해
‘서양신화’라고 할 때, 이는 상당히 광범위한 전통을 일컫는 것이다. 이 글에서 서양신화는 특별히 서양의 문명화과정 속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모체전통’의 신화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기독교 창세신화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바빌로니아의 창세서사시, ‘에뉴마 엘리쉬’(Enuma Elish)와 기독교의 ‘아담과 이브’ 신화, 그 외 최근 백인여성학자들이 여상학을 위하여 재건하고 있는 그리이스와 로마의 여신화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사례연구로서 위의 몇 가지 신화들을 여성학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봄으로써 최근 영미권에서 새롭게 진행되고 있는 여성학의 흐름을 먼저 진단하고, 그 신화들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신화적 상징체계와 서구영성의 원리, 그 패턴들을 함께 이해하도록 한다.
최근 영미권에서 주도되고 있는 여성학은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사고구조를 해체하는 것(deconstruction)은 물론이고, 철저히 여성 중심적인 새로운 정신사를 재구성(reconstruction) 하는 방향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2000년을 전후로 새롭게 출판되는 백인여성 중심의 여성학자료들은 기존의 기독교 문명을 이끌어 왔던 ‘신학’(Theology)의 구성체제를 ‘여신학’(Theaology)으로 전향시켜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여신화의 관점이란 과연 무엇인가?
여신화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지난 과거 20세기동안, 서양 문명권은 ‘신학’(Theology)이라고 하는 허위 과학성(pseudoscience) 위에 구축하여 왔다고 비판한다. 결코 알 수 없는 신의 존재에 대한 상징체계는 지극히 남성중심적인 내용으로 일괄되어 내려왔고, 따라서 서양문명의 출발은 여성 배타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가부장주의 문화형태가 지배문화로 정착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고대모계사회로 회귀할 것을 열망한다. 예를 들면, Babara Walker는 유대 기독교의 전통은 여신화의 영성을 ‘이방종교’(paganism), ‘악령숭배’(deviltry), 혹은 마녀숭배(witchcraft)로 규정하여 핍박하여 왔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전통의 창조신화는 남성지배문화를 유지시키기 위한 정신적 원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주장하고 여신화의 관점에서 새롭게 재구성한 창조신화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태초에: 최초의 신화 In the Beginning: The First of All Myths”
태초에, 자궁이 있었다. 신비한 자궁은 무한한 어둠의 세계였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은 생명이 될 수 있는 잠재성으로 존재하였다. 물질과 에너지로 되어있는 혼돈의 피가 가득한 자궁... 물처럼 흐르고, 땅의 소금기와 함께 진흙처럼 엉기어 있으며, 모든 바람과 함께 쉬지 않고 타오르는 붉은 화염액... 그 자궁은 어머니였다. 모든 생명체 이전에 존재하였던 태초의 어머니... 그녀는 ‘깊음’(Deep)이었다--히브리 Tehom; 바빌로니안 Taimat; 이집트 Temu; 그리이스 Themis.
시간조차 없었던 그 태초에 그녀의 자궁 안에서는 두 차원의 무한함이 창조되었다. 우주적 탄생을 위한 어머니의 산고는 태초의 신음으로 하늘과 땅이 갈라져 구분되어졌다. 그녀는 하늘의 빛으로 해, 달, 별들을 창조하였고, 땅의 것으로는 대륙, 강, 산, 바다들을 만들었다. 해의 빛으로 낮을 정하고 빛의 그림자로 밤을 정하였다. 하늘과 땅이 접하는 그 사이에서 모든 생명체들이 탄생되기 시작하였다. 모든 생명체들은 지속적인 물질과 에너지의 운동으로 형태를 갖기도 하고 형태가 사라져 다시 어머니의 자궁속과 같은 세계로 회귀되기도 한다. 어머니 여신은 붉은땅의 (adamah)을 그녀의 거룩한 피로 빚어 인간을 창조하였다. 여신은 여자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고 생명을 창조하는 힘을 부여하였고 남자를 여자의 위로자와 돕는자로 정하였다. 문명의 새벽에 어머니 여신은 그녀의 사람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지혜의 방법들을 가르쳤다: 씨를 뿌리어 거두는 것, 음식을 장만하는 것, 옷을 짜는 것, 안식처를 준비하는것, 불을 사용하는것과 계절의 변화를 깨닫는것... 어머니 여신은 또한 인간에게 이르시길, 반드시 필요한 것 외에는 육축이나 생물등 땅으로부터 얻은 소산들을 과도히 취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어머니 여신의 세계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계였다...
이러한 창조신화의 재구성은 서구문명에 전통적으로 내려온 신의 성(Gender)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뜻한다. 신학(Theology)이 여신학(Theaology)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의 성전환 과정을 궁극적으로 인도하는 서양문명권의 정신적 근원은 바로 여신의 부활에 있다. Cynthia Eller는 이미 서양문화 속에서 여신학은 주류문화(mainstream)로 정착되어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녀는 선사시대의 모계신화는 “인류의 영광스런 과거이며 미래의 희망”이라고 진술하며, 여신학의 재현은 인류의 해방역사를 다시 부활시키는 중요한 학술연구라고 주장한다.
여신의 부활이 서양여성학의 정신적 원형으로서 중요한 이유는 인류가 청동기문화의 출현과 함께 시작한 가부장제도와 남성문화내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왔던 여성혐오증상들을 근원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모계영성’(matriarchal spirituality) 때문이다. 대부분의 여성학자들은 ‘모계영성’ ‘모권중심’의 용어들이 가부장주의(patriarchy)의 대칭어가 아님을 강조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모계중심의 사회란 전적으로 여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남성중심의 역사속에서 거의 상실되어가고 있는 ‘모계적 계승’(the ascendency of Mother's way)을 부활시키는 평등 공동체를 의미한다. Mary Daly는 모권제의 올바른 해석은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 힘의 근본적 원리가 소유적이거나 지배적이지 아니하여 자연과도 하나가 되는 조화롭고 유기체적인 관계성의 생명력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서양여성학자들은 모계영성의 회복을 위하여 대안적 용어들을 다음과 같이 창안하기도 하였다: gylany, gynocracy, martricentric, gynocentric, etc. 이러한 새로운 개념들은 문명의 초기에 존재하였던 모계원리들이 사회의 구조적인 기본질서들로 다시 설정되고 유지되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Riane Eisler는 인류문명의 발전과정중 과연 어떤 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성 그리고 여성적인 원리들을 신의 거룩한 창조성으로 이해하였던가를 반문한다. 모계영성의 회귀를 제안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여성중심사회에서는 부권사회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었던 남녀의 조화와 ‘동반자’(partnership) 관계성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계사회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생존을 위하여 정치적 힘을 공유하였고, 젂어도 여성의 몸과 성이 악마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권제도의 출현과 함께 힘의 평등성은 깨어졌고 남성과 여성간의 ‘동반자 모델’(partnership model)은 남성주도적인 ‘지배모델’(dominator model)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러한 관계성의 변질은 서양문명권내에서 전통적으로 출현하는 성의 갈등과 투쟁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서양신화속에 깊이 내재하고 있는 서구영성의 전형적인 패턴으로 기독교의 극단적 성의 이분화현상과 함께 서양문명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서양신화들의 상징체계는 ‘성의 충돌’(clash of sexuality)의 무대라고 할 수 있다. Jung이 말하는 ‘남성원리’(male principle)과 ‘여성원리’(female principle)의 각축장이라 할만큼 남성신과 여성신으로 대표되는 남녀 두 성의 분리와 대립 그리고 투쟁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부분의 서양신화에서는 남성과 여성을 각각 하늘과 땅으로 상징되는 것으로 묘사하여 양자의 계속적인 충돌과 분열 그리고 복수로 이어지는 경향성이 매우 강하다.
특히 기원전 2000년 전후의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면서 서양 문명 속에서는 ‘성의 전쟁’(war of sexuality)이 시작된다. 전쟁의 결과는 항상 남성신이 ‘지배적 성’(dominant gender)으로 등장하면서 여성신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거나 핍박하게 된다. 이는 청동기 시대의 등장과 함께 가부장주의 지배 문화가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을 신화가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Lancelot L. Whyte는 신화에 나타난 이러한 충돌 현상은 유럽 문명의 균열적 사태를 초래했으며 이를 ‘유럽적 균열’(European dissociation)이라고 이름하였다. Whyte에 의하면 ‘균열성’의 특징은 거의 대부분의 인류에게서 발견되는 심리학적 특질로 서양유럽의 경우는 그 정도가 극대화되어 문명사의 정신적 패턴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여성 원리에는 땅-물질-밤-몸 같은 것이 연관되고 남성 원리에는 하늘-정신-낮-마음 같은 것이 연결되어 전형적인 이원론의 세계관이 서양문화를 대표한다고 설명한다. 서양의 이원론적 사고양식, 즉 정신과 물질을 분리시키는 양극적 문화적 특성은 이러한 신화들을 통해서도 가장 쉽게 파악이 되며, 오히려 이런 신화들을 기초하여 서양의 종교 문화적 양극화현상이 발생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세계관의 균열 현상은 곧 문명의 병적 현상을 초래하였다.
서양신화 속에서 여신들의 자취들은 청동기 문화와 함께 가부장문화가 시작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비애를 맞이하게 된다. 서양 여성신들은 세가지 모습으로 전락한다. 첫째는 살해되어 악마화 되는 경우, 둘째는 남신들의 아내나 딸로 종속 되는 경우로 가장 행복한 예로 인식되어 왔다. 셋째는 창녀가 되어 남신들의 성적유희물로 그려지는 사례들이다.
예를 들면, Samos의 Argive평야의 독립적 여신이었던 Hera의 경우는 무기력하고 정신적 문제가 있는 Zeus의 아내역으로 전락되고 만다. 또한 “생명의 공급자”로 불리웠던 Pandora는 그녀의 물병을 열어 세상에 악을 뿌리는 사악한 여신으로 그려진다. 즉, 악마화되는 경우이다. Aphrodite라는 생명의 여신은 Uuranos라는 남성신의 생식기에서 탄생되어지는 것으로 그려져 여신에게 있었던 생명의 근원적 이미지는 사라지고 만다. 단순히 남성의 성적 흥분을 위한 보조적 객체적 존재로 상대화되어지고 만다. 핍박받는 여신들의 대표적인 이야기는 아마도 바빌로니아 창조신화 Enuma Elish라는 남성신들의 등장을 웅장하게 그려놓은 서사시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혼돈’을 의미하는 Tiamat이라는 여신이 남성신 Marduk에 의하여 살해당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Tiamat는 Salty 바다의 여신으로서 세상의 혼돈상태를 파괴하는 남성 비카오스적 존재들을 의식하여 혼돈의 파수꾼들을 불러 일으켜 카오스의 상태를 지키고자하는 여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가부장주의가 등장하는 시대속에서 Tiamat은 악한 괴물들을 탄생케 하는 악의 여신으로 그려지며 마침내는 Marduk이라는 남성신에 의하여 잔인하게 살해된다. 살해된 Tiamat의 몸에서 우주는 창조된다. 몸에서 나온 괴물들의 모습이란 뱀과 같은 파충류들이며 온 몸에는 피 대신 독액이 흐르고 독아들이 빽빽히 박혀 있어서 쳐다보기만 해도 그 흉칙함에서 오는 충격 때문에 죽음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악한 여신의 몸에 가학적인 폭행이 가해지는데 온 남성신들이 잔인하게 살해하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Carol Christ는 이 여신의 죽음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Marduk은 자신의 그물을 던져 먼저 Tiamat의 목을 조이며, 그녀의 뒤쪽에서 Imbulla 라고 하는 폭풍우를 일으켜 Tiamat의 얼굴을 강타하기 시작한다. 공격을 받은 Tiamat이 입을 크게 벌려 Marduk을 삼키려하자 Marduk은 Imbulla라는 강풍을 그 여신의 입에 몰아 넣어 다물지 못하게 한 후 날카로운 바람을 일으켜 그녀의 몸속을 난도질하기 시작한다. 거센 바람의 힘으로 그녀의 몸이 부어오르자 Marduk은 그 입에 독화살을 쏴 그녀의 자궁을 찢어 내고 죽음에 가까운 그 여신의 몸체를 내동댕이친 후 그 위에 걸터앉아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Tiamat의 생명은 이로써 끝이 난다.
Merline Stone은 성경에 나타난 창세신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모두 에누마 엘리쉬란 여신 숭배를 배격하는 가부장적 관점에 기초하여 쓴 것으로 주장한다. 예를 들면, 뱀과 같은 동물이나 여인의 벗은 몸과 나무들은 여신숭배에 있어서는 신성함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성서에 표현된 뱀과 여인의 모습은 대조적으로 남성들을 유혹하고 타락시키는 악의 근원이자 상징으로서 표현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창세신화에 나타난 여신숭배를 악마화하는 남성중심주의 해석은 후기 서양 기독교 신학자들로 하여금 여성들은 비이성적 이며, 성적인 존재로써 남성들과 동일한 합리적 그리고 이성적 성격을 소유할 수 없는 열등한 존재로 추락시켜 버리는 데 그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성인 Saint으로 추앙되는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전통적으로 여성의 성과 몸을 악마화시킨 사례들은 그리 새로운 사실들이 아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의 교리를 집대성한 신학자 St. Augustine은 아버지 하나님은 남성을 여성의 지배자로 창조하였음을 공포하였고, St. Anthony는 여성과 악을 동질화시키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만약 당신이 길에서 여자를 만나거든 악마의 본질을 대면하였다고 여기라. 그 여자의 음성은 뱀이 쉿소리를 내며 지나는 것이니...”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일괄적으로 여성혐오적인 신학해석을 담당하여 왔고 여성의 존재만큼 사악하고 해로운 야만동물이 없음을 가르쳤다. 초기 기독교의 주요 교리를 성립시킨 교부 Tertullian은 여성의 자궁을 일컬어 “악마의 성문”(devil's gate) 이라고 칭하였으며, 여성의 사악함은 악의 상징인 용의 맹렬함과 독사의 간교함과 비슷해 이들 짐승들과 구별하기가 힘들 정도라고 하였다. 이러한 여성혐오증은 창세신화의 이브의 죄에 기인하는 것으로 모든 여성들은 “또 다른 이브”(another Eve)이며 따라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의 본성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서양 “여성 혐오문화”(mysogynist culture)는 서양 기독교문화의 전통으로 내려왔으며 그 극단적인 예는 중세기 “마녀사냥”(witch hunting)에서 잘 나타나 있다. 14세기와 17세기 사이에 무려 600만명 이상의 여성이 마녀라는 죄명으로 화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는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살해한 숫자와 비슷하다. 인간역사 속에 특히 종교 역사 속에 이러한 여성 학살(holocaust)의 비극을 초래한 종교는 서양의 기독교가 대표적이며 이는 서양사상 체계가 근본적으로 분열성과 대립성을 특색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에누마 엘리쉬는 서양신화의 전형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늘의 남성신들이 대거 출동하여 하늘의 광채를 안고 땅으로 내려와 땅의 여성신들을 살해하는 장면은 서양신화의 공통적인 특색이다. 남성신들이 여성신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우주 창조의 질서가 재정립되는 것은 유럽의 신화적 경향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같은 종족적 언어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인도의 아리안들의 경전인 리그 베다에도 여러 신들이 등장하는 데 그 중 하늘 천둥의 신인 인드라(Indra)는 가장 선명하게 의인화된 영웅신이며 전체 찬가의 1/4를 차지할 정도이다. 신들의 술인 소마를 즐기며 바즈라를 휘두르고 무엇 보다 땅의 여신 브리트라(Vritra)를 무자비화게 처단한다. 시인들은 인드라가 브리트라를 퇴치한 공로에 대하여 칭찬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인드라는 또한 우리 단군 신화에서 제석환인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래에 인드라가 브리트라를 살해하는 장면을 리그 베다 본문을 통하여 들어보도록 한다.
인드라는 위대한 무기 바즈라로써
어깨를 부풀린 가장 완강한 방해자
브리트라를 죽이니 도끼로 쓰러진
나무뿌리처럼 아이는 땅위에 엎어져 눕도다.
술에 취한 사이비 무사처럼 실로 브리트라는
힘차게 위압하며 소마를 말끔히 마셔버리는
호탕한 용사에게 도전하나
인드라가 지닌 무기의 충격에 그는 감당하지 못하나
인드라를 적으로 삼는 자는 얼굴이 찢기어 분쇄되었도다.
인드라의 브리트라 살해 장면은 말둑의 티아맡 살해 장면과 다른 점이 없다. 이는 마치 그리스에서 제우스가 타이폰을 살해하는 장면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청동기 시대와 함께 시작된 하나의 에누마 엘리쉬 현상이다. 이를 신화속에 나타난 “인도-유럽적 균열”적 영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대 서양의 여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전통 속에 깊이 뿌리 박고있는 이러한 성의 균열과 거기서 비롯된 폭력을 비판하면서 대안적인 정신세계를 찾고자하는 것이다. 종교심리학자 Naomie Goldenberg는 인류 역사속에서 지배적인(dominant) 남성들은 가부장주의의 존속을 위하여 근본적인 “거짓말”을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왔다고 비판하며 이를 “가부장적 거짓”(patriarchal lie) 이라고 이름한다. 이 거짓은 남성원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최초의 카오스 여신들의 존재와 생명의 상징인 자궁의 신비를 악마화 하였으며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의 남신숭배를 강요하여 왔다는 것이다. 지배적이며 전투적인 남성신들에 비교해 여성신들은 비하되어지고 모계시대에 신성시되었던 여성의 몸과 뱀과같은 동물들은 악의 근원으로 추락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토록 분명한 거짓들이 어떻게 오랜기간 동안 역사의 정통성으로 이어져왔으며 왜 아직도 그 거짓의 너울이 벗겨지지 않고 있을까. Goldenberg는 단순하리 만큼 그 답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즉, 힘을 가진 성(gender)이나 문화집단이 소외된 성과 문화에 대하여 가해지는 일련의 세뇌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전해지고, 미화되고, 칭송되어지고, 가르쳐지고, 실행되어 온 것이 축적되어 하나의 문화적 보편성을 갖게 되고 마침내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받아 드려지게 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남성신들의 여성신들에 대한 핍박과 수난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 여성학자들은 여신들의 생존과 그들의 부활을 다시 칭송하기 시작하고 있으며 가부장주의의 거짓이 결코 남성신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결코 여신들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여성신들의 부활은 현대 과학의 세계에서 괄목할만하다. “카오스 이론”이나 “가이아 이론”등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서양여성학자들은 한때 화려했던 여신들의 힘과 정신적 풍요를 그리워하며 그들의 부활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며, 그 옛날 원시 모계사회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을 갈구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태초에 하늘과 땅을 “하나님 아버지” 라는 남성유일신이 창조했다는 신화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서양 여신학은 이렇듯 신의 성적 혁명을 위하여 문명사의 새로운 지평선을 열고자하는 것이다. 오늘날 서양의 여성 종교학자들은 가부장중심의 역사속에서 억울한 죽음속에 묻혀지내온 여신의 부활을 기원하면서 이를 통하여 새로운 여성중심의 지배문화를 건설하고자 시도한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시도하는 최초의 모계사회와도 같은 여성원리가 소외되지 않은 모계영성이 지배하는 모성중심의 이상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서양 여신학은 성의 균열화가 일반적인 서양 문명권속에서는 필연적인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서양여성학자들이 그리는 여신의 부활과 모계사회의 복원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종교 이념의 분열이 대립화현상으로 더욱 더 양분화 되어가고 있는 후기현대사회에 대안적 여성론으로서 화합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신에 대한 성의 전환현상 자체가 오랫동안 지배문화로 자리잡아왔던 부권문화에 대한 도전이 되지만 서양사상속에서의 지배와 피지배의 논리와 남성과 여성의 성의 충돌현상은 다양한 모습으로 서양사회속에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어쩌면 서양의 정신적 원형이 이분적이고 분열적이듯이 서양문화 속에서는 여성중심의 모계영성의 기능은 필연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정신적 토양이 다른 아시아나 한국 문화권 속에서는 위와 같은 서양 여신학의 한계성과 이질성은 분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필자는 학계의 중심이 유럽과 북미권이라는 현실속에서 서양여성의 여신학이 영미권에 또 다른 “전통사상 orthodox”으로 혹은 “주류문화 mainstream culture"로 등장하고 있음을 전제로 이에 대한 한국적 수용과 대안적인 한국적 여성론의 근원을 찾아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실감한다. 무엇보다 한국적 여성론은 성의 균열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서양의 여신학의 기틀을 사용하기보다는 한국 정신사속에서 그 뿌리를 찾는 작업으로 시작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민족의 원형적 신화라 할 수 있는 단군신화에서 재현할 수 있는 여성학적 상징체계와 그 은유적 진리와 영성은 무엇인가? 동시에 여성학적 해석을 함에 있어서 단군신화가 지니는 한계성은 과연 어떤것인지 살펴보도록 한다.
3. 단군신화의 여성학적 해석
한민족의 국조인 단군에 관한 문헌으로는 檀君記가 전해져왔다고 하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고 다만 그 자료들의 부분들로 보여지는 고려중엽의 三國遺事와 帝王韻記, 조선초기 應製詩註와 世宗實錄地理志등이 전해오고 있다. 각 문헌의 기록은 조금씩 그 내용상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기록당시의 정치, 종교문화적 상황에 따라 그 시대적 배경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기록된 단군신화는 전체적으로 비슷한 줄거리를 전달하고 있지만, 웅녀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는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즉, 삼국유사의 熊女가 제왕운기에서는 孫女로 표기되어있는데 이는 그 당시 유학적 지배이념의 영향으로 신화의 내용을 일부 변형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논문에서는 단군신화를 여성학적으로 해석하는데 필요한 일부기록을 삼국유사에서 아래와 같이 인용하도록 한다.
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천하에 뜻을 두어 인세를 탐내어 얻고자했다. 아버지 환인은 아들 환웅의 뜻을 알아차렸다. 환인은 아들 환웅의 뜻을 알아차렸다. 환인은 삼위태백을 내려다보고는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다하고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보내어 그곳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아래에 내려왔다. 그곳을 일러 神市라고 했고 이것을 일러 환웅천왕이라 했다. 환웅은 풍백과 우사와 운사를 거느렸고, 곡식을 주관하고, 운명을 주관하고, 질병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고, 인세에 머물러 다스리며 교화해 갔다. 그 때 한 곰과 범이 같은 굴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그 곰과 범은 늘 神熊에게 사람이 되게 해 주기를 기원했다. 신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고 “너희들이 그것을 먹고 일광을 보지 않고 백일이 되면 사람형상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범과 곰은 그것을 받아먹고 삼칠일을 忌했더니 곰은 여인의 몸이 되었고 범은 금기를 해내지 못해 사람의 몸이 되지 못 했다. 웅녀는 혼인할 이가 없어 매번 단수아래에서 잉태하기를 주원하였다. 환웅은 인신으로 가화해서 웅녀와 혼인을 하니 웅녀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를 단군왕검 이라 불렀다.
삼국유사에 기록되어있는 단군신화의 환인은 일연이 인도신화에 나오는 인드라를 “제석환인”으로 삼았다는 이론을 이글에서 다시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볼 문제는 왜 단군신화에서는 서양의 신화에서나 인도의 신화에서처럼 남성신 (남성원리)의 파괴적인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단군신화의 경우에서도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 하지만 말둑이나 인드라처럼 바즈라와 같은 전쟁무기를 들고 여신을 살해하는 장면을 우리는 단군 신화에서는 읽을 수가 없다. 오히려 환웅은 여성신의 상징인 곰과 만나 화합하고 결실로 단군왕검을 탄생시킨다. 여기서 환웅이나 웅녀는 신화에 반영된 상징적 존재들이다. 즉 남성과 여성의 원리로서 합하여진다는 의미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단군 신화와 그 내용이 거의 흡사하다는 중국 산동성의 무씨사당 벽화의 내용 속에는 단군 신화에서는 나오지 않는 남신이 여신을 살해하려는 장면이 보인다. 그리고 규원사화에서도 환웅이 옥녀 玉女라는 여신을 살해하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당시 신화가 전승되어졌을 당시 가부장제 문화유산으로 유교 문화의 영향권 아래서 신화의 원형이 일부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단군 신화의 원형은 일연의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본다며 인도나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남성과 여성신의 사랑과 결합관계가 주된 사상적 측면을 이룬다. 김상일교수는 이를 유럽적 균열의 서양신화와 대조하여 “한국적 화합”(Korean Association)이라 칭하고 있는데, 이것은 여성학적 해석학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한국적 화합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 화합”(semi-association)이라고 전제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서양신화와 비교해 볼 때 단군신화에서는 여성원리와 몸, 그리고 성에 대한 이해가 훨씬 더 포괄적으로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각 시대에 따라 깊이 자리잡은 남성중심의 신화묘사와 이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천신환웅과 지모신 웅녀가 배우자를 만나는 과정이라든지 웅녀만이 동굴에서 인고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부분등은 태초 모계시대에 반영된 지모신의 원형적 개념에서 이미 많이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김승희교수는 단군신화에서 표현하고 있는 웅녀의 이미지는 “가부장제의 틀로 표구해오는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고 비판한다. 전통적으로 곰의 끈기, 인내, 순박성의 내향적인 특징들은 “한국여성의 미”로 확대 재생산되어 한국 사회의 문화적 규범 norm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웅녀의 이미지는 유교문화권에서는 삼종지도나 남존여비와 같은 절대적 가부장제도의 이념속에서 “여성다움의 미덕”들로 인공화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어령교수 역시 웅녀의 존재는 철저히 부권적 문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웅녀 이야기는 역사의 무대가 자연공간에서 문화와 신화공간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지배문화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것으로 부계문화속에 적절히 예속되어 생존 할 수 있는 수동적인 여성상을 이상화시킴으로 여성억압의 제도를 형성해온 사례라고 해석한다.
위와 같은 한국여성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웅녀의 재해석”이다. 즉, 웅녀의 수동적인 페르조나를 벗기고 문화의 금기로 여겨져왔던 “웅녀의 양성성”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화의 금기”란 여성의 야성적이고 공격적인 아니무스의 “호랑이성” 복원을 의미한다. 동굴안에서 존재한 두 동물의 상징은 분리된 두 존재의 상징이 아니고 미분화된 한 존재안에 내재된 ”양성성“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화에서 등장하는 동굴의 상징은 여성성을 의미한다. 역사학자 G. Rachel Levy에 따르면, 태고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동굴은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하는 것으로, 정신적 물질적 안식처의 역할을 한다고 이해한다. 자궁인 동굴은 "변형의 장소”(place of transformation)이다. 불완전성이 완전성으로 질적인 변이를 일으키는 성스럼움의 장소라는 것이다. 김열규교수 또한 동굴안에서 일어났던 웅녀의 여인화 과정을 “성인식”(puberty ceremony)으로 이해하며, 그 안에서 웅녀의 통전적 변이(wholistic transformation)가 일어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승희교수는 Jacques Lacan의 “원초적 유기체적 자신”(Original Organic Self)의 개념을 사용하여 “굴”자체가 상징하는 어두움과 미분화성을 여성성으로 동질화시키면서 그 안의 양성성은 바로 웅녀가 지니고 있는 전체성의 두요소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단군신화에서 묘사하고 있는 남편과 득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웅녀의 이미지는 한국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이상화시킨 모성애라는 것이다. 이러한 웅녀의 모습은 전통적인 어머니상으로 독립성과 자기애와 같은 사회주체적 존재로서의 적극성은 상실되어지고 모성애로서만 자신의 성적 아이덴티티를 지니는 수동적 존재임을 상징한다. 즉, 웅녀는 양성성을 상실한 자기소외의 불완전한 이미지만을 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웅녀에 대한 독해는 “여성학적 비판”으로서 합법성을 갖는다. “여성학적”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의 차별화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고 이는 곧 성의 분화과정과 동시에 “힘의 논리”와 직접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단군신화에 나타난 웅녀의 모습은 가부장적 제도의 문화화 과정에서 행하여졌던 주체분열의 모성과 자기상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승희교수의 위와같은 웅녀독해의 한계성이 있다면, 그것은 신화속에 나타난 웅녀를 “존재론적 해석”(ontological hermeneutics)으로 제한하는 범위에서만 그러한 비판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신화에서 나타나는 homo religiosus는, Mircea Eliade의 표현을 빌린다면, 신화의 본질적 의미(the essential)는 존재(existence)를 선행한다는 점이다(The essential precedes existence). 신화적 시간에서 발생하였던 일련의 어떤 사건들은 사건의 본질이 존재론(ontology)과 더 이상 연계되어져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만 오랜시간속에 역사적으로 발생하였던 사건에 대한 상징적 체계가 존재론적인 이해를 선행하다는 것이 신화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신화적 역사는 신화속에 등장하는 어떤 존재양식(mode of being) 그 자체를 변화시키면서 발전 할 뿐 아니라 인류의 존재양식까지도(mode of being of humankind) 다이나믹하게 변화시키면서 전수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주체의 modality도 변화되어지는 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의 진정한 존재(ontology)란 특정한 역사의 시대속에서 공동체적으로 투영되어 받아들여진 상징의 존재론(symbolic ontology)에서만 신화의 본질은 가장 잘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웅녀의 존재론적인 접근은 단군신화의 근원적인 정신적 원형을 충분히 반영한 독해는 아니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수동적 모습의 웅녀를 단군신화가 지니고 있는 부권적 그늘로서 여성학적 비판의 공간을 남겨두고자 한다.
그렇다면 웅녀의 이해는 은유적 해석학의 원리에 따라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가. 천신 환웅에 대한 여성학적 이해도 흥미로운 이해이다. 즉, 환인과 환웅의 존재가 고대 모계적 계승의 반영이라고 해석하는 입장이 있다. 김정학은 환웅의 남성신 이해는 후대 부계사회인들이 모계적 계승에 근거한 지모신 대한 이해를 변질 원래 여신인 환인을 승계한 환웅을 서자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신화가 최초의 사건을 반영한다는 전제와 또한 인류사회가 모계중심으로부터 진화 발전해 왔다는 이론을 기초로 한다면 환인과 환웅에 대한 여신적 해석도 가능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모계사회의 어머니들은 아마도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single mother”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모계사회에서는 여성이 일정한 남성 배우자가 없이도 자유롭게 남성과의 성적 관계를 통하여 생식하고 번식하여 왔다는 것이다. 환웅의 서자개념을 single mother의 개념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환인을 서황모와 같은 여신으로 상징해 본다면 환인이 single mother로서 어느때 남편을 소유했다고 하면 환웅은 종교적 차원에서는 영적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새아버지에게 서자의 신분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지 않을까.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의 경우도 하백녀라고하는 어머니가 외관남자와의 관계에서 아들을 낳는 이야기로 그리고 있으며 하백녀 역시도 오늘날의 single mother에 속하는 위치였다. 이러한 현상은 신화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으로 각 신화의 역사적 문화적 구조배경을 엿볼 수 있는 접근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글에서의 주안점은 최초의 환인이 여신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보다는 인류사회가 부계사회로 넘어 오게 되면서 일어나는 신들의 갈등에서 단군신화는 양극적 입장보다는 화합적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단군신화의 상징은 天父地母의 세계상에 근거한 상징체계라고 본다. 웅녀의 존재론적인 이해보다는 곰이 대표하는 여성성의 원리를 함축하는 의미에서 여성신을 대표하는 격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종교문화적 관점에서 본다면 곰은 곰숭배 사상에 근거한 토템이즘으로 혈거생활을 통한 지배족인 알타이와 원주민이자 피지배족인 곰숭배 종족이 하나됨으로서 어울린 곰숭배 문화를 반영한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정호완교수는 웅녀의 존재를 “고마” 혹은 “곰”이라고 하는 어원발생론적으로 해석하는데 웅녀를 “고마”라고 칭하였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즉 한글계통으로 개음절이 폐음절로 변천한 과정을 고려하였을 때 “곰”은 “고마”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김달수의 “고마씨계보”에 기초하여 “고마”가 역사적으로 민족의 지모신으로 숭배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곰의 언어적 상징을 조상신으로 본다면 수조신앙의 상징이며, 토템의 시각에서는 신의 상징이고, 땅과 물 그리고 지모신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곰을 제사하는 한국민속의 예를 들어 정호완교수는 고마신 혹은 곰신은 어머니이자 땅의 신, 물의 신 그리고 생산의 신으로서의 위상을 부여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위와 같은 주장들을 전제로 천신환웅의 하강사건과 함께 지모신의 상징인 웅녀의 결합은 서양의 신화가 남성신과 여성신의 성적 갈등구조로 시작되는것과 대조를 보인다. 이러한 신화적 사고양식은 각 민족의 세계관과 그 정신적 원형을 제시하며 특정한 문화권의 계통발생을 나타내어 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예수탄생의 설화적 기록에 따르면 마리아가 동정녀로서 신의 영에 의하여 일방적인 수태를 경험하는 종속적인 관계임에 반해 단군신화는 천부지모의 농경사회적 신화세계를 그리며 지모신에 대한 중요성이 뚜렸하게 나타난다.
예수설화에서 마리아의 위치는 단군신화에서의 웅녀의 위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여지는데 마리아의 경우는 독생자라는 존재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신에게 성적인 도구로서의 선택을 받는다. 마리아에게서 웅녀와 같이 지모신의 성격이 나타날 수 없었던 것은 유목사회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남성적 천신에 대한 숭배로 보여진다.
수렵채취나 유목생활이 기본 터전인 문화권에서는 신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남성적이며 땅은 하늘에 예속된 것으로 이해하고 여성성에 대한 이해와 함께 지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농경문화에서는 땅의 중요성과 함께 지모신의 역할과 그에 따른 여성의 주기성이 신성화되고 하늘과 땅은 항상 하나이며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유지되는 것이 기본 신앙인 것이다. 이렇듯 남권적 세계관과 한국의 천부지모의 종교적 세계관은 그 신화가 지니는 형성배경을 이해함으로서 그 구분이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단군신화는 하늘의 남성원리와 땅의 여성원리가, 좀더 상징적 존재론의 범위를 넒혀 풀이하면 남성신과 여성신이 창조하는 사랑의 결실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하늘과 땅, 영과 몸, 그리고 여성성과 남성성이 자유롭게 만나 결합하는 사랑이야기인 것이다. 다시말하면, 억압과 죽임의 대상이었던 성(sexuality)이 단군신화에서는 전인적인 영성의 기초가 되면 몸의 철학과 성애의 힘(erotic power)의 부활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환웅과 웅녀의 성애는 관계성(relationality)를 상징한다. 단군신화의 성애상징은 창조성과 사랑의 우주적인 힘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성애는 하나의 개체를 열어 다른개체와 연합하게 하는 관계성의 에너지인 것이다. Rita Brock은 “성애(eros)는 관계성속에서 지속적으로 흐르며 성장하는 생명과정으로서 유기체적 존재의 근본적인 힘”이라고 말한다. 즉, 성애의 힘은 하나의 개체가 지니는 “자아”의 한계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시에 새롭게 변형된 “자아”의 존재를 탄생시킨다. Haunani-Kay Trask 같은 여성학자들은 성애를 생명력의 근원적인 힘으로 보며 이는 성적이면서 영적이며 또한 정치적인 힘이고 사랑이라고 이해한다. Carter Heyward는 인간이 신(God)이라고 이름하는 존재의 실체는 성애(eros)이며 이는 곧 우주적 근원적인 힘으로서 상호관계성 속에서만 탄생되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신의 존재란 인간의 관계성 속에서 충만히 드러나는 것이다. 천신 환웅이 지모신 웅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친밀한 연합성으로서의 원초적 내적 연결성과 관계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인간의 성을 신성화 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서양신화에서처럼 여성성과 몸, 그리고 성이 철저히 부정되고 배제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최초의 사랑결실로 이어진 단군신화에서는 여성원리와 성이 신과 인간이 만나고 연결되는 생명의 상징으로서 그려지고 있다. 흑인 여성학자인 Audre Lorde는 힘으로서의 성애는 몸과 성으로부터의 소외를 가르쳐온 서양문명의 성적 이원론(sexual dualism)를 치유하는 영성이며, 성애는 전형적힘(transformative power)으로서 다른 생명체들과의 연계성을 유지시켜주는 생명의 그물망(web of life)이라고 표현하였다. 연합된 사랑(embodied love)은 바로 신이 거하는 곳이며 신과 인간의 선험적 경험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적 화합은 결국 하늘과 땅 남성성과여성성의 eros의 열매인 것이다.
한국 정신사 속에서는 근본적으로 인도나 서양유럽의 경우에서와 같은 극단적 성의 충돌현상이나 균열 현상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따라서 여성의 “악마화-미화-상품화” 과정은 겪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적 화합은 역(易)에서는 “음”과 “양” 혹은 “곤”과 “건”으로 나타나며 성의 관점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있다는 점은 동양문화가 서양문화보다 더 정교하다고 할 수 있다. 음양의 조화는 남성원리와 여성원리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몸과 영의 연합을 강조한다. 단군신화의 한국적 화합은 결국 남성신과 여성신의 사랑이야기로 결정화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서양신화에서 주된 패턴으로 남겨져 있는 여성신과 몸의 소외현상에 치유책을 제시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인도-유럽과는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음을 신화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여성해방 역시 다른 관점에서 전개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지금 북미주에 있는 동양계 여성학자들이 서양의 여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동양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현상들은 비판적으로 재고되어야 한다. 이것은 또 다른 문화제국주의 논리에 맹종하는 결과에 불과하다고 본다. 물론 특정한 시기에 제도적으로 한국여성들이 남성들에 의해 억압당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적 그리고 철학적으로 악마화된 것과 제도적으로 억압당한 것을 동질화시키기는 곤란하다고 본다. 필자는 바로 이점을 구별하여 한국적 여성론을 위한 사상적 틀을 새롭게 전개할 필요를 강조한다. 진정한 여성해방은 인간해방이며 힘의 분배가 공평화되는 과정속에서 남녀가 함께 전개되어져할 문제인 것이다.
IV. 한국 여성론으로서 단군신화 공헌
혼돈의 어둠속에 빛을 가져온 구원자로 그려진 남성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현대 서양 여신학은 여신숭배를 통하여 보다 전인적인 영성(holistic spirituality)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영원불변하고 이 땅을 초월하는 절대적 타자로서의 “하나님 아버지”를 넘어서는, 그래서 땅에 가깝고 자연과 분리될 수 없는 여성의 몸과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여신들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양 여신학의 대표적 공헌은 아마도 서양 사고양식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는 계급주의적 이분법(hierarchical dualism)에 대한 도전일 것이다. 전통적인 사고체계 즉, 하나님-남성-여성-동물-식물-등의 피라미드식의 구조 속에서는 “지배적 성과 문화”(dominant gender & culture)가 “소수의 성과 문화”(minority gender & culture)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전통적 사고 유형에 대한 여성학자들의 문제제기와 비판은 서양 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는 동기를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과연 서양 여성학자들은 그들이 희망하는 대로 이분법적이고 양극적인 사고형태에서 정말 해방되었는가 라고 반문해 볼 때에 좀 회의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 서양 여성학자들이 주장하는 대안적 주장이란 계속되는 성의 충돌, 그리고 그 틀 속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즉, 서양 여성학자들의 주장은 또 다른 유럽적 균열 현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신학은 신에 대한 성전환 수술을 해 놓고 전인적 영성을 얻은 것으로 포장되기 쉽다. 하늘 남성신이 땅의 여성신을 정복했듯이, 땅도 하늘을 정복할 수 있다는 또 다른 형태의 균열과 양극화 현상의 위험성은 없는지에 관한 비판적 숙고가 요구된다.
고질적인 “균열”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북미처럼 복잡한 사회에서는 그러한 균열이 또 다른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면 성차별 외에도 계급차별, 인종 및 문화 차별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억압적 구조에 저항하는 목소리들은 과거 백인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진 남성 지배적 문화를 거세게 비판하면서 여성운동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성 해방 운동에도 심각한 균열 현상이 생겼다. 즉, 백인여성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어온 백인여성중심의 서양 여성학의 한계는 lesbian들과의 자매적 관계를 맺으면서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대처해 왔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인종적 문제에 직면하여 새로운 양상을 맞게 되었다. 즉 소수 민족 특히 흑인 여성들은 백인 여성들과 역사적 문화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소수민족문화와 인종차별 주제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그 맥을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미 여성운동 내에서 균열이 생긴 것은 백인여성과 흑인여성의 갈등에서 비롯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여성 운동권내에서도 여전히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흑인여성들은 자신들을 “womanist”라 칭하며 기존의 백인여성중심의 “feminism”에서부터 분리하기 시작한다. 이런 움직임과 함께 북미에 사는 아시아여성들 또한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문화 차별에 대한 비판과 함께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주제를 중심으로 고유한 형태의 여성운동을 전개 해 나가고자 시도하고 있다. 즉 한국 신화에 나타난 원형에서부터 한국의 고유한 운동의 전개가 절실히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단군사상은 한국적 여성론을 재건하는데 그 철학적 기초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가지 어려운 현상은 현재 서양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시아 여성학자들에 의한 “혼합 여성론” 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급진적 서양 여신학의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아시아의 종교문화를 왜곡되게 소개함으로서 유교를 아시아의 가부장주의 원조로 소개하는 또 하나의 불균형적 시각의 문제점을 여기서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아시아적 여성학의 현주소는 자문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없이 서양식 여신학의 구조와 논리에 맞춰 급하게 아시아적 옷을 입혀 놓은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사례들이 있다. 유럽적 균열과 한국적 화합의 이해가 불균형하게 얽혀있는 상황이 영미권 아시아 여성학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국제 학술회의에서 쉽게 관찰될 수 있는 서양 여신학자들의 아시아종교에 대한 입장들이다. 유교전통의 경우 그것은 철저히 아시아, 특히 한국 남성들의 부권적 산물로 한국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정신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순히 치부해 버리는 사례가 흔하다. 아시아 여성들에게서 전달된 자문화에 대한 이와 같은 잘못된 인식은 서양사회에서 또 다른 형태의 문화 제국주의를 만들어내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서양식 여성 해방 운동이 북미와 같은 복합 문화 현장에서 각 문화에 대한 충분한 사전연구 없이 일률적으로 적용될 때에 인종적 그리고 문화적 차별현상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본다. 특히, 백인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아시아 남성들에 대한 선입견--“가부장주의를 옹호하는 불치병자”--는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성의 대립” 현상을 초래하게 할 위험이 있다. 즉, 아시아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성의 균열 현상을 서양의 상황보다 심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역시 백인여성들에게 깊이 내재되어있는 문화 우월성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백인여성학자들 중에는 아시아의 문화와 철학은 전적으로 남성들의 지적 작품들로서 아시아여성을 결코 해방시킬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여성 평등 사상은 서양 기독교 문화만이 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원리에 의하여 정치적 종교적 힘을 얻은 북미 아시아 여성들은 아시아 여성의 지위가 어느정도 확보되었다고 자위할 수 있겠으나 결과는 북미의 모든 조직체에서 아직도 절대적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백인 남성들에 의한 “하얀 혹은 점잖은 인종차별”(white or gentle racism)을 다시 강화 시켜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자문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대화가 선행되어지지 않는 아시아 여성학은 그 생명력이 짧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동시에 제 1세대들에게서 나타난 위와 같은 여성학의 부정적인 일면이 또 다시 아시아 여성들을 “동양적 여성성”(oriental feminity) 또는 “양성성을 상실한 웅녀”의 고전적 이미지로 대치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사실 북미의 한국여성을 포함한 소수민족여성들은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동문화권 내의 남성들로부터, 타문화권내의 남성들로부터, 그리고 타문화권의 같은 여성들로부터 받는 억압적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아시아 여성들은 흑인 여성들과 같이 백인여성들로부터 구별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아시아 여성의 삼중고를 해방시킬 수 있는 길이 바로 한국고유의 자생적인 사상에로 회귀함으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단군신화의 화합사상과 관계성을 상징하는 성애의 힘에 기초적 영성을 두고 있는 대종교나 동학혁명 그리고 증산 사상은 토착적인 여한국적 여성론을 제시하는데 중요한 유산이라고 본다. 특히 김일부의 정역도에는 역의 괘를 배열함에 있어서 중국에서 그린 태극도에서 남녀의 위치를 반대로 뒤집어 배열했다고 한다. 즉, 여성 상위적 위치로 배열함으로 후천 개벽이 열릴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런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한국 여성학자들이 서양에서 이론적 기틀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신화를 통하여 문화의 전일적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결국 역사속의 신화, 신화속의 역사는 가장 전체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한국의 종교문화 전통 속에는 문화의 양극화 현상이나 성의 충돌사례들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동양사상의 근본은 음양설 즉, 두 성의 조화로 알려져 있다. 하늘과 땅은 양과 음으로 상징화되고 이는 서로 연결되어져 있어 구별은 되지만 결코 분리는 될 수 없는 상보적 관계인 것이다. 아마도 동양의 문화권 속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도 이러한 상호 보완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의 단군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늘의 남성신 환웅이 땅의 지모신인 웅녀와 만나 한 몸을 이루어 단군을 낳는 이야기는 유럽이나 인도의 신화와 비교되어 새롭게 조명되어져야 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바로 “한국적 화합”의 원리가 시작되는 것을 관찰 할 수 있다. 이러한 화합의 원리를 기초로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고 조화되는 진정한 의미의 전인적 정신 세계가 한국인 사회속에 깊이 자리잡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