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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권정생, 이오덕. 전우익좁은길 산책할때 2013. 6. 26. 23:03
권정생 선생하면, [몽실 언니]를 지은 작가로, 또 교과서에도 나오는 동화 [강아지똥]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어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이십년 전에는 그이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이를 내게 처음 소개해주신 분은 작고하신 이오덕 선생이다. 이오덕 선생은 주지하다시피 평생 동안 어린이문학의 정립과 글쓰기에 혼신을 다하신 분이다. 이오덕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팔십년 대 초 내가 웅진출판사 편집장을 지낼 때였으니 이십년이 훌쩍 넘어서고 있는 셈이다. 그때 나는 [어린이 마을]이라는 종합교육서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 들어갈 동화를 좀 추천해 달랬더니 서슴없이 바로 권선생의 그 [강아지똥]을 추천해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서 하는 말씀이, 그이는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종지기를 하며 지내는데, 거처가 되는 작은 방에는 생쥐가 와서 함께 밥을 얻어먹고 가는가 하면 여름에는 함께 자도 유독 그이에게만은 모기가 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약간 반신반의 하였지만 이오덕 선생이 누군가. 그런 농담이나 실없는 소리를 하고 다니실 분이 절대로 아니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면 그런 고지식한 어른이 아니던가.
아무튼 나는 약간 긴 [강아지똥]을 저학년 아이들이 읽기 쉽게 다소 줄이고 다듬은 다음, 그것을 작가 본인에게 허락받기 위해, 겸하여 인사도 드릴 양 하여, 권선생 더러 서울 나들이라도 한번 하셨으면 했는데, 이오덕 선생의 말씀인즉슨 본인의 몸이 불편하셔서 수십년째 일체 먼길 외출을 삼가시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줄인 원고를 들고 그이가 계신 안동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는 바야흐로 추수도 끝난지 한참 지난 어느 늦가을이었다.
나는 예의를 차린답시고 평소에 하지 않던 양복에 넥타이까지 한 정장 차림으로 버스를 타고 이오덕 선생이 막연하게 가르쳐주신 주소를 따라 권선생을 찾아 떠났다. 이오덕 선생이 가르쳐주신 주소로 말할 것 같으면, 안동에 가서 김서방을 찾아보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 말하자면 안동군 일직면에 가서 거기 교회에서 종지기를 하는 동화작가 권아무개를 찾아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대로 그런 것을 꼬치꼬치 묻고 점검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가보면 만나겠지, 하는 심정으로 그냥 나섰던 것이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사방팔방으로 뚫려 지방 어디를 가든 횅하니, 몇 시간이면 갈 수 있을터지만 그때만 해도 안동을 가려면 버스를 타고 지방 도로를 따라 왼종일을 달려야 했다.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국도에는 늦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고 있었다. 안동에 도착하여 다시 일직면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한참을 달려서 어딘가에서 내렸다.
그리고나니 약간 황당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어디 가서 물어볼 마땅한 데도 없었다. 그래서 우선 다짜고짜 아무 구멍가게나 들어가서 이 부근에 동화 쓰시는 권아무개 선생이라는 분 있어요? 하고 물었더니 가게 안에 앉아있던 촌로들 몇이 고개를 외로 틀고 서로 바라보며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교회에서 종을 치며 사신다고 들었는데.....”
나는 그이들의 눈빛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가만있자.... 저어기 사는 그 영감인지 몰라.”
그리고는 안노인 한분이 일어나 문 밖으로 나오며 길 끝 어딘가를 가르키셨다. 감나무가 심어진 길 따라 가면 마늘밭이 나오고 그 밭 옆으로 조금 더 가면 교회 십자가가 보일 것인즉 거기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맨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안노인의 가르침 대로 한참동안 걸어갔다. 과연 저 만치에 양철지붕 끝에 얌전히 고개를 내어 밀고 있는 십자가 하나가 보였다. 그곳으로 가보니 가꾸어진 교회라기 보다는 그저 허름한 농가처럼 생긴 작은 건물과 옛날식 종루가 서있는 비좁은 마당이 나타났다. 나는 마치 초짜 도둑질이라도 나선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작은 마당에 붙은 방의 툇마루에 늙수레한 남자어른이 혼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허름한 옷에 고무신을 신은 그이는 비쩍 말랐지만 한 눈에도 매우 기품 있고 평화로운 인상을 한 사람이었다. 나는 첫눈에 그가 바로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내가 찾아왔던 바로 그 권정생 선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이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졌다.
그이는 내가 서울 출판사에서 원고 허락 차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나는 신발을 벗고 그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이의 방은 사방에 온통 책꽂이 없이 아슬아슬하게 쌓아둔 책 때문에 그나마 비좁은 방이 겨우 두 사람이 앉아있는데도 무릎이 서로 닿을 정도였다. 윗목에는 일인용 밥통 하나와 그릇 몇 개, 고무줄로 밧데리를 뒤에서 묶어놓은 낡은 라디오 하나가 있었는데 얼른 보아도 살림은 그게 전부였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었더니 과연 이오덕 선생의 말씀대로 그이가 식사할 무렵이면 생쥐 한 마리가 쪼르르 달려 나와 함께 밥을 먹고 가곤 한다는 것이다. 어둑한 방에는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독특한 내음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나는 나의 양복 차림이 어쩐지 이 방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가방에서 가져온 원고를 꺼내 선생에게 보여드렸다. 그이는 돋보기를 쓰고 가만히 원고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됐다는 뜻이었다. 나는 속으로 출장(?) 온 보람을 느끼며 호주머니에서 원고료가 든 봉투를 꺼내어 그이에게 드렸다. 그때로서는 꽤 큰 원고료라 은근히 뽐 내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봉투를 열어본 그이가 대뜸 하시는 말이, 원고료가 왜 이렇게 많으냐는 것이었다.
“예?”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이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원고료가 적다고 불만을 표하는 필자는 수없이 많이 봐왔지만 원고료가 많다고 뭐라하는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권선생은 이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배추 한포기 값이 얼만데.....”
그러니까, 배추 한포기에 드는 농사꾼의 품에 비해 자신의 원고료는 터무니없이 높다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는 봉투를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책 위에 던져 놓으셨다. 나는 본의 아니게 죄 지은 꼴이 되어 앉아 있었다. 더구나 양복쟁이의 반지르한 나의 외모가 더욱 나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슴 안 쪽 어디메선가 어쩐지 통쾌한 웃음 같은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느끼한 양식 종류를 먹고 나서 깍두기 김치 한 조각을 와드득 씹어 먹는 느낌이었다.
생각하면 나 역시 그런 방에서 얼마의 세월을 흘러 보냈던가. 영점 칠평의 어두운 감옥. 아무 장식도, 물건도 없이 단지 책 몇 권만 놓인 그 가난한 방.... 나는 그이의 그 방에서 오래간만에 그런 평화를 느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나중의 일이지만, 어느 방송국에서 ‘느낌표’라는 것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그 속에 책 추천하는 코너가 있는데 여기에 한번 선정되면 수십만부의 책이 순식간에 나가는 것이 관례였다. 말하자면 출판사나 저자나 갑자기 돈방석에 앉는 것이었다. 물론 그 중에 삼분의 이 이상을 벽지 도서관 건립에 희사하게 되어 있지만 그러고 나서도 남는 것이 보통 억대는 넘었다. 그런데 여기서 권선생의 아무개책이 선정되었던 것이다.
방송사 피디는 자랑스럽게, 그리고 약간은 거만한 마음으로, 그 사실을 알리려고 그이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런데 권선생 일언지하 왈,
“하지 마세요.”였다.
당황한 것은 피디였다. 설명을 하고 사정을 하였지만 대답은 끝내 노였다. 자신의 책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거부였다. 이것은 출판계에 적지 않는 화제가 되었던 너무나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이다. 아마 그 피디 역시 내가 이십여년 전 그날 맞았던 그 당혹감을 맛보았을지 모른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말없이 앉아있다 시간이 어느 정도 되어 이제 나오려고 하자 그이가 먼저 일어나시더니 선반에서 부시럭거리며 무언가를 꺼내는 것이었다.
“먼 길 오셨는데 대접해 드릴 것도 없고.... 가면서 입맛이나 다시세요.”
무언가 하고 보니 대꼬챙이에 곱게 꿴 곶감 꾸러미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곶감인지라 언감생심 얼른 받아서 가방에다 넣었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그이는 고무신을 끌고 버스가 오는 한길까지 뒤따라 마중을 나와 주셨다. 벌써 오후도 기울어 날이 저물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기다려 한길 가에 무심히 서있었는데, 마침 저녁 노을이 길가 탱자나무 울타리 위로 붉게 무너지고 있었다. 권선생의 흰 머리 위에도 노을이 물들었다. 차갑지만 선선한 바람이 한길을 따라 불어왔다. 그이의 흰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나는 그 순간, 그이야말로 이 시대에 드물게 남아있는 은자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이가 준 곶감 맛은 입떼까지도 곶감을 먹을 때면 아련한 추억처럼 떠오른다.
나는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이랑,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를 쓰셨던 전우익 선생과 권정생 선생, 이 세분을 일컬어 영남삼현(嶺南三賢)이라 부르고 싶다. 각기 다른 삶을 사셨고, 성격도 다르지만 그분들이야말로 평생 변함없이 자신의 지조를 지키며 살아오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분들을 보면 마치 이 산하의 도처에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아름답게 늙어가는 고목과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고집불통인 이오덕 선생은 자신의 충주 돌집 한쪽에 권정생 선생을 위해 손수 흙집을 지어놓으셨다. 불편한 몸을 감안하셔서 정말 아늑하고 편하게 지어 놓으셨던 것이다. 두 분의 우정으로 말하자면 관포지교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권선생은 지금도 여전히 그 비좁은 교회 종지기 방에서 살고 계신다.
이십여 년 전에 콩팥과 방광 결핵 수술을 받고 단지 석 달만 살면 잘 살거라는 의사의 판정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자신과 가난한 이웃, 그리고 [몽실 언니]에 나오는 것처럼 불행했던 이 나라의 역사를 사랑하며 살아오고 계시는 것이다. 나는 그이의 가난과 낮은 마음이 지금까지 그이의 생명을 지켜주었던 소중한 자산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너무나 쉽게 가질 수 있지만 아무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자산이다. 다음은 권 선생께서 이십여 년 전 동화집 [강아지똥]의 서문에 쓰셨던 글이다.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 전쟁 마당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얻어먹기란 그렇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어찌나 배고프고 목말라 지쳐버린 끝에 참다못해 터뜨린 울음소리가 글이 되었으니 글다운 글이 못됩니다. 너무도 불쌍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님께 이 책을 바칩니다.’
소설가 김영현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단편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소설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남 가는 길], 장편 [풋사랑], 그리고 시집으로 [겨울 바다], [남해 엽서], 장편동화 [똘개의 모험]등을 간행했다. 1990년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을 받았다. 지금은 출판사 <실천문학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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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현 2005-03-05 ⓒ 2005 i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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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박골 이오덕 선생님
김영현
얼마 전에 충주에 다녀왔다. 이오덕 선생의 아드님 되시는 이정우씨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고인의 유고시집을 내가 다니고 있는 ‘실천문학’에서 좀 내어줄 수 없냐는 것이었다. 불감청이언정고소원 (不敢請而固所願)이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이오덕 선생의 유고시집이라니 귀가 번쩍 띄었다.
당장에 그러자고 하고 며칠 후, 아내를 운전수 삼아 충주로 내려갔던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이오덕 선생이 생전에 사셨던 집에 한번 가봤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던 차였다. 서울 나들이 때는 자주 뵈었지만 그곳 산 구석 어느 두메에 돌집을 지어놓고 사신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정작 댁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것이다.
돌아가시고 나서도 무슨 일로 바빠 문상을 가지 못했는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문상은 간 사람이나 안 간 사람이나 사정이 비슷했다. 말하자면 그이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으로 일체의 문상객을 받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고, 아버지의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아드님 정우 씨께서 과연 일체의 문상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든 문상객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아래 쪽 논에 텐트를 치고 지내다 왔다는 것이었다.
충주 들입에서 전화를 치고, 다시 무극인가에서 헤매다가 어찌어찌 오후 늦게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정우씨의 부인은 그 집으로 가는 길 도로변에서 보리밭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식당을 하고 있었는데, 벽에는 이런 시골 식당에 어울리지 않게 신영복 선생의 글이 커다란 액자에 담겨있었다. 이오덕 선생의 돌집은 거기에서 약 십분 더 차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나중에 도종환 시인에게 들으니 정우 씨가 서울에서 장사라고 한답시고 돌아다니다가 망할 즈음, 이오덕 선생이 자신의 퇴직금을 주시면서 전국에서 가장 싸고 쓸모없는 곳을 골라서 사라,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자고 해서 마련한 것이 바로 그곳 골짜기였다는데, 곧은박골이라는 골짜기 이름은 아무래도 그이 자신이 붙여놓은 듯한 냄새가 났다.
쓸모없는 땅도 현인이 살다 가면 기가 순한 땅이 되는 이치처럼 그곳 역시 비록 산비탈 발치였지만 도처에 이오덕 선생과 정우 씨의 알뜰한 손길이 묻어 있어 오래전부터 누가 살았던 것처럼 보이는 자리였다. 집 입구에는 이선생의 조촐한 시비가, 안쪽에는 권정생 선생의 문학비가 하나 서있고, 넓은 마당 뒷켠에는 염소와 닭을 키우는 우리가 있었다.
아직 잔설이 남아있는 기슭에 작은 흙집 하나가 독립적인 가옥으로 지어져 있었는데, 우리를 안내하던 정우 씨가 말하길, 이오덕 선생이 권정생 선생이 와서 사시라고 직접 지으셨다는 것이었다. 일곱 평이 채 될까 말까 한 공간에 흙으로 지은 화장실과 부엌이 옹기종기 알뜰하게 들어 있었다.
그리고나서 비로소 정우 씨가 우리를 선생의 빈소가 있는 작은 방으로 인도를 했다. 비좁은 계단으로 올라가는 반 이층 형태의 방이었다. 창문으로 보니 잎 새가 다 진 겨울 감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다. 이 방이 이 집에서 가장 따듯한 방임을 방에 들어가자 금방 느낄 수가 있었다.
아무런 가구도 장식도 없이 그저 영정과 선생의 안경, 만년필이 놓인 책상 하나와 오래된 묵화가 담긴 액자 두어 개가 전부인 이 방은 평소에 이오덕 선생이 쓰시던 방이었는데, 지금까지 정우 씨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와 똑같이 후끈후끈하게 불을 넣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겨울을 빼고 나면 그 산등성이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천막 살이 시묘를 한다고 하니, 그의 강직한 성품과 효심을 알 수 있다. 농사를 짓는 그는 손재주도 좋아 혼자 그림을 그리고 흙으로 여러 선생의 조상(彫像)을 빚기도 했다.
영정 앞에 묵념하고 책상 위에 놓인 그이의 굵은 뿔테 돋보기안경과 햇빛 환한 미소를 뵈오니 살아생전 모습이 어제처럼 떠올랐다. 오오, 덧없어라! 강 같은 세월이여....
내가 이오덕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팔십 년대 초 웅진출판사에서였다. 나는 채 서른도 되지 않는 젊은 초대 편집장이었는데, 그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몇몇 자문위원을 두었다. 성내운, 신경림, 이철수, 그리고 이오덕 선생이 바로 그들이었다. 아동문학에 문외한이었던 내게 이오덕 선생은 자문위원이자 큰 선생이셨던 셈이다.
그이가 내게 처음 소개해주었던 원고가 지금은 고전이 되어 버린 ‘이원수 문학전집’이다. 원고 보따리만 한 리어카는 되는 분량이었는데, 이원수 선생의 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출판사에는 절대로 원고지를 넘기지 않겠다는 이오덕 선생의 뜻에 따라 (이오덕 선생은 이원수 선생을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대간으로 알고 계셨기에) 지금까지 그대로 들고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원고를 들고 사장을 설득하여, 마침내 그 원고는 빛을 보게 되었다.
이오덕 선생은 우리 아동 문학이, 그리고 나아가 아이들이 병들어 있는 이유는 일제시대부터 내려오는 잘못된 교육 풍토와 더불어 이원수 선생이나 권정생 선생 같은 삶의 현실이 녹아 있는 우리의 좋은 작품들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대신 동심 천사주의나 소공녀, 소공자 따위 국적불명의 외국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사람들은 그것에 허황되게 넋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이가 아이들의 글을 모아 펴낸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는 진정한 글쓰기의 전범이 무엇인지 보여줘 장차 후배 교사들이 글쓰기 모임을 결성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고, 창비에서 펴낸 “시정신과 유희정신”은 지금까지 아동문학 평론서의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이는 우리 아동문학의 큰 흐름이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 큰 지도를 그려준 분이었다.
나는 언제나 철사 줄처럼 강해 보이는 반백의 머리를 넘기며 큰 입으로 웃으시던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참동안 영정을 바라보았다. 그때 정우 씨가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 느닷없이 시장에 가서 건반을 하나 사오라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을 떠올린다.
“난 그 전까지 아버지께서 건반을 치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건반을 사달라고 하시니 의아할 수밖에요. 사실 아버지는 음악에 대한 남다른 취미가 있긴 하셨지만...”
그리고는 나가라고 하였는데 잠시 뒤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놀랍게도 베토벤의 월광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젊은 교사시절 그이가 통영 부근에서 근무할 때 윤이상 선생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는 것이다. 윤선생이 동백림 사건으로 걸려들고 끝내 이곳에서 사면이 되지 못하자 스스로 음악을 포기해버렸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과 음악이 흐르는 땅... 이제 나 그곳에 가겠네.> 그이의 마지막 유고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렇게 유고시 뭉치를 챙겨 들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나는 발문을 나의 오랜 친구인 시인 도종환에게 부탁을 했다. 그 역시 평소 이오덕 선생을 따르던 사람 중의 하나인지라 일언지하 “그러마”고 했다. (도종환 시인 역시 깊은 산 속 황토집에서 산딸기 따먹으며 혼자 생활을 한 지 수년이 지나고 있으니 언젠가는 또 그이의 이야기를 해보리라.) 그리고 보내 준 글이 다음의 글이니, 그러니까 나의 글은 그의 글이 나오기 위한 군더더기요, 길잡이 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길지만 도종환 시인의 발문을 함께 읽어보자. 시인의 눈에 비친 한 인간의 생애를 더듬어보는 것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동심으로 쓰는 이야기 시
팔십 년대 말인가 교육운동을 한참 활발하게 할 무렵 이오덕 선생님을 모시고 강연회를 하는 자리에 간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이 세상에서 시인이 제일 나쁘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쁜 시인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시인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씀 하시는 게 마음에 좀 걸렸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바른 글쓰기의 관점에서 볼 때 바르게 글을 쓰지 않는 대표적인 사람이 시인들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바르게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글을 비틀고 쥐어짜고 어렵고 모호하게 만들어서 바른 생각을 쉽게 표현하여 삶을 가꾸는 데 이바지하는 일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 때는 아직 젊어서 그 말을 듣고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선생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으셨다. 글을 잘못 쓰고 있는 문인들의 글을 하나하나 골라내어 왜 어떻게 잘못 쓰고 있는지 근거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지적하는 글을 잡지에 기고하셨다. 거기 실명으로 뽑혀 올라오는 글을 보고는 선생님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글을 잘못 쓰고 있는 사례뿐만 아니라 말을 잘못해도 바로 그 이야기를 글로 써서 발표하시곤 했다. 권태응문학제에서 오고갔던 “감자꽃” 이야기나 “목계나루”에 시비를 세울 때 이야기 같은 것은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던지라 실명으로 거론되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들은 가능하면 이오덕 선생님 옆에는 가지 않는 게 좋다고 웃으며 말하곤 하였다. 이번 유고시집에 실려 있는 이 시를 읽으면서도 그 생각이 떠올랐다.
전형은 오늘 밤에도
자리를 친다
자리를 치면서
글 쓰는 사람을 욕한다
“연암이 쓴 글에
글자가 나와서 사람이 모두
병들었다는 말이 있는데
글을 쓰지 말아야 해
쓰지도 말고 읽지도 말고
책은 다 불살라 없애야 해
내가 권 선생한테
이 목사 제발 글 그만 쓰라 하라고
말했어.
......(중략)......
내가 전형보고
“그런 생각 제발 글로 써서
좀 알려 봐.“ 했더니
“난 자리 치는 게 좋아.
글 쓰는 사람 한 사람도
바르게 사는 사람 없더라.“
--「자리를 치는 전형」중에서
전형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전우익 선생이다. 전우익 선생님도 똑같다. 글 속에 나오는 권정생 선생님까지 세 분이 모두 같은 분들이다. 조그만 잘못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런 분들이야말로 우리에겐 정말로 소중한 분들이다. 소설가 김영현은 이 분들을 일컬어 영남삼현이라고 한다. 옛부터 집안에 판서 셋 나온 것이 대제학 하나 나온 것만 못하고 대제학 셋 나온 것도 선생 하나 나온 것만 못한데 선생 셋도 처사 하나만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 분들이야말로 옛날로 치면 처사에 해당하는 분들이 아닐까 싶다. 무위진인(無位眞人)이시다. 아무런 세속적 지위나 자리가 없는, 아니 그런 지위는 꿈도 꾸어 본 적이 없는 참된 분들이시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글 쓰는 사람들을 미워하실까. 글이 주는 해악이 이로움보다 많아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이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고 의롭고 청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어지럽고 혼탁하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세태가 안타깝기 때문일 것이다.
이지(1527-1602)는 그의 명저 『분서』에서 일찍이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공부하는 자들이 많은 독서로 의리를 깨우치다 자신의 동심을 가리게 되었다면, 성인들은 또 어째서 많은 책을 지으시고 말씀을 남기셔서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동심을 가리게 하였을까? 동심이 가려지고 나서 말을 하면 그 말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게 되고, 천거를 받아 정치를 하게 되면 정사에 기초가 없어지며, 저술한답시고 문장을 지으면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게 된다. 문장의 외적인 아름다움에 비해 내용이 칠칠하지 못하고 내포된 바가 독실해 빛이 발휘되는 것도 아니니, 한 구절 덕스러운 말이나마 구하려 해도 끝내 얻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동심이 가리어진 마당이라 외부로부터 들어온 견문과 도리가 마음자리를 다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언사가 비록 아름다워도 나에게 의미가 없는 것은 어찌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내뱉으며 거짓 일을 꾸미고 거짓 문장을 지어낸 때문이 아니겠는가?...이렇게 해서 거짓말을 거짓된 사람에게 말해주니 거짓된 사람이 기뻐하며, 거짓된 문장을 거짓된 사람과 토론하니 거짓된 사람이 기뻐하게 된다.
유명한 <동심설>에 나오는 말이다. 동심이라는 게 마음의 처음 모습인데 그런 진실한 마음을 잃게 되는 과정이 독서와 의리지학 때문이라고 이서는 지적한다. 의리지학이란 경전의 의미를 탐구하고 그 명칭과 이치를 따지는 학문인데 구체적으로는 송대 이후의 정주이학을 가리킨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학문과 그것을 토대로 한 견해들이 독서를 통해 들어와 사람의 내면을 주재하면서 동심은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박학다식해지는 것으로 여기고 그로 인해 이름을 얻으면 이름을 드날리려고 애쓰게 되고, 그렇게 미명(美名)에 매달리면서 동심, 즉 진실하고 인간다운 심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성인들은 많은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이 동심을 보호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했는데, 보통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하는 동안 동심을 버리는 일이 대부분이니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심을 버리고 쓰는 글은 내용이 진실하지 못하고 그 삶이 거짓되며, 거짓된 것을 만들어 내고 기뻐하며 거짓된 사람과 토론하고 거짓된 일의 결과를 널리 알리는 일에 힘쓰고 있는 것이 글 쓰는 일이라면 글 쓰는 일의 해악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오덕 선생님이나 전우익 선생님의 이야기도 이지의 이런 동심설과 맥락이 통하는 데가 있다. 바르게 살고 바르게 글 쓰지 못한다면 글 쓰는 것보다 돗자리 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잘못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꾸지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 아이가 아버지 병 낫게 한다고
산새 소리밖에 안 들리는 고든박골 막바지에
조그만 흙집을 짓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다가
손바닥 같은 논 몇 뙈기 떠 놓았다.
올해부터 깨끗한 밥,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겠다고
나는 날마다 그 골짜기에 한 번씩 가서
희한한 새 소리도 듣고
딸기도 따먹고 한다.
그런데 오늘은 포장된 찻길에서 그 골짜기로 들어가는 어귀
새로 길을 내려고 도랑을 파놓은 곳에
밤새 어느 저주받을 손들이
플라스틱이며 스치로폼, 온갖 병 들을 산더미처럼
버려 놓았다.
아, 이걸 어찌 하나?
간밤 꿈에
내가 그 어떤 소름끼치는 원수들에게
쫓겨다니면서
그토록 허우적거렸던 것이
바로 이 쓰레기였구나!
모든 산, 모든 골짜기를 죽이고
모든 목숨의 숨통을 꽉 조이는
이 무서운 쓰레기.
저 아름다운 새 소리도 아직도 피고 지는 산꽃들도
죄다 사라지고
천지가 어두운 적막강산 되어
드디어 지구를 폐기처분하게 될 날이
시시각각 다가온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도 고든박골로 걸어가는 산길에서
떨쳐버리지 못한다.
아, 이승이야말로 끔찍한
꿈이다. 소름끼치는
꿈이다.
---「쓰레기 강산」
이 시속에는 많은 분노가 들어 있다. 그 분노가 감추어지지 않고 직접 드러나 있다. ‘저주 받을 손’, ‘소름 끼치는 원수’이런 표현들이 그렇다. 시의 화자인 내가 처해 있는 공간이 어두운 적막강산이고 폐기처분할 날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지구이다. 이런 이승의 삶이야말로 ‘끔찍한 꿈’이요 ‘소름끼치는 꿈’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인 고든박골은 산새 소리밖에 안 들리는 청정한 곳이다.
그곳 막바지에 흙집을 짓고 건강을 되찾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 애쓰는 아들과 거기서 깨끗한 물, 깨끗한 밥을 먹을 수 있겠다는 해맑은 꿈을 품고 있는 곳이다. 거기까지 와서 쓰레기를 버려 놓고 가는 문명의 손, 오염된 손들의 잔해를 보면서 그것이 목숨의 숨통을 조여 오는 것들로 생각된다. 자연과 청정과 생명을 거스르는 문명과 오염과 죽음의 모습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로 인해 꿈속에서까지 쫓겨 다니며 허우적거렸던 것을 생각하면 깨어서 만나는 이승의 삶 자체가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삶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오덕 선생님이 미워한 것은 강산을 쓰레기로 덮어버리는 것만이 아니다. 인간의 잔혹함과 탐욕을 더 미워했다. 아니 그런 인간 그 자체를 미워했다.
하느님도 똑똑히 보셨지요? 그 어미토끼가 올가미에 걸려
발버둥칠 때 하느님은 얼마나 놀라고 괴로워했습니까?
하느님도 그 어미 토끼와 함께 몸부림치셨겠지요.
아기토끼들을 눈앞에 두고 그것들 생각하며 몸부림치다가
몸부림을 치다가 피를 토하며 죽어갔겠지요.
이제 이 몹쓸 사람들은
토끼고 사슴이고 너구리고 개구리고 뱀이고
곰이고 멧돼지고 소고 뭐고 다 잡아먹고
.............................
하느님, 당신까지 잡아먹고 나면
사람만 남겠지요.
그때는 뭘 먹을까요?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판이 벌어지겠지요.
벌써 그 판이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어요.
오, 하느님, 이것은 상상이 아닙니다.
---「눈 온 날 경치」 중에서
눈이 온 날 어미토끼가 마을에 내려와 먹을 것을 찾다가 사람들이 놓은 올가미에 걸려 죽자 새끼토끼 여섯 마리도 죽은 어미젖을 물고 그대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쓴 시다. 이야기를 듣고 쓴 이야기시라서 시가 매우 길다. 그리고 동화적 발상이 들어 있기도 하고 동화적 담론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 시를 통해 이오덕 선생님은 생명은 어떤 것이나 소중하다는 것과 그걸 망각하고 있는 인간의 잔혹함을 질타한다.
죄 없이 죽어가는 짐승에 대한 연민도 연민이지만 지금 이 땅에는 인간성이 죽어가면서 자연도 생명도 죽고 하느님 즉 신성도 죽고 있음을 일깨우고 싶어 한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은 무지와 탐욕과 속임수와 차별 그리고 서로 잡아먹는 적자생존의 논리만 남아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인간은 점점 비인간적인 괴물로 변해가고 그런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지옥 같은 세상을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리고
하느님,
올 겨울에도 저는
토끼 한 마리, 고양이 한 마리
못 살렸습니다.
---「염소 1」 중에서
이렇게 자책하는 것이다. 이렇게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이 시를 쓰는 마음이 아직도 동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에 나오는 표현을 빌려 말하면 ‘아침 해 같은 마음, 가을 하늘 같이 맑은 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팔순의 나이에도 지순함과 자비와 천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무런 뉘우침도 마음의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이서의 지적대로 우리가 동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오덕 선생님은 동심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다. 짐승만도 못하게 살고 있다고 꾸짖는다.
정말이고 또 정말이지 사람이
개나 돼지만큼이라도 된다면
그보다 더 나아간 역사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 개나 돼지만큼 된다면
어디 이런 꼴을 보이겠나?
전쟁도 없을 테고 통일도
벌써 오래 전에 다 됐을 테지.
사람이 개 돼지 짐승만큼만 된다면
---「고든박골 가는 길2」 중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모진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정말 짐승을 좋아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염소 1」이란 시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나는 짐승을 좋아한다 /...무엇이든지 / 짐승은 다 좋다. 사람보다 더 좋아 / 정말이지 짐승만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의 목숨은 모두 똑같이 소중하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겠지만 사람의 사는 모습이 너무 실망스럽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짐승은 사람처럼 잔혹하지도 않고 잘못된 일을 꾀하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을 함께 파멸로 이끌어 가는 일을 하며 살지도 않고 그렇게 탐욕스럽지도 않다. 생존의 제일 원리를 약육강식에 두지 않는다. 그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수십 년씩 밀림에서 짐승들의 행동을 연구해온 셜리 스트럼이나 이들의 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비투스 드뢰셔 같은 학자들에 의하면 짐승들의 생존의 첫 번째 원칙은 공격성이 아니라 평화로운 공존, 협력과 우정을 바탕으로 한 공생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상대방을 잡아먹을 수 있는 폭력질서에 편입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공동체에 평화롭게 편입하여 함께 잘 살아 갈 것인가 하는 평화전략이라고 한다.
사회 진화론적 삶의 방식에 익숙해 있는 우리의 시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어다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또한 책상머리에 앉아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고방식의 확산일 뿐이라고 동물행동학자들은 말한다. 아니 이런 설명도 필요 없이 사람이 짐승들처럼 순박하고 단순하며 죄짓지 않는 삶만 살아도 이런 말을 듣지는 않을 것이다.
저 딱한 짐승의 울음소리에는
이 지구에 붙어 살아가는 목숨들의
비틀리고 어긋난 아픔이 들어 있다.
사라져 가는 것들의 슬픔이 들어 있다.
---「염소 1」 중에서
인간에게 길들여져 살아가고 착취당하고 그러다 죽어가는 짐승의 울음소리에서‘비틀리고 어긋난 아픔’, ‘사라져 가는 것들의 슬픔’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오덕 선생님이 지향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그리고 좋아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감자를 깎으면 꼭 생각나는 그림이 있다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 <감자 깎는 어머니>
지금 내 앞에는
밀레가 그린 <저녁 종소리>가 벽에 걸려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쳐다보는 이 그림은
볼 때마다 내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샘물인데
두 부부가 서 있는 발 밑에는
방금 캐 담은 탐스런 감자알들이 바구니에 담겨 있구나
...........(중략)...........
그리고 우리들 감자 먹고 사는 사람들은 그 얼굴빛이
누런 빛이든 검은 빛이든 모두가
밀레와 고흐의 아들이요 딸이요 손자들 아이고 무엇인가
---「감자를 깎는다」 중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쳐다보는 그림, 볼 때마다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샘물 같은 그림은 모두 감자와 관련이 있는 그림이다. 그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얼굴이 감자처럼 순박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거짓 없고 정직한 모습이 얼굴에 배어 나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함께 모여 있다. 함께 일하고 난 뒤에 함께 기도하고 함께 먹는다. 따뜻한 생명의 공동체가 살아 있고 공동의 운명이 거기 깃들어 있다.
밀레의 <만종>을 보면 두 부부는 일을 하다가 들 끝에서 울려오는 저녁 종소리를 듣고 거기 일하던 감자 밭에 서서 조용히 두 손을 모아 기도한다. 앞치마를 두른 채, 흙 묻은 손을 다 씻지 못한 채로 그저 모자만 벗어들고 조용히 기도한다. 바구니를 다 채운 뒤에 기도하지 않았다. 감자 바구니가 조금 덜 찬 채로 그들은 오늘 거두어들일 수 있는 양식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중일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구하지 않고 감사할 줄 아는 소박하고 정직하고 겸손하고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그 그림에 들어 있다. 이런 모습을 이오덕 선생님도 그림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꿈꾸었을 것이다. 밀레가 바르비종으로 돌아와 이런 그림을 그리며 삶과 예술의 조화를 통해 가난으로 크게 고통 받던 당대 민중들의 편에 서고자 했던 것처럼 어쩌면 이오덕 선생님도 고든박골로 돌아와 그런 삶을 살고자 하셨는지 모른다.
지팡이 짚고 간신히 찾아온
나 같은 사람을
너만은 반갑게 맞아다오
나는 너를 따 먹고
이 땅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다시 어린이로 살고 싶단다
어린이가 되어
너처럼 고운 빛깔,
고운 마음을 가지고
살고 싶단다.
새콤달콤 그 맛을 온 몸에 지니고
이 땅에 살고 싶단다.
---「넝쿨딸기 3」 중에서
달콤 쓸콤 버찌 맛
손은 온통 딸기물이 버찌물이 들어
찐덕찐덕
새빨갛고 보랏빛이 되고
입술이 검붉게 되어버린 것도 모르고
어린애처럼 따 먹는다
아, 이래서 나도 온갖 벌레와 짐승을 키우는
가시덤불이 되고 벚나무가 되고
바위가 되고
햇빛과 바람과 개골물과
흰 구름이 어울려 있는 산
산이 되는구나, 산이!
---「딸기와 버찌」 중에서
나는 이렇게 딸기를 따먹고
날마다 산천의 모든 기를 먹고
나도 산이 되고 싶다.
나무가 되고 풀이 되고
새가 되고 매미가 되고
잎이 되고 열매가 되고
노을이 되고 무지개가 되고
흙이 되고 돌이 되고 싶다.
정말로 정말로
너희들과 같이 되고 싶다.
---「산딸기」 중에서
돌아가시기 몇 해 전 병이 깊어져 아드님 계시는 산골로 들어와 쓰신 시들 중에는 이런 시들이 많다. 어찌 보면 비슷해 보이는 이런 이야기들이 여러 편의 시에서 되풀이 된다. 지천으로 널려 있는 야생의 산딸기, 앵두, 이스라치, 살구, 감, 버찌열매, 대추를 따 먹는 이야기들이다. 그 열매를 따 먹는 사람들이 없다. 어린이들도 없고 그걸 즐겨 먹는 사람들도 없다. 혼자 매일 그런 열매들을 따서 드시고 있다. 이건 안타까움의 몸짓이다.
정말로 좋은 것들이 버려지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요 맛을 잃어버린 사람들, 좋은 맛, 자연의 맛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안타까운 몸짓이다. 이 야생의 열매들이 갖고 있는 빛깔은 자연의 빛깔이요 동심의 빛깔이다. 이것들을 좋아할 줄 아는 마음은 자연의 마음이요 천심의 마음이다.
이지의 표현대로 한다면 “동심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이는 진실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무릇 동심이란 거짓을 끊어버린 순진함으로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 갖게 되는 본심을 말한다. 동심을 잃게 되면 진심이 없어지게 되고, 진심이 없어지면 진실한 인간성도 잃어버리게 된다. 사람이라도 진실하지 않으면 최초의 본 마음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요, 동심은 마음의 처음 모습이다.”
「넝쿨딸기 3」에서 이오덕 선생님은 “나는 너를 따 먹고 / 이 땅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 다시 어린이로 살고 싶단다 / 어린이가 되어 / 너처럼 고운 빛깔, / 고운 마음을 가지고 / 살고 싶단다.”이렇게 말한다. 진심으로 이렇게 되길 바라셨을 것이다. 어린애처럼 딸기를 따 먹는 행위는 퇴행이 아니다. 거짓 없는 순진함으로,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가졌던 죄 없는 마음으로 돌아가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한다. 자연 그 자체가 되고 싶어 한다. 딸기를 먹는 것은 그냥 딸기를 먹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산천의 기를 내 안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행위이다. “날마다 산천의 모든 기를 먹고 / 나도 산이 되고 싶어 한다.” “나무가 되고 풀이 되고 / 새가 되고 매미가 되고”싶어 한다. 그것은 오염되지 않은 생명, 자연 그대로의 목숨이 되고 싶어 하는 갈망이다. 일본의 불교 사상가 마이다 슈이치의 말대로 “자연의 이치가 곧 삶의 이치이며 삶의 참 본성이요 진리 자체”임을 알고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닮고 자연을 따라 살고 싶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는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을 미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오덕 선생님의 사람과 세상에 대한 크나큰 미움과 꾸지람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오덕 선생님을 경원하였다. 존경하면서도 멀리 하였다. 때론 선생님의 이런 부분을 외곬으로, 노인의 지나친 고집스러움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떳떳하지 못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던지는 자기 변명인 경우가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분명 선생님은 고집스러우셨다. 오른손잡이들이 많은 세상에 왼손잡이였다. 왼손잡이라서 야구나 정구를 하면 놀림바탕이 되었지만 그러면 왼손으로 감자를 깎고 밭을 매었다. 그러면서 태연하였다. 보리밥 한 공기에 김치 된장 상추 세 가지 반찬만으로 즐겁게 드셨다. 반찬이 다하면 보리밥만 떠서 천천히 씹으며 맛이 천하일품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사람은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고
사람마다 버릇도 다르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저마다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일이다.
--「보리밥먹기」 중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편벽이 아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삶이다. 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듯 나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들에 대한 선생님의 본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가 한 편 이 시집 안에는 들어 있다. 「날씨」라는 시다. 이 시는 비가 올 듯 올 듯하다가 만지 여러 날 째 된 하늘을 보며 쓴 시다. 그런데 잘 보면 날씨를 통해 변화되어 가는 심리 상태가 아주 재미있다.
1) 처음에 나는 사람과 자연을 불신 한다
2) 하늘도 우리를 불신하고 버렸다고 생각한다.
3) 그러다 하늘은 그래도 사람들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4) 나는 자연의 행위에 대한 해석을 가지고 갈등을 반복한다.
5) 자연이 나를 속였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6) 하늘이 사람을 버리지 않은 것을 속으로는 좋아한다.
이 시가 보여주는 마음의 변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이오덕 선생님의 사람에 대한 불신과 미움도 사실은 하늘이 사람을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의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의 하나가 아니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우리도 선생님이 엄하고 무서운 모습으로 있지만 말고 구멍 나고 헤어진 곳을 메꾸어 주는 “두껍고 푹신한 마음(「내 몸 같은 바지」) 따듯하고 인자한 어른으로 곁에 주시길 간절히 바랐는지 모른다.
시인을 그렇게 미워하시던 선생님이 시를 이렇게 많이 남기셨을 줄은 몰랐다. 선생님의 글쓰기에 대한 평소의 생각 그대로 “불쌍한 토끼들, 참새들, 땅속에 들어가 있는 / 개구리들도 잘 알 수 있는 쉬운 말”로 쓴 시, 선생님의 삶처럼 단순성의 미학을 드러내는 시, 날마다 그날 보고 듣고 겪은 말을 그대로 적은 이야기시, 이런 선생님의 유고시들을 대하며 만 가지 감회에 젖는다. “보고 듣고 겪은 사실은 없고 머릿속 생각만을 찾아내어 뒤적이고 늘구고 바꾸고 흉내 내고 짜 맞추고 근사하게 꾸며서” 시를 쓰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로서는 선생님의 시를 앞에 놓고 민망할 따름이다. 내일도 근사하게 꾸미고 짜 맞춘 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선생님은 가고 안 계시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생님 같은 분이 꼭 옆에 계셔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더 많이 들게 될 것이다. 선생님 같은 목소리로 꾸짖는 분이 계셔야 글도 삶도 바른 자리를 찾아가게 될 터인데 그런 분이 안 계시다는 탄식의 소리를 하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선생님은 어린이를 살리겠다고 몸부림치며 괴로워한 40년 학교생활을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하셨다.
죽어가는 우리말과 우리 겨레를 살리려고 힘을 다 바친 15년의 삶도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던가 하고 자책하셨다.(「내가 할 일」)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의 그 삶이 어리석은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 말씀 역시 이 땅에 똑똑하고 바르게 산다는 사람과 슬기롭고 착하다는 사람들이 먼저 뉘우치기를 바라는 마음의 역설적 표현임을 안다.
아, 우리 땅
아름다운 이 강산에
아직도 가을이면 빠알간 대추알들이
그 옛날과 다름없이 오롱조롱 주절주절 열어
이렇게 이승과 저승을 이어 주는구나
..........(중략)...............
내가 멀지 않아 이승을 떠나더라도
반드시 저 하늘 날아다니는 벌이나 새가 되어
이 빠알간 열매를 맺는 나무를 찾아올 것이다.
풀열매 나무열매 따 먹고 살아가는
순박한 우리 형제들 살아가는
그 산마을에!
--「대추를 털면서」 중에서
꼭 그러실 거라고 믿는다. 벌이나 새가 되어 대추나무 감나무 산딸기를 찾아 올 것이라고 믿는다. 감나무 위를 날아다니는 새를 보며 홍시를 그렇게 맛있게 잘 먹던 임길택 선생이 새가 되어 날아온 것이라고 생각하셨듯이, 우리도 고든박골을 찾아오는 뻐꾸기나 꾀꼬리를 보면 선생님을 생각할 것이다. 대추나무 감나무 위에 와 ‘찌찌 찌찌’ 하고 우는 새를 보면 “오늘 아침 내가 먹었던 / 그 반쪽 홍시, / 유난히 빠알갛던 그 홍시 / 그 반쪽은 당신이 먼저 먹었던 것 아닌가요.”하고 물어볼 것이다.
1955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창작과 비평사 [14인 신작 소설집]에 단편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폭설], 시소설 [짜라투스트라의 사랑], 시집 [겨울바다], [남해 엽서] 등이 있으며, 1990년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김영현 2005-03-31 ⓒ 2005 i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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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면서 지키는 나무와 같은 사람, 故 전우익 선생
정경일
[필자의 말] 전우익 선생께서 지난해 12월 19일 돌아가셨다. 몇 해 전 인터뷰를 위해 찾아 뵈었을 때, 인간다운 삶의 길을 추상같이 말씀하시면서도 말없는 자연에 더 가까이 다가가 계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제 정말 자연으로 더 깊이 들어가신 걸까. 소식 듣고 인터뷰 때 찍어 둔 사진을 다시 보는데, 단추 뜯어진 옷을 입고 계시던 선생도, 책과 살림살이가 마구 널브러져 있던 낡은 집까지도 이미 모두 자연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떠나셨다는 소식에 슬프긴 하지만 마냥 안타깝고 속상하진 않았다. "깊은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자연의 친구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이 인터뷰는 2002년 여름 구천리 고택을 방문하여 나눈 대화를 기록한 글이다.)
언눔 전우익 선생은 해방 후 사회운동을 하다 고초를 겪었고, 낙향한 후 세상을 떠날 때 까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가 틈틈이 가까운 이들에게 보냈던 질박한 편지글은『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사람이 뭔데』등의 제목으로 출간되어 자연과 벗한 삶의 바른 길을 깨우쳐 주고 있다.
전우익 선생이 살고 있는 경북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 처음 가는 길이어서 상운에서 함께 내린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으니 같은 방향이라며 함께 가자고 한다. 아주머니는 내 행색을 살피더니 “총각은 구천리에 왜 가능교?”라며 묻는다. 선생님 한 분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 “선생님예? 이런 데도 선생님이 있능교?”라며 반문한다. 그녀는 서울이나 큰 도시에 있어야 할 ‘선생님’을 이 시골까지 찾아오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아주머니께 길을 배웠다. 그녀를 포함해 여러 스승에게서 길을 배운 끝에 “나무 많은 집” 사랑채 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전우익 선생을 만났다.
자연과 역사의 상처
역사로부터 물러서는 이들이 ‘생명’과 ‘녹색’을 이야기하는 것이 꽤나 수선스레 여겨질 때가 있다. 자연의 기억을 되찾으려면 꼭 역사를 부정해야 하는 걸까.
“역사의식이 없어졌지. ... 하지만 자연에 대한 관심도 역사의식으로 볼 수 있어. 예를 들면, 우리는 3.1 운동에 관심 갖지만 전부 인간에 대한 관심이지 그때 사람들이 자연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관심이 없거든... 진정한 역사의식은 인간에 대한 관심만이어서는 안 돼.”
지난 날엔 국토와 국민을 함께 생각했는데 이젠 국토는 안중에 없고 국민만 보는 역사가 된 것 같아요. 그래서 국토를 함부로 다루고 있는 것 같아요.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중에서
선생은 역사 속에서 자연과 인간이 받은 상처를 함께 아파한다.
“(앞산을 가리키며) 옛날에는 소나무들이 있었는데 6.25 전에 빨치산이 숨는다고 다 베어 버렸어. 그때는 치안벌채라고 해서 집에 있는 나무들까지 모두 없애 버렸지. 월남에서도 그랬고... 전쟁이 사람만 죽이는 게 아니야.”
40년 넘게 농사를 짓는 선생이지만 해방 후에는 반(反) 제국주의 통일운동에 참여하다 투옥되었다.
“그땐 통일하자고, 미국놈 나가라고, 토지개혁 하자고 싸웠지. 약소민족의 쓰라림을 느낀 우리는 배우지 않아도 반제운동을 했어.”
선생은 6.25때 형무소에서 나와 1년 간 숨어 지내다가 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풀려난 다음부터 고향에 와서 농사를 시작했다.
“농사짓기로 한 건 잘 한 것 같아. 미국놈 몰아내자고 벽보도 많이 붙였지만 그것만이 중요한 건 아니었어. 나무 한 그루 심는 것도 중요한 거였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선생이 나무만 심는 것은 아니다. 그의 현실 비판은 여전히 매섭다.
“미국인들은 자기들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부시... 완전히 미친 사람이야... 그래도 월남전 땐 미군 중에 전쟁을 반대하고 도망간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번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는 하나도 도망가지 않더라구.”
지난 해 성탄절을 앞두고 전투기에 장착한 폭탄에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낙서하며 웃는 미군들을 보고 ‘배반자’ 없는 전쟁에 소름끼쳤던 기억이 난다.
선생은 시끄러운 국내 정치현실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한 마디 한다.
“평민에게도 자식에 대한 책임이 있는데 대통령이 자식 간수 제대로 못한 것은 문제야. 한두 명이라도 진짜 정치인이 있으면 다행일 거야. 제대로 된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할 텐데...”
자연과 인간의 역사가 무관하지 않은 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자들이 인간도 파괴하고, 인간을 학대하는 자들이 자연도 학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이 뭔데
인권에만 매달린 사람은 가짜요, 목권(木權), 옥권(屋權), 산권(山權), 강권(江權), 천지만물에 두루 성스러움과 존엄성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받들고 대접하는 게 참사람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이 뭔데』중에서
선생에게 나무는 세상을 사는 바른 이치와 사람의 길을 가르쳐 주지만, 같은 나무와 자연을 보면서도 악한 짓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배울 사람은 배우고 죄 지을 사람은 죄 짓는다.
“이쪽에서는 좋아도 다른 쪽에서는 형편없을 수 있는 게 인간이지. 김근태를 고문하던 형사가 자기 집에 전화하더니 대뜸 ‘개 밥 줬나?’ 묻더래. 한 쪽에선 고문하면서 한 쪽에선 자기 개 밥 먹는 것 걱정하는 게 인간이야.”
“기본적으로 인간이란 좋은 일 하기보단 나쁜 짓 즐겨하도록 만들어진 것 같다.”는 선생은 인간을 비관하는 걸까.
“그게 사실이니까. 사실을 사실대로 봐야 해. 천사도 될 수 있지만 악마도 될 수 있는 게 인간이지. 아침저녁으로 몇 번씩 둔갑하지. 인간이 숭고하고 존엄하다 말하기 전에 자기 죄를 깨우치면 다행이야. 인간이 죄를 너무 많이 지었어....”
선생에겐 요즘 사람들이 먹고사는 것도 다 죄다.
“인간에게는 원죄가 기본적으로 있어. 먹고사는 게 다 죄지. 새나 짐승은 저 필요한 만큼만 먹지 저축하고 좋은 옷 입고 그러지 않잖아.”
선생은 가축도 기르지 않는다.
“나도 짐승인데 짐승은 싫어.(웃음) 나 해 먹는 것도 귀찮은데 돌보고 밥 줘야 되고... 지금은 키우는 것 자체가 죄지. 닭은 잠 못 자게 하며 기르고, 소는 평생 흙 한번 못 밟게 하고 길러. 그러니 광우병에 걸리지. 안 미치면 돌멩이일 거야. 개도 그래. 소리 짓는다고 목청 못쓰게 하고 또 보신한다고 그걸 사 먹어. 그러니 인간이 잔인해질 수밖에 없는 거야. 교회 가서 아무리 회개해 봤자 소용없어. 인간이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나쁜 짓을 하는지 알아야지. 인간을 고발해야 해. 너무 먹어 살찌고 또 살 뺀다고 약 먹다 죽고... 어이가 없어.”
이쪽엔 돌쩌귀에 불이 나는 불고기 집 즐비하게 늘어섰고, 저쪽엔 밤새 불 켜진 어마어마한 병원이 생겼습니다. -『사람이 뭔데』중에서
변하면서 그대로 있는 나무
사랑채 앞뜰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가 어울려 산다. 그 중 특별히 좋아하는 나무가 있냐고 묻자 선생은 미소지으며 대답한다.
“손가락 물어 아프지 않은 것 없듯이 이 나무는 이래서 좋고 저 나무는 저래서 좋아. 다양해... 꽃도 다르고 모양과 빛깔도 달라.”
나무를 말할 때 선생의 얼굴에는 인간을 말할 때의 그늘이 없다. 말라죽은 듯한 난(蘭)을 집 밖에 놔뒀더니 비 맞고 햇빛 받아 다시 싹 틔우더라고 하자 “그러면 반갑지.” 라며 환히 웃는다. 자연을 말할 때 행복한 웃음을 참지 못하는 그.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이다.
“음료수는 맛있지만 금방 갈증나고 또 너무 많이 마시면 질리잖아. 하지만 물은 맛도 없는데 평생 먹을 수 있어. 나무도 평생 봐도 싫증나지 않고 늘 편해. 사람도 그렇지. 처음엔 좋다가도 볼수록 싫증나는 사람이 있고, 처음에는 ‘뭐 이래?’ 하다가도 볼수록 좋은 사람이 있어. 세상에 부담도 안 주고 편하게 하니까. ... 나무도 아무리 봐도 보기 싫은 것 없잖아. 그래서 좋은 거야.”
“한달 전 쯤엔가 대구서 꼬마 애들이 왔는데, 아파트에 있으면 자꾸 안아달라고 하던 애가 아무 소리 않고 몇 시간 동안 저 나무 아래서 잘 놀더라고. 나무는 그만치 편한 거야.”
옛날엔 흙장난만 하면서도 종일 지겨워하지 않았는데, 요즘 아이들은 장난감도 많고 놀 것도 많은 데 금방 싫증내고 짜증낸다.
“그건 노는 게 아니니까. 지 스스로 하며 노는 게 진짜 노는 거지 시설이나 도구로 노는 건 노는 게 아니야. 또 시골 애들은 아침에 나가면 하루 종일 자연 속에서 교육받는 거야.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지. 요즘 아이들은 전부 인공 속에 있어. 자연의 품, 진짜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가야 해.”
어른이라고 다를까. 하루 내내 흙을 안 밟고 사는 날이 대부분인 우리는 자연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온 걸까.
“그러니까 자꾸 약해지는 거야. 정신은 자연 속에서 나오는데, 자연과 차단되니 약해지지 않을 수 없지.”
선생은 자연과 만나는 것이 어려울 게 뭐냐고 반문한다.
“책 읽고 글 쓰면 피곤한 이유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기 때문인 것 같아. 인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지. 하지만 나무를 만지는 건 인간과 자연의 만남이야. 아침에 이 문 열면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 약동해. 이건 돈 안 들여도 되는 건데... 양재동 가서 천 원 주고 (묘목을) 사온 거거든.”
선생에게 나무는 가만히 멈춰 선 정물(靜物)이 아니다.
“나무는 참 많은 변화를 하거든. 무수한 변화를 한다고. 변하면서 지키는 거야. 나무들은 매일 변하면서도 그대로 있어.”
선생과 나는 가끔 나무를 보며 이야기했다. 우리의 마음이 가 닿을 때마다 나무는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내 인생을 자르면 그 단면이 엉망진창일 게 틀림없는데 이 느티나무 토막의 무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형들의 삶은 이처럼 아름답기를...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중에서
깨끗하고 가난한 삶
선생의 집 여기저기에는 살림살이와 농기구, 목공 도구, 책들이 저마다 편한 모양으로 놓여 있고, 사랑채, 안채 마당에는 ‘잡초’들이 무성하다. 그 속에서 선생은 단추 떨어지고 소매 터진 흰 셔츠에 때묻은 바지를 입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살림이나 옷차림 모두 수수한 선생은 가난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옛날엔 춥고 배고픈 경험을 함께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몰라. 가난이 나쁜 게 아니야. 가난을 겪어야 쌀 소중한 것도 아는데 지금은 소중한 게 없지. 옛날에는 밥 내버리는 게 없었어. 쉬면 씻어 먹고, 더 쉬면 빨아먹고, 영 못 먹게 되면 풀 쒀 사용했지. 물자가 풍부해지니까 이웃도 없고 인간이 황폐해진 거야. 풍족하다는 게 좋은 게 아니야. 계속 비 오면 곡식도 안 되고 늘 물 고인 논에는 나락도 맛이 없어. 가뭄도 거쳐야 병도 덜 들고 맛도 있지. 없이 사는 것도 배워야 해.”
지금은 너무 많이 있어서 문제다.
“쓸데없는 게 너무 많아. 정말 필요한 것은 신석기 때 다 나온 것 같아. 그 다음에 나온 것은 필요 없는 것들이지.”
가난한 선생은 자신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고 부끄러워한다.
“혼자 사는 데 이렇게 많이 필요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내 바지가 열 개는 될 거야. 이건 사는 게 아니야....”
“남쪽에서 음식 쓰레기 나오는 양만으로도 남과 북이 다 먹고 살 수 있다고 그러데. 옷도 많고 식량도 남아도는데 뭔 걱정이 있어. 집도 전국적으로 보면 남아도는데 죄다 서울에서만 살려니까 모자라는 거지.”
선생의 가난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하지만 도시에서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그렇겠지. 80년대에 ‘구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삶에서도 구조 자체가 죄 짓게 만드는 거지. 하지만 하기 나름이야. 인간은 주인도 될 수 있고 노예도 될 수 있어. 남 따라가지 말고 주체적으로 살면 돼.”
내게 선생의 말은 익숙하지만 그 삶이 낯선 것은, 선생은 자신의 말대로 살고 있고 나는 늘 타협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메마른 곳에서 자란 나물수록 나이테가 쫌쫌하고 단단하고 아름답습니다. 향기도 아주 진합니다.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중에서
억세고 착한 사람
“세상이 좀 바뀔 것 같아요?”라는 질문에 선생은 “이미 바뀌었잖아. 나쁜 방향으로...”라며 쓴웃음 짓고는, “잘 모르겠어. 시민운동이 어떻게 될는지... 민중도 그렇고...”라며 허탈해 한다. 선생은 민중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 주려고 할 때 죽이라고 소리친 사람들이 민중이야. 민중이 폭군보다 더 포악할 수 있는 거지. 정치가 썩었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 뽑은 사람들이 민중이잖아.”
민중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 편을 들어 왔어요. 알게 모르게 달콤한 인공 감미료를 동경하고 선망해 왔습니다. 서울을, 나라를 이렇게 만든 근본적인 책임은 민중이 져야 합니다. -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중에서
민중에 대한 기대를 버린 듯한 선생의 말과 글이 쓰다. 그러나 선생은 포기한 게 아니다. ‘세상이 바뀌자면 그 알맹이인 인간이 바뀌어야 한다.’는 그는 인간의 근본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희망의 ‘희’는 ‘적을 희(希)’잖아. 좋은 일 하려는 사람은 몇 안 돼. 그 몇 사람이 속으로 바라는 것이 희망이야. 안 될 것을 해 보려는 게 희망이야. 그건 꼭 성공해야 되는 것도 아니야. 하는 일이 옳으냐 그르냐가 중요한 거지....”
그것이 옳은 일이라면 ‘해봤자 소용없는 일’은 없다. 선생은 소수라 할지라도 올곧게 사는 주체적 개인들을 희망한다.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이 옳은 개인이야. 협조할 건 협조하되 휩쓸리지 않는 사람, 온 세상이 다 좋다 해도 나쁜 건 나쁘다 말할 수 있고 온 세상이 다 욕해도 좋은 것은 좋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지. 세상 따라가는 건 개인주의가 아니야. 전부 따라가면 희망이 없어.”
선생이 말하는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관계 없다. ‘독주를 잘 해야 협주를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자립적 개인의 연대 없이는 공동체도 희망이 없다.
“자꾸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사는 것 보면 쉽지 않아. 내외 둘이 살아도 싸우는데 어떻게 공동체가 되겠어. 나도 공동체 운동이 잘 되기를 바라지만 인간은 그렇게 도덕적이지 않아. 인간의 문제가 중요한 거지.”
대신 그는 아주 작은 부분을 공동으로 하는 것에서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저 가로등 보이지? 여기 세 집이 사는데 밤에 가로등을 켜지 말자고 했더니 그거는 돼. 공동체도 그런 작은 것에서 시작해야 해.”
아주 작고 작은 일에 서로 부담감 주지 않고, 소리 없이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올 봄의 소원으로 삼고 싶습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중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겠다는 것도 왜곡된 욕망이다. 선생은 자연에서 사랑과 미움을 함께 배운다.
“계절에도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듯이 마냥 따뜻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안 돼. 비도 있고 뜨거울 때도 있고 가뭄도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도 사물에 대한 대처 방안을 바르게 해야 해. 난 ‘사랑, 사랑’ 말 많이 하는 것 좋아하지 않아. 어떻게 다 사랑해? 사랑하려면 미워할 줄도 알아야지. 사랑만 가르치는 것은 암과 같아. 모두 가르쳐야 해. 나쁜 짓하는 사람은 미워해야지. 나는 그런 사람들은 천벌 받을 거라고 봐.”
때로는 미워할 줄도 아는 ‘억세고 착한 사람’이 되라는 선생의 말이, 사랑이라는 허위의식 아래 비겁해져 있는 나를 죽비처럼 내리쳤다.
참 인간을 만드는 종교
“옛날에는 나무 하나 벨 때도 기도했지.”라고 말할 때 선생의 눈빛은 사뭇 종교적이다. 하지만 선생은 그것을 종교라고 말하지 않는다.
“종교라고 할 게 없지. 종교가 없을 때도 삼라만상과 인간이 한 형제라고 생각했어. 인간 위주로 하는 것은 말도 안 돼. 다 같다는 마음을 가져야 해.”
선생은 종교적 신앙을 갖지 않지만,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진짜 좋은 사람되기 위함’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인들은 착한 일 하기 전에 우선 나쁜 짓이나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기독교든 불교든 먼저 인간이 돼야 해. 진짜 좋은 사람되기 위해 예수도 믿는 거야. 기독교도 불교도 사람답게 사는 길이야. 그렇지 않고 아멘하고 회개해봤자 소용없어. 삶을 통해 회개해야지.”
삶을 통한 회개 없이 더 많이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더 많이 죄짓게 해달라는 기도와 무엇이 다를까.
“예수님이 얼마나 피곤하시겠어. 성서에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온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
“성서도 읽으세요?”라는 물음에 “권정생 선생이 자꾸 읽으라고 해서 구해놨는데 별 재미가 없어.”라며 웃는다.
“그분이 요 옆 안동 살아. 그분처럼 사는 게 예수처럼 사는 거 같아.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말 가난하게 살고, 말과 삶이 일치해.”
그는 종교가 자유롭고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고 한다.
“자연과 자유는 같아. 정말 자유는 자연스러운 거야. 어떤 사람이든 산을 보면 좋아하잖아. 목사 만들고 권사 만들고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닌 것 같아. 하나의 구조요 인위지. 인위란 다 가짜야.”
깊은 산 속 약초 같은 사람
시인 신경림은 전우익 선생을 가리켜 ‘깊은 산 속 약초 같은 귀한 사람’이라 했다. 선생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며 약초 같다는 말엔 소중한 사람이라는 뜻 말고도 쓰다는 의미도 있음을 상기했다. 선생과의 대화는 달지 않았다. 순간 순간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라고 가르친 선생은 쓰디쓴 약초 같은 이였다.
선생 댁을 떠나 봉화읍 버스터미널에서 영주 가는 차를 기다릴 때 장마 비 잠시 멈춘 사이 잠자리 한 마리가 물 고인 아스팔트 웅덩이에 부지런히 꼬리를 대며 알을 낳고 있었다. 그 순간엔 물 풍부한 자리지만 비 그쳐 해 나면 금세 말라버릴 것을 잠자리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쓰럽게 그 모양을 지켜보던 나는 그 잠자리의 하는 짓이 내게 무척 낯익은 모습이라는 생각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요즘은 밭에 가 일하며 편히 지내. 부지런히 사는 게 힘들지 농땡이 부리며 사는 건 편하고 괜찮아... 나도 처음엔 부지런했지. 하지만 부지런한 게 좋으려면 인간을 따져봐야 해. 옳은 일을 할 땐 부지런한 게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농땡이 부리는 게 더 좋은 거야.”
크고 오래 묵은 나무(老巨樹)는 이미 살아야겠다고 발버둥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다만 하늘과 땅을 우러러 조용히 기도 드리고 있는 것 같답니다. 그러한 생명 앞에 섰을 때, 우리 마음도 조용해질 수밖에 없겠죠. -『사람이 뭔데』중에서
필자 정경일은 철학과 신학, 종교학을 공부했으며,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어서는 성찰적, 수행적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개인 사이트인 [종교적 인간탐구] http://homoreligiosus.net에 일상 속에서 깨달은 삶의 진실을 드문드문 기록해가고 있다.
출처 : 김흥겸 벗들글쓴이 : 영원한방랑자 원글보기메모 :' 좁은길 산책할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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