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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파시즘 읽어내기큰길 산책할때 2014. 3. 10. 22:37
십 몇 년 전에 진중권 등이 운영하던 ‘우리모두’싸이트에서 알게 된 후로 동지애를 느껴서
몇 번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곤 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이런 저런 외
국 철학자를 들먹이며 너는 이런 것 모르니까 내가 너보다 지식이 더 깊다는 등의 얘기를
한다. 나는 인간의 지능이 종합적으로 점수 먹여지고 우위가 가려질 수 있는 특성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비록 어린 친구로부터도 배워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가뜩이나 나
는 탁상물림의 지식에 별로 가치를 두지 않는 이유로 이론만 일삼는 그 친구가 탐탁치 않았
다. 몇 번을 계속 얘기하는데도 한 끝발 내려다보면서 대하기에 절교하다시피 했다.
역시나 10몇 년 간 알고 지내던 장애를 가진 분이 있었다. 전신마비 상태라 행사에 참여하
기 위해 이동 시켜 드리며 살 부비면서 가까워졌었는데, 절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런데 어
느 날. TV에 불교 방송이 잠깐 스쳐지나갔는데, 이에 '먼지같이 사라질 보잘 것 없는 종교’
라고 폄하하는 것이다. 자기가 믿는 기독교는 영원의 종교인데, 불교는 별 볼일 없는 종교
라는 것이다. 거듭 물어도 기독교 이외의 종교는 ‘먼지’다. 그래서 이후 연락을 안했다.
작년 중반 쯤에는 한명의 독지가가 나타나셨다. 둥글이가 맘 놓고 하고 싶은 활동에 몰입하
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활동비용이었는데, 그 독지가는 인터넷상에서 나의 활동을 우연히
접하시고 적극적 지지의 입장을 표하며 부르신 것이다. 그는 신제품 특허를 내서 대기업으
로부터 콜을 받고 있는 터였는데, 앞으로 사업의 기반이 탄탄해지만 본격적으로 둥글이에게
후원을 해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 그런데 한 참 말씀이 오가는 중에 대뜸 ‘솔직히 얘기하
자면 당신의 열정은 인정하겠는데, 성경적으로는 옳지 않아.’라는 말씀을 하신다. ‘무슨 얘기
인지 듣고 싶다.’고 하니, 구체적인 설명은 안해주지 않으시고 세상사를 달관한 듯이 보이는
넉넉한 표정과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차차 알 것이다.’라고 운을 띄우신다. 듣고 싶다고
해도 말안하신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신비한 예언자의 풍모만 풍기신다. 더 이상 말씀 나
눠봤자 시간 낭비일 듯해서 돌아와 인혈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이 세 가지의 이야기에 공통으로 관통하는 특징은 이들이 ‘자기가 알고 있는 작은 것들을
절대의 진리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음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것이 왜 절대의 진리인지 설
명을 해주거나 설명할 필요도 못 느낀다. 오직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것’을 상대방이
모르는 것에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이러한 독단이 가능한 것은 자기가 알게 된 어떤 특별한 성찰에 빠져 그 굴레를 헤어 나오
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좁은 자아로 세상을 재단하는 유아론이 힘과 결합되면 파시즘
을 낳는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자기 앎에 대한 종교적 맹목성’이 깔려 있다.(이 말은 종
교에 대한 맹목성이라는 말이 아니라, 종교적 수준의 맹목성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종교적
수준의 맹목성이 종교를 만나면 그야말로 종교적?이 되곤 한다.)
물론 오감과 신체, 정신을 관장하는 뇌를 중심으로 세계를 인지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중심성’과 그에 따른 다소의 ‘독단성’과 ‘배타성’은 술자리 끝의 숙취와 같이 뗄 수 없는 작
용이다.
하지만 문제는 정도의 차이이다. 과연 그의 파쇼적 사고가 그의 자아를 집어 삼키고 그의
존재성을 편협한 독단의 수렁으로 끄집어 내리는지. 그래서 그로인해 내 존재가 함께 끌어
내려지지 않기 위한 방벽을 세워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하는 것도 이 정도의
차이에 의한다.
문제는 그의 파시스트적 특질이 대중문화에 삼투되어 평준화된 행태와 세련된 교양에 어우
러짐으로 그 실체를 확인하기가 난해한 작업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 자신마
저 스스로 ‘자각’과 ‘성찰’을 부르짖고 있으니 이의 판단 준거는 더더욱 애매모호해진다. 그
가 상당한 지식과 지능, 전략을 갖췄다면 이를 구분하기 위한 작업은 미궁에 빠지기도 한
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적절히 질문하고 그에 따른 응답을 분석하는 냉철한 사고는 결국 동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파시즘을 읽어낼 기회를 제공한다. 굳이 그것을 읽어내야 하는 이유
는 그러한 ‘파시스트적 특성’이 그에게 있어서 ‘예외적인 사고’로 드문드문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존재를 휘감는 근원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양한 방법으로 존재와
관계, 사회를 자신의 편협한 자아에 수렴시킨다.
박근혜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끄떡만 하면 종북좌빨척결을 외치는 수구들의 본질이 파시즘임
은 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 야만의 폭력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변화와 개혁을 부르짓는 우리 안에도 뿌리깊게 내재해 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끝맺으며 앞선 세 가지 절교사례의 ‘포용적이지 못한 발상’에 거부감을 갖는 이들
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첨언하고자 한다. 사실 ‘그들’까지를 포용하는 것이 진정 우리가
가야할 궁극의 길이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 나처럼 미숙한 이들에게 있어서는 최소한 그것
을 ‘구분’하고 그에 부당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격리시켜야 할 필요가 있
다. 그들의 생각을 바꿔낼 방법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과 어울리며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어떤 미묘한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아 내가 왜곡되는 것보다는 그러한 특성
이 읽혀진 이들로부터 내 자신을 격리시키는 것이 내 자신을 명증하게 유지할 수 있는 적절
한 방법이다.
출처 : 길위의 평화글쓴이 : 둥글이 원글보기메모 :' 큰길 산책할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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