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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리스 철학) 운명, 우연, 필연인문학의 즐거움은 2010. 7. 2. 22:34
운명, 우연, 필연
*운명
희랍어 moira
고대로 내려갈수록 운명이라는 개념이 더 중요해 진다(인간 자신의 능력 보다,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운명의 힘을 더 크게 느낌). 전통 사회가 운명의 사회라면, 근대 이후의 사회는 자유의 사회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스토아 철학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문화 전체를 관류하는 주요 주제가 ‘운명’이다. (비극은 특히 그렇다.) 모이라는 여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모이라에서 이법, 법칙, 필연 같은 개념들이 파생되었다. (『종교에서 철학으로』, 콘포드) 모이라는 최고의 신이 아니면서 모이라가 대변하는, 혹은 관장하는 운명 자체는 신들 위에 있다. 운명이 신들 위에 있게 된 것은, 그것이 인격적인 신의 변덕스러운 감정이나 의지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는 어떤 것, 그런 것들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리스 사람들에게 운명이란 삶의 진실을 가장 근본적으로 포착해 주는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이라의 기본 뜻은 ‘정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드라마에 “정해진 바에 따라서”라는 표현이 바로 그 의미다. 이런 의미를 지닌 개념은 동북아 문화에서 命이다. 이 개념은 처음 정치적인 뉘앙스를 띠고서 등장. 天命. 주나라가 은나라를 무너뜨리면서 정당화를 위해 제시한 개념(하늘의 명령, 하늘이 정한 것). 運命은 조금 어두운 뉘앙스가 있다. 인간이 왜 그런지 이해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命이다. 명은 일차적으로 몫의 의미. 시간적 차원이 들어가면, 壽命.
모이라에는 미분화된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 미분화되어 있었기에 모이라가 필연 개념의 모태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이었다기 보다는 감성적이고 인간중심적인 개념이었다. 인간이 이 모이라를 어기면, 거기에 따른 응보를 받는다. 이것은 이 개념이 과학에서의 필연성처럼 완전히 탈인간화된 개념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 스며들어 있는 개념임을 의미한다.
모이라의 개념 이해를 돕기 위해 hypermoron(모이라를 넘어가는 것)이라는 말을 보자.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경이. 자기에게 정해져 있는 바를 넘어서기에. 2) 넘어서는 안 될 것을 넘음. 후자의 의미를 지닌 단어로 휘브리스와 아테가 있다. 휘브리스는 오만, 지나침의 뜻, 아테는 미망, 눈이 멈의 뜻. (그리스 드라마는 결국 휘브리스와 아테가 가져온 비극을 다루는 문학.)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度가 지나침, 무리함이 이 단어들에 해당. 도와 도는 서로 통한다. 度를 넘어서거나 道를 못 보면 문제가 생긴다. 무리하거나 미망에 사로잡히면 응보가 따른다. 이 점에서 응보란 도덕적 의미 이전에 존재론적 의미다. 도덕적으로 벌을 받는 다는 것이 아니라 무리나 미망이 ‘필연적으로’ 고통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필연
anankê(아낭케)- necessity. 처음에는 모이라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다가 후에 본격적인 철학적 의미를 획득. ‘신들의 냉혹한 법’, 우주의 섭리로서의 아낭케.
필연에는 두 가지 상반된 의미가 들어 있다. 1) 법칙성이라는 의미에서의 필연(데모크리토스가 사용한 의미의 아낭케). 오늘날의 자연과학적 법칙의 필연과 거의 같은 의미, 다시 말해, 아무런 목적, 이유 없이 그렇게 될 뿐임. 이런 점에서 이것은 의미상 우연(이 때의 우연은, 우연의 두 가지 의미 중, 우발성으로서의 우연)이다. (우주의 운동이 법칙을 따르기는 하지만, 혹은 법칙성을 보여 주기는 하지만, 그렇게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어떤 목적, 이유나 섭리에 따른 것은 아니라는 의미. 왜 그런 법칙성을 보이는가 하는 것은 우연적이라는 것. 예를 들어 왜 우주의 거시적 운동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따르는가에 대한 답변은, 그것은 우연이라는 것이다)
2) 형상 혹은 목적이 구현되기 위한 제반 조건들이라는 의미의 아낭케(형상이 구현되는 것을 방해하는, 그러나 구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질료적 조건. 이런 의미의 아낭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하는 개념이다.) 플라톤의 생각에 따르면, 질료에 구현되기 이전의 형상은 완벽한데, 질료가 형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우주에 일정한 오차나 무질서가 있다. 아낭케는 우주에 대한 목적론적 이해(혹은 형상철학적 이해)를 전제했을 때, 거기에 정확히 잘 맞지 않는 것,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형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어떤 장애물 같은 것이라는 뉘앙스를 띤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한 아낭케의 의미들.
-필요 조건. 어떤 것의 본질은 아니지만 부차적으로 필요한 것.
-어쩔 수 없는 제약.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밖에는 달리 될 수가 없다. 탈인간적인 우주의 법칙이라는 뉘앙스 보다는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뉘앙스.
-논리적 필연성.
-단순성. cf. 단순성과 영원성(플라톤의 이데아의 경우)
아낭케 개념과 유사면서도 다른 두 개념-헤이마르메네(파툼, 운명), 프로노이아.
스토아학파의 파툼은 주관적인 운명(151쪽)을 뜻하기 보다는 오늘날의 자연과학적 법칙성에 가깝다. 차이는 이 파툼을 신성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법칙인 동시에 섭리다. 자연과학과도 기독교와도 다르다(153쪽). 섭리는 세계를 거느리는, 주재하는 이치. 세계가 지금 이렇게 돌아가도록 하는 근원적 이치. 스토아 학파의 섭리개념에는, 주재자의 개념이 없고, 기독교는 있다.
근대 이후 필연은 과학적 결정론, 또는 논리적 필연의 맥락에서 개념화. 우주는 결정론적 체계로 되어 있고 그 체계는 과학적 법칙으로 포착.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어서 시간은 별 의미가 없다. 부채의 펼쳐짐의 비유. 근대 과학에서 물리적 필연성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중성적인 우주의 법칙으로 등장.
*운명과 필연
일반적으로 운명은 개인적으로 겪는 것의 뉘앙스가 있고 필연은 보편적인 법칙성으로서 뉘앙스가 있다.
어떤 사람이 벼락을 맞았다고 하자. 특정 세계관을 전제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이 사건이 자연과학(이 경우 기상학)적 법칙성을 보여주므로 벼락이 친 것은 자연과학적 필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하필 그 사람이 그 벼락에 맞은 것은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어떤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155쪽 참조). 그러나 결정론적 세계관을 전제할 때, 이 경우의 ‘우연’은 예측불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정론에서는 그 사람이 그 때 그 곳을 지나가는 것도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벼락에 그 사람이 맞은 것도 필연이다. 결정론적 세계관을 전제하지 않을 경우, 이 사건은 그 어떤 이유도 없이 ‘그냥 그렇게’ 일어난 사건이다. 이런 경우를 ‘우발적’(contingent) 사건이라고 한다.
[156쪽에서 157쪽 까지의 내용은 넘어가길 권합니다. 저로서는 이 부분의 내용에 대해 동의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그냥 그렇게 일어난 우발적인 경우에 ‘운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점. 전체의 얼개를 명료하게 파악하기 위해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은 결정론적 세계관을 거부할 경우에만, 차이를 낳는다(158쪽 이하).
*우연
tychê. 일종의 부차적인 운동인. 우연은 목적이든, 법칙 혹은 필연이든 이미 존재하는 어떤 질서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목적론자들이 데모크리토스 같은 기계론자를 비난한 것은, 모든 것을 다 우연으로 설명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목적론자들은 이 우주가 일정한 목적에 따라 움직이며, 다만 가끔 우연이 개입하여 목적의 진로에 복잡성이 생긴다고 보는 반면에, 그들이 볼 때 기계론자들은 이 우주에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다고 주장한다. (우주 진화를 둘러싼 설명의 차이)
tychê는 나중에 契機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우연과 우발의 차이. 우연은 인과론적 메커니즘을 찾아내지 못할 때 성립하는 개념, 우발성은 형이상학적 이유(달리 표현하면, 존재의 이유, 목적)을 찾아내지 못할 때 성립하는 개념. 그러나 우연을 아직 모르고 있는 필연으로 생각하지 않고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우연이 우리의 무지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의 한 성격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입장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165쪽 이하 참조)
우발성의 경우는 앞에서 언급되었지만, 여기서는 극단적인 경우를 보자. “왜 무가 아니고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물리적 메커니즘으로도 인간적 운명으로도, 어떤 우연으로도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이것이 우발성의 극단적 경우다. 우발성은 물리(학)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개념이다. 설명할 수 없음, 이유를 제시할 수 없음, 그것이 우발성이다. 이유들로 소화되는 것이 아닌 것, 그것이 우발성이다. 사르트르의 『구토』
*운명, 필연, 그리고 우연
지금까지의 내용을 참조하여 직접 읽어 볼 것.
출처 : 제주철학사랑방글쓴이 : 제니(김장선) 원글보기메모 :'인문학의 즐거움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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